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구독 유니버스

writer 이화정(영화 저널리스트)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에 스마트폰 세로 창이 등장한 게 그러니까, 2017년이다. 영화는 프랑스 칼레 지역을 배경으로 유럽 부르주아 가족의 소통의 부재를 설파하고 있었다. 주인공(이자벨 위페르)을 중심으로 그의 아버지와 어린 딸까지 3대가 함께 사는 이 집은, 마침 부르주아 집안답게 구조도 복잡하고 함께 있지만 각자 자신만의 공간에서 숨어 살기 ‘딱’ 좋은 구조였다. 하네케 감독이 크고 럭셔리하지만 ‘갑갑한’ 이 집 안의 통로로 활용하는 건 바로 각종 스크린이다. 스마트폰이든, 노트북이든, 기기의 창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아니, 이건 스마트폰으로 납치된 엄마를 찾는 과정을 SNS창으로 보여주는 <서치 2> 같은 대놓고 파격적인 영화가 아니다. <피아니스트>와 <아무르> <하얀 리본> 같은 인간의 존엄을 바탕으로 무게 있는 영화를 만들며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거장의 신작으로 보기에는 파격적인 시도임이 분명하다.

이 장치는 하네케의 영화적 미학, 새로운 시도로 읽혔다. <해피엔드>를 본 직후 감독을 만났다. “어휴, 아이폰이 없으면 요즘 세상에서 일을 할 수가 없어” 하고 푸념하던 그는 “커플끼리 카페에 들어와도 각자 스마트폰으로 뭔가 하느라 바쁜 요즘 사람들의 속성을 반영했다”고 했다. 부르주아뿐 아니라 어디나 사정이 그렇다. 그러고 보니 최근 휴 그랜트가 “컷과 동시에 배우, 스태프 모두 각자 스마트폰을 보느라 바빠 현장에서 과거처럼 동료애를 가지는 건 불가능해졌다”라고 말하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거장도 톱 배우도 피해갈 수 없는, 스마트폰 시대 소통의 부재라니!

이 서먹한 무드가 엄마와 나 사이에 찾아온 지도 오래다. 불통의 주범이 누군지 명확해지는 예 하나. 어느 날부터인가 집에서 물건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주방용 가위였고, 다음은 공구용 칼, 그다음은 문 앞에 있던 작은 거울 순이었다. 아, 꽤 오래 자리를 지키던 화분도 포함해야 한다. 잘 보이는 곳에 있던 것들이 어딘가 구석진 곳으로 이동하거나 재배치되는 식이었다.

“인테리어 풍수에서 말이지….” 엄마가 물건들이 옮겨 간 자리를 알려주며,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풍수 인테리어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뾰족한 것은 절대 눈에 띄는 곳에 두지 말 것! 당장 가위를 원위치에 가져다 놓으라는 딸과, 그건 딸의 좋은 운세를 위해 절대 안 된다는 엄마의 팽팽한 신경전이 시작된 건 그놈의 풍수 인테리어 채널 운영자 때문이다. 1백만 구독자를 거느린 파워 유튜버는 비겁하게 얼굴도 드러내지 않고, AI 목소리 따위로 엄마의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은 채 자꾸 이상한 뇌피셜 정보를 퍼뜨렸다. 거울은 문과 마주 보게 두지 말라는 조언처럼 사물의 위치를 지정하는 것뿐 아니라 벽지 색깔, 바닥 재질도 모두 풍수 인테리어에 포함된다. 급기야 ‘쓰던 지갑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주면 안 된다. 들어오던 돈도 나간다’는 해괴망측한 이야기까지 들었다. “요즘 누가 지갑을 들고 다닌다고 그런 걸 믿고 그래!” 그 흔한 신년 운세도 미신이라며 보지 않는 엄마였는데. 어쩐지 친구를 잘못 사귄 아이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가 파워 유튜버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사이 우리 사이 불통의 골은 깊어졌다. “아니 그래도….” 뭔가 말을 하려던 엄마도 이내 말꼬리를 감췄다. 이건 뭐 서로 이야기해봤자 답이 없겠구나 싶었는지 엄마도 더 이상 설득하기를 포기한다.

