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되는 존재가 어우러질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조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배웠다.”

 

디즈니와 픽사의 협업으로 탄생한 스물일곱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은 물, 불, 공기, 흙으로 구성된 원소들이 살아가는 ‘엘리멘트 시티’를 배경으로 한다. 서로 다른 원소가 섞일 수 없는 대도시에서 불 ‘앰버’와 물 ‘웨이드’가 특별한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제76회 칸 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돼 최초로 공개되며 호평받았다. 유모차를 탄 조그마한 불이 엄마가 건네준 연료를 마신 뒤 화염을 뿜어대고, 흙의 몸에서 꽃이 피어나는 등 사랑스러운 발상이 돋보이는 장면들이 실감 나는 건 70~80명의 3D 애니메이터가 각자에게 주어진 1분 내외의 분량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덕분일 것이다. 이 과정에 참여한 픽사 소속 애니메이터 이채연이 <엘리멘탈> 국내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그리고 캐릭터에 생기를 더하는 과정과 ‘조화로운 세상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에 대해 들려주었다.

 

 

<엘리멘탈> 개봉을 맞아 한국에 왔다. 원래 1년에 한 번꼴로 한국에서 가족과 휴가를 보내왔기 때문에 오랜만에 온 건 아니다. 다만 그동안은 머무르는 기간이 짧아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홍보 일정을 마친 뒤 며칠 더 있다가 갈 계획이다. <엘리멘탈> 시사회와 관객과의 대화(GV) 자리에도 가족과 지인들을 초대했다. 상영이 끝난 뒤 무척 감동받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다들 이 작품을 자랑스러워해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고국에서 진행하는 홍보 일정이라 더 특별하게 여겨질 것 같다. <엘리멘탈>이 한국 극장에 공개될 때 어떤 기분을 느꼈나? <엘리멘탈>을 일찍이 감상하기 위해 극장을 찾아온 관객들이 영화에 집중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스크린 하단에 한글로 적힌 자막을 보며 ‘<엘리멘탈>이 드디어 한국에서 개봉하는구나’ 하고 문득 실감하기도 했다. 픽사 최초의 한국계 감독인 피터 손의 작품이고, 한국 가족 문화 등 우리와 친숙한 요소가 많이 녹아 있는 작품이라 유독 애착이 간다.

<엘리멘탈>에 앞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와 <버즈 라이트이어>를 비롯한 다수의 영화에 참여하며 10여 년간 경력을 쌓았고, 그 이전에는 게임 애니메이터로 활동했다. 영화 작업을 시작한 계기가 있었나? 2010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라푼젤>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때 ‘나도 영화를 통해 감동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경력을 쌓다 보니 꿈에 그리던 픽사에 입사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약 2년간 이곳에 몸담고 있다. 자유와 책임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환경에서 3D 애니메이션 작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영화의 3D 애니메이션 작업은 주로 어떤 과정을 거치나? 감독님이 스토리를 만든 다음 캐릭터 디자인과 모델링, 레이아웃 등을 마무리하면 3D 애니메이션 작업이 시작된다. 초반에는 소수의 애니메이터가 레퍼런스를 찾아보며 기본적인 튜토리얼을 개발한다. 캐릭터를 움직일 때 활용하기 좋은 방법을 공유하는 덕분에 각자의 분량을 할당받은 수십 명의 애니메이터들이 보다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다. 하지만 각 애니메이터가 튜토리얼을 적용하는 수준을 넘어 저마다 자신의 도전 과제를 해결해야 가장 훌륭한 장면이 완성된다.

<엘리멘탈> 3D 애니메이션의 주요 도전 과제는 무엇이었나? <엘리멘탈> 속 캐릭터들이 사람이나 사물이 아니라 원소이기 때문에 이들의 움직임을 구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앰버를 예로 들면, 사람한테 불이 붙은 형태로 만드는 대신 앰버 자체가 불처럼 보이도록 작업해야 했다.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불이 어떻게 움직이더라?’ 하는 의문에서 출발해 가스 불이나 촛불 등을 관찰하며 방법을 찾아갔다. 다른 애니메이터들과 레퍼런스를 공유하며 함께 연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앰버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알게 되었고, 이를 하나하나 활용해보며 제일 효과적인 것을 택했다. 촛불을 빠르게 흔들면 순간적으로 작아졌다가 다시 타오른다는 점에 착안해 앰버가 몸을 갑자기 움직일 때 투명도를 낮추는 식이었다.

