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피자는
네모났다

writer 복태(밴드 선과영의 보컬, 세 아이의 엄마)

나는 반숙 달걀을 좋아한다. 하지만 엄마는 늘 완숙 달걀 프라이를 해주셨다. 나는 감자와 당근이 든 카레를 싫어했지만, 엄마의 카레는 늘 감자와 당근이 큼지막하게 들어있었다. 그래서 카레가 나오는 날이 싫었다.

나의 첫 피자는 엄마가 만들어준 피자였는데, 엄마의 피자는 항상 네모났다. 우리 집은 가난한 편에 속했는데, 그에 맞지 않게 집에는 가스레인지와 일체형인 번지르르한 오븐이 있었고, 엄마는 특별한 날이면 그 오븐에 피자를 구워주곤 하셨다. 엄마의 피자는 네모난 모양에 빵은 매우 두꺼웠고, 달았다. 늘 잘 부푸는 핫케이크 가루로 피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나는 피자가 원래 도우가 두껍고 단맛이 나는 빵인 줄만 알았다.

피자는커녕 짜장면도 사 먹기 어려웠던 그 시절, 엄마는 아주 가끔 탕수육도 해주셨는데, 나는 탕수육이 엄마가 개발한 음식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오징어튀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엄마는 외식을 할 수 없는 우리 집 형편을 자식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웬만한 음식은 모두 직접 만들어주셨다. 사실 그것이 사 먹이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임을 아이 셋을 키우는 지금은 누구보다 잘 알지만, 어릴 적엔 외식을 시켜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1남 2녀 중 둘째다. 소위 말하는 장녀로 자라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엄마를 도와 부엌일을 했고, 세 살 위인 오빠와 세 살 아래 여동생의 밥을 챙겨야 했고, 치우는 것도 내 몫이었다. 밥을 차릴 땐 엄마 옆에 딱 붙어 엄마의 오른팔처럼 움직여야 했고, 밥을 먹는 도중에도 모자란 반찬이나 물을 가져오는 것 역시 내 몫이었다. 엄마 말에 따르면 오빠와 여동생은 말랐지만 나는 살을 빼야 하니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끔 억울한 마음이 들 땐 동생은 언제 시키느냐며 따져 물었고, 엄마는 그럴 때마다 “네 나이가 되면”이라고 답하셨다.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도 엄마는 “네 나이가 되면”이라고 말했고, 스무 살이 되어도 똑같은 말을 하며 언젠가부터는 “네 동생은 글렀으니 여태껏 엄마를 잘 도운 네가 계속 할 수밖에”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착한 딸 콤플렉스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를 낳아준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엄마 말이라면 법처럼 따랐다. 그렇게 자란 나는 기미 상궁인 양 엄마에게 딱 붙어 지낸 덕에 요리 솜씨도 제법 갖출 수 있었고, 간을 잘 보는 사람이 되었다. 그 힘으로 세 아이의 밥은 어렵지 않게 차리는 엄마가 되었으니 억울해할 일만은 아니다.

내가 스물두 살 때, 나와 여동생이 동시에 대학에 들어가는 바람에 엄마는 25년간의 전업주부 생활을 마치고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때 하신 일이 천주교 신부님의 식사를 책임지는 ‘식복사’라는 일이었다. 요리엔 자신 있는 엄마였지만, 가족의 밥만 책임지던 사람이 체계적으로 식단을 꾸리고 매일 끼니때마다 다른 음식을 구성해 요리하는 것 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실 요리 자체가 힘든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담당한 신부님의 식성이 워낙 까다로워 그에 맞추는 일이 꽤 큰 스트레스였을 터다. 그래서 일을 시작한 후부터 엄마에게 “오늘 뭐 먹을까?”라는 질문은 금지어가 되었다. 요리가 제일 큰 장점이자 좋아하는 일이었는데, 그 시절엔 엄마를 가장 괴롭히는 일이 되어 있었다. 그 시절이 우리 가족에겐 음식 암흑기였다. 그리고 엄마의 스트레스는 곧 나의 죄책감으로 이어졌고, 나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놀 새도 없이 오늘도 힘들었을 엄마한테 달려갔다. 그것이 그때 당시 내가 딸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엄마는 그 힘든 시절을 4년이나 버텨냈고, 나의 대학 졸업과 함께 엄마의 일은 끝을 맺었다. 그리고 우리 집엔 다시 요리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엄마가 다시 부엌일에 애정을 쏟으니 집 안에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일지라도 지독함 앞에선 이길 장사가 없다는 걸 나는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러니 더더욱 하기 싫은 일은 버틸 재간이 없다고 말이다.