엄마의 ‘소통’ 경로는 요즘 이렇다. 구독자를 몇십에서 몇백만 명쯤 거느리고 있을 파워 유튜브 채널 클릭, 클릭은 클릭을 부른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알고리즘의 늪에서 건진 링크는 엄마의 카톡 채널에 있는 지인들에게 빠르게 전파된다. 물론,거기에 자신이 건진 ‘유용한 정보’를 ‘잔소리’라 치부하는 딸은 포함되지 않는다. 같은 말을 해도 유튜버가 말해야 신빙성이 생긴 지 오래다. 엄마의 유튜브 유니버스와 멀어지는 순간,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계속 대기권 밖에서 서로의 행성과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가끔 ‘가짜 유튜브’라도 만들어서 엄마와 소통하고 싶을 때도 있다. 얼마 전 엄마와 도쿄로 여행을 갔다. 팬데믹 이후 처음이라 오랜만에 꺼낸 여권을 들고 마냥 설레었다. 지인들에게는 바쁜 와중에 제법 엄마를 위하는 척 효녀 코스프레를 하고 떠나온 길이었다. 막상 도착한 도쿄는 아직 벚꽃이 피기 전이었고, 도쿄는 기대와 달리 스산했다. 시인 이상이 ‘죽기 전에 꼭 맛보고 싶었다던 센비키야의 메론’을 찾아간, 무려 1834년 창업한 센비키야는 줄이 길어도 너무 길어 기다리는 고통에 4천6백 엔짜리 메론 파르페의 감흥이 2천3백 엔 정도의 맛으로 줄었달까, 재미없는 영화를 보자고 친구를 부추긴 양 엄마한테 괜스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는 다행히 서울에서 보던 유튜브 구독 채널의 새로 업데이트된 콘텐츠를 소비하는 구독자의 본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공유한 식사나 후식 자리, 잠깐의 관광, 쇼핑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을 채운 건 각자의 자그마한 스마트폰 창이었다. 풍수 인테리어 말고도 엄마에겐 정치 관련 유튜브 채널, 덕질을 할 수 있는 정동원 관련 채널, 각종 레시피로 가득한 요리 채널까지 시간을 때울 콘텐츠 리스트가 넘쳤다. 구독은 온전히 자신만의 영역으로 입맛대로 꾸려진 세상과 소통하는 ‘각자의 창’이었다.

호텔 방에 앉아서 우리는 각자의 섬으로 들어갔다. 여행지인데 집 같은 기분. 생각해보면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엄마는 어쩔 도리 없이 외출이 줄었다. 어느새 엄마는 혼 자만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작은 창을 켜고 빠져드는 데 익숙해졌다. 함께 호텔 방에서 같은 채널을 공유하는 건, 코로나 팬데믹 전의 과거 풍경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엄마 옆에서, 엄마를 걱정하는 척하며 내 구독 리스트를 뒤적이고 있었다.

아, 하네케가 몇 년 전 영화를 만들면서 그리고자 한 풍경이 이거였구나. 캐릭터들이 각자 보는 SNS 창의 비율로 하네케의 ‘파격적’ 시도는 이제 그저 일상일 뿐. 사실 각자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이 소통의 단절이 이제는 오히려 편하고 익숙하기까지 하다. 이 정도 단절이 없으면 이렇게 세대도, 취향도, 성향도 다른 엄마와 내가 어떻게 한 공간에서 숨 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어제도, 오늘도 그러니 우리는 서로의 구독 취향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지은이가 1백만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버가 됐다더라.” 필라테스 하나로 파워 유튜버가 된 사촌 동생 소식을 엄마에게 전해 들었다. 유튜브에 뺏긴 소통의 부재를 운운하기에는 주변이 온통 유튜버고 나조차 영화 유튜버로서 유튜브 채널을 매주 생산하고 있다. 저녁엔 요리 유튜버와 소통 중인 엄마의 반찬이 등장했다. 된장에 버무리던 고추찜 대신 엄마가 구독 중인 유튜버의 레시피대로 찹쌀가루를 넣었단다. 아삭한 식감은 유튜버 방식이 괜찮았다. “맛있는데, 앞으로 고추찜은 이렇게 하는 게 더 좋겠어.” 맛있다는 한마디에 엄마의 표정이 환해지면서 찹쌀가루의 기능에 대해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요즘 못 보던 요리가 부쩍 많아졌다. 엄마의 식재료 리스트와 퓨전 레스토랑에서 먹을 법한 한식들의 정체는 물론 요리 유튜버 샘들의 레시피였다. 다행히, 더러는 대화의 물꼬를 터주는 카테고리도 있다. 공통의 구독 채널을 좀 늘려봐야겠다. 단절 사이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을 결심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