지금 이 순간에도 기상이변은 경신된다. 매일 전해지는 폭우와 폭설, 폭염의 경보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무분별하게 생명을 죽이고, 먹고, 낭비하고, 버린다. 그 가운데 절망을 딛고 내일에 오늘의 재난을 대물림하지 않을 것이라, 재앙의 시나리오대로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내일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오늘, 우리, 이곳임을 믿는 새 시대의 새 사람들. 이들이 쟁취할 내일에 대하여.
노예주
1996, 미술 작가 겸 활동가 (@yeju_roh)
차별과 폭력이 있는 현장에 함께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고 있다.
우리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응당 가졌다고 여기는 것들이 해방되었으면 한다.
땅과 그 땅에 살던 생명들, 지구와 동물과 인간에 값을 매기고 소유하는 구조로부터.
행동의 시작 2017년 여름, 방학을 맞아 침대에서 뒹굴며 넷플릭스를 보던 중이었다. 그러다 축산업계와 낙농업계 그리고 제약회사와 각종 질병 협회의 비리와 은폐된 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후, 그날로 채식을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에는 혼자 고립되어 책이나 영상을 보면서 알아가던 것이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구체화되었고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동물권이 모두의 해방으로 연결되는 교차점이 되어 연대 활동으로 이어가게 되었다.
행동과 실천 비건을 시작한 지 6년째다. 값싸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 뒤에는, 값싸고 쉽게 부려진 존재가 있기에 어렵게 음식을 먹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직업이지만, 동물성 원료가 포함된 재료를 소비하지 않고 작업한다. 캔버스를 직접 제작하기 때문에 작업이 시판 캔버스를 쓸 때보다 몇 배는 더 오래 걸리고, 쓸 수 있는 붓과 물감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런 실천이 대단하다거나 힘들다고 이야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캔버스에 발리기 위해 죽은 토끼들이 돈을 지불한다고 해서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차별과 폭력이 있는 현장에 함께하고 비가시화된 존재들을 가시화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영향을 준 것들 나에게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실천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처음 동물권을 접했을 때는 항상 의무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림만 그릴 줄 아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던 거다. 그러나 이후에 다른 활동가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된 것 같다. 특히 5년 전 장위동 강제 철거 현장에서 본 활동가 ‘사이’는 꽤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가장 낮은 곳, 밀려난 곳, 고통받는 곳에 함께한다’는 태도를 취했고, 실제로 그렇게 생활했다. 궁금한 마음에 왜 그러는지 묻고 함께 활동하다 보니 어느새 나 역시 더 많은 곳과 연대하게 되었다. 현재는 새가 멸종하는 개발 지역과 도살장 앞뿐 아니라 사람이 쫓겨나는 강제집행 현장, 주거권을 외치는 국회 앞 농성장으로 간다. 어떤 좋은 말보다 현장에서 맺는 관계, 가까이에 있는 동료들의 삶으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배운다.
참기 어려운 일 세상에 견딜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고 각 사례의 경중은 따질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망치는 건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응당 가졌다고 여기는 것들이 해방되었으면 한다. 땅과 그 땅에 살던 생명들, 지구와 동물과 인간에 값을 매기고 소유하는 구조로부터.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어차피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자신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당장 폭력이 들이닥치는 상황에 처한 이들은 잠시라도 더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 나는 우리가 처한 현실이 망해간다 해도, 점점 끝이 보인다 해도, 계속 이들과 함께하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는다. 막을 수 없던 일 앞에서 함께 버틴 시간이 그 자체로 희망이었다고 생각한다. 5년 전 처음으로 간 연대 현장이던 장위동을 떠날 때는 이 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무력하고 허무했다. 그때 사이 활동가가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평화는 전쟁의 하루를 늦추는 것”이라는 말. 도살장 앞 또한 그렇다. 눈 앞의 소와 돼지들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해도, 잠시 트럭을 멈춰 세운다. 1분을 늦추어 물 몇모금을 나누고 눈을 마주치려 한다. 우리는 멸망 앞에서 겨우 하루를 늦추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정을 생존 전략으로 삼아 나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며 함께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가 바꿀 내일은 서로에 대한 폭력을 멈추는 것, 타자를 통해 얻는 이득을 인지하고 내 것이 아닌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특권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평등해지는 것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