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도 기상이변은 경신된다. 매일 전해지는 폭우와 폭설, 폭염의 경보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무분별하게 생명을 죽이고, 먹고, 낭비하고, 버린다. 그 가운데 절망을 딛고 내일에 오늘의 재난을 대물림하지 않을 것이라, 재앙의 시나리오대로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내일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오늘, 우리, 이곳임을 믿는 새 시대의 새 사람들. 이들이 쟁취할 내일에 대하여.

 

핸디 킴

1995,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 (@handiiikim)
암스테르담과 서울을 기반으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일상적 실천으로서의 슬로 패션을 실험하고 지속 가능한 형태의 비주얼 디자인을 지향하며 작업한다.


행동의 시작 
10대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옷을 모으는 일이 취미이기도, 버릇이기도 했다. 특히 프린트나 형태가 독특한 옷을 좋아했다. 옷은 늘 많았지만 계속 샀다. 그러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 피란민 소식을 접했고, 구호물자 캠페인에 동참하려고 옷을 골랐는데, 오가나이저 측에서 받기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 방한과 위험한 상황 대비용 의류가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였고, 그 말에 한동안 멍했다. 내 눈앞에 쌓인 이 옷 무더기가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조차 될 수 없다니. 버리기는 너무나도 쉬운데 말이다. 내 손을 떠나면 그대로 쓰레기가 되어 어디에도 위치하지 못한 채 무책임한 공간에 뒹굴겠다는 생각, 그리고 SNS에서 흘러가듯 지나친 옷 쓰레기 더미 산 이미지 속 봉우리 하나는 내 책임일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그날부터 ‘인지하며 소비하는’ 태도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주목하는 이슈 수년 전 패션 산업 내에서 업사이클링과 빈티지가 트렌드로 부상했고, 이후 많은 브랜드에서 빈티지 느낌을 담은 신제품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럴듯하게 세컨드핸드풍으로 제작한 옷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후 또 다른 트렌드가 형성되면 지금 만들어지는 옷들은 그때에도 많은 이의 옷장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혹은 어떤 산의 한 봉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씁쓸하다.

참기 어려운 일 몇 초 안에 완성되는 짧은 영상처럼 빠른 것을 계속 주입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는 우리의 생각 프로세스를 납작하게 만든다. 이런 흐름이 지속되면 너무나 협소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이는 다른 생명체를 인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지속 가능성은 이런 태도가 팽배한 환경 안에서는 그저 텅 빈 메아리처럼 울릴 수밖에 없다.

낙담 속 희망 사실 자괴감을 느낄 때가 많다. 내가 사랑하는 패션의 어떤 부분에 대해선 아주 날카롭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패션을 소비하며 이 산업을 지지한다. 이 아이러니에 수없이 실망하고 슬퍼진다. 그렇지만 내 태도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바꾸려고 노력하며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 힘은 불편을 익숙한 일상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다정함 덕분에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