캐릭터의 외형 중 가장 공들인 부분은? 눈, 코, 입이 제자리에 있지 않을 정도로 캐릭터가 늘어나거나 찌그러지더라도, 헤어스타일만큼은 유지하려 했다. 이를테면 앰버의 머리는 3개의 원뿔을 이어 붙인 듯한 형태를, 웨이드의 머리는 파도를 형상화한 형태를 항상 갖추도록 했다. 이런 식으로 캐릭터마다 고유의 특징을 살리는 게 <엘리멘탈> 애니메이터들이 따른 원칙 중 하나였다.

 

 

캐릭터를 더욱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동작과 감정의 연유를 세심히 살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애니메이터의 작업에 배우의 연기와 비슷한 지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배우가 설득력 있는 연기를 하듯이, 애니메이터는 캐릭터의 모습이나 움직임을 통해 관객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서 각 캐릭터를 담당하는 성우들의 목소리 톤이나 표정 등을 참고하는 편이다. 애니메이터가 직접 작품 속 장면을 연기해보고, 이를 영상으로 촬영해 작업에 활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연기 수업을 듣는 애니메이터들도 있다. 3D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의 외형뿐 아니라 내면까지 완벽하게 파악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엘리멘탈>에서 본인과 가장 닮았다고 느끼는 캐릭터는 누구인지 궁금하다. 앰버. 감정이 풍부한 편이라, 슬픔과 기쁨을 비롯한 여러 감정을 강하게 표출하는 앰버의 모습을 구현할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앰버는 분노하는 모습이 특히 매력적인 친구다. 그래서 앰버가 화내는 장면을 작업할 때 주변 동료들이 멋있게 표현해보라며 격려해주기도 했다.(웃음)

애니메이션 작업뿐 아니라 <엘리멘탈> 제작 과정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본인에게 지니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내 경험이나 도전과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더 큰 보람과 성취감을 느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엘리멘탈>은 피터 손 감독님과 당신의 가족이 이민자로서 겪은 일들을 녹여낸 작품이다. 나도 처음으로 낯선 땅에서 생활하기 시작했을 때 문화 차이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의 내가 다른 원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앰버의 가족과 비슷했다고 느꼈다. 그만큼 이들이 엘리멘탈 시티에 융화되는 과정을 그린 이번 영화를 작업하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다 조화로운 곳으로 만들 방법이 <엘리멘탈>에 담겨 있을 거라 짐작한다. 웨이드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웨이드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마음의 벽을 세워두었던 앰버가 벽 너머로 나와 엘리멘탈 시티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만끽하게 도와주었다. 이처럼 소외되는 존재가 어우러질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조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배웠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엘리멘탈>은 결국 사랑에 관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타인을 사랑하는 과정은 그 사람의 본질과 근원을 이해하는 것”이라던 피터 손 감독의 말도 떠오른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모든 인간이 다같은 원소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우리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무수하고 다양한 존재가 하나의 세상 안에서 같이 살아가야만 한다. 만약 이 세상에 어떤 충돌이 일어난다면, 그건 누군가 욕심을 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기적인 마음을 내려놓고, 타인을 존중하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라고 본다. 이건 내가 지금껏 믿고 있는 신념이기도 하다.

그 신념과 맞닿아 있는 영화 <엘리멘탈>이 본인이 참여한 작품 목록에 추가되었다. 애니메이터로서 느끼는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이든 되어볼 수 있다는 점. 작품 속 세계에서 애니메이터는 나이나 성별을 바꿀 수도, 사물로 변신할 수도, <엘리멘탈>의 원소가 될 수도 있다. 이토록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펼치며,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에 애니메이션을 사랑한다. 앞으로 애니메이션이 더 다양한 관객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모두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즐기는 문화가 보다 공고히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애니메이터를 넘어 더 큰 꿈을 꾸기도 하나? 최종 목표는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내 경험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며 자아실현을 할 기회가 언젠가 생긴다면 좋겠다. <엘리멘탈>의 피터 손 감독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