세 아이를 키우며 힘들어하던 엄마를 보며 결혼은 물론이고 아이를 낳는 삶을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내가 지금은 엄마처럼 세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나만 생각하며 살겠다던 내가 아이를, 그것도 셋이나 키우고 있다. 인생은 그래서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방심할 수가 없다.

우울하던 시절을 힘겹게 지나온 엄마는 다행히 여전히 건강하며 무려 7명의 손주를 거느린 할머니가 되었다. 세 남매가 신부와 수녀가 되길 바란 엄마의 바람과는 참으로 멀리 와버린 인생이다. 이젠 공연을 다닐 때마다 세 아이를 맡기는 나 때문에 엄마는 우울할 틈이 없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세 아이는 할머니의 밥을 엄마 밥보다도 좋아한다. 얼마 전 병원에 짧게 입원했던 일곱 살배기 막내딸은 퇴원을 기다리며 “나 할머니 밥 먹고 싶어. 할머니가 만들어준 오므라이스랑 갈비. 그리고 소고기뭇국도”라고 말하며 할머니에게 전화하라고 성화를 부렸다. 나를 키워준 엄마의 밥이 이제는 나의 아이들을 키워주고 있다. 한 군(남편) 역시 마음이 허할 때면 “장모님표 청국장찌개 먹고 싶다. 스팸 넣은 김치찌개도”라며 나의 엄마 밥을 그리워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그리움이 사무치기 전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다.

그렇게 나는 요리로 엄마를 기억하며, 지금도 여전히 엄마의 김치를 받아 먹고 있다. 세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딸이 안쓰러운지 엄마는 아직도 우리 집 냉장고 사정을 물으며 다섯 식구가 먹을 국과 반찬을 경기도 의정부에서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까지 날라다주신다. 나 역시 지치고 힘들 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나 그거 먹고 싶어. 지금 간다” 하고 언제든 집에 머물고 있는 엄마에게로 간다. 서로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무뚝뚝한 모녀는 밥으로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다.

엄마가 된 지 12년이 넘은 지금, 여전히 나는 엄마보다도 딸 역할이 더 익숙하다. 아직도 내가 ‘엄마’라고 불리는 사실이 이상하고 신기할 때가 많다. 가끔 밥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스스로를 보며 엄마를 떠올린다. 늘 부엌에서 무언가를 만들거나 정리하고 계시던 엄마를 말이다. 엄마는 여전히 아빠와 단둘이 사는 집에서 부엌에 머무는 시간이 가장 많다. 둘이 사는데 만들 게 뭐 그리 많을까 싶은데, 엄마의 냉장고에는 없는 것이 없다. 언제든 찾아가 오므라이스를 외치면 10분 만에 오므라이스가 만들어져 나오고, 청국장찌개를 끓여달라 하면 어디에선가 청국장을 꺼내 오고, 스팸김치찌개를 외치면 찬장에 구비해둔 스팸을 슬며시 꺼내 온다. 나는언제쯤 엄마 같은 만능 요리사가 될 수 있을까.

세 아이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엄마’라 부르는 소리에 ‘그만’이라 외치고 싶을 때마다 나의 엄마를 떠올린다. 나 역시 언제나 엄마를 외치고 싶은 딸이기 때문이다.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지금도, 아직은 더 우리 엄마의 밥이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