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출신의 세계적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컬렉터, 갤러리스트인 악셀 베르보르트(Axel Vervoordt)의 초대를 받았다. 1960년대 철학과 사유, 성찰의 가치가 지금처럼 삶의 우선순위가 아닐 때부터 시간에 의해 깎이고 마모된 자연물, 사람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가구와 도자기, 미술 작품에서 가치를 발견해온 악셀 베르보르트. 카니예 웨스트와 킴 카다시안, 로버트 드 니로, 이브 생 로랑과 발렌티노 가라바니, 캘빈 클라인이 경외를 표해온 그의 철학과 미감의 역사가 쌓인 카날(Kanaal)과 스흐라벤베절성(s-Gravenwezel)으로 향했다. 미끄러지듯 벨기에 안트베르펜 중심가를 빠져나간 차는 20여 분 후 베이네험(Wijne-gem)의 ‘카날’ 앞에 도착했다. 악셀 베르보르트가 1998년 매입한 악셀 컴퍼니와 악셀 갤러리의 터전이다. 그 시작은 안트베르펜 시내의 플라이켄스항(Vlaeykensgang)이었다. 악셀은 중세 시대에 지어진 11채의 가구가 밀집한 이 부지를 1969년에 사들이면서 공식적으로 악셀 컴퍼니의 시대를 열었다. 재능 있는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유하려는 유럽 각지의 컬렉터들이 모여들면서 그 역시 아트 딜러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이후 악셀과 그의 동반자 메이(May)가 지금 살고 있는 스흐라벤베절성으로 잠시 회사와 창고를 옮겼다가 약 20년에 걸친 리노베이션 공사를 마친 후 2017년 카날에 입성했다. 현재 90여 명의 직원을 둘정도로 회사의 몸집이 커진 데에는 큰아들 보리스의 활약이 컸다.
작품에 따라 공간을 선택하기도, 그 반대이기도 했겠으나 카날의 각 공간과 그곳에 놓여 있는 그의 영구 컬렉션은 더 나은 자리를 찾기 어렵겠다고 느낄 만큼 최적의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곡물 창고로 사용하던 거대한 원형 건물에는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At the Edge of the World’를, 이집트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신성한 분위기의 카르낙(Karnak) 갤러리에는 보스코 소디(Bosco Sodi) ‘Clay spheres’를, 어떤 카메라도 그 작품을 온전히 담지 못할 정도로 칠흑같이 어두운 헨로/마카(Henro/Ma-Ka) 갤러리에는 악셀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예술가 중 한 명인 예프 페르헤이언(Jef Verheyen)과 단색화가 정창섭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회화부터 조각, 설치미술까지, 국적과 장르의 경계가 없는 컬렉션을 관통하는 주제는 불완전하지만 긍정적이면서도 조화를 꿈꾸는 미학이다. 그 안에서 악셀과 보리스는 겸손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추구한다. 아트 딜러, 인테리어 디자이너, 큐레이터, 작가, 재단 대표 등의 수식어 대신 자신은 그저 돌을 수집하고 그에 맞는 자리를 찾아주는 사람이라며 겸허한 태도를 보이는 악셀과 지난 50여 년간 아버지가 그랬듯, 이제는 아버지처럼 세계를 누비며 가업을 잇고 있는 보리스와 마주 앉았다.
Axel & Boris Vervoordt
이렇게 두 분이 함께 인터뷰를 한 적이 또 있나요? 보리스 자주는 아니었어요.
아버지로서 보리스가 사업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아본 건 언제였나요? 악셀 보리스가 일곱 살 때였어요. 하루는 아내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고에 대해 불평을 한 적이 있어요. 때 마침 그 자리에 보리스가 있었는데, 페어를 통해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판다는 걸 라디오에서 들은 적이 있었나 봐요. 얼마 뒤 직접 만든 초대장을 친구와 이웃에게 돌리고 페어를 열어서 자신이 그 재고를 판매할 거라고 말하더군요. 깜짝 놀랐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손님을 초대했으니 준비를 해야 했지요. 보리스가 주관한 그 페어는 꽤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 일이 사업가로서 자신을 처음 증명한 때였죠.
당시를 기억하나요? 보리스 기억납니다. 고무적인 순간이었죠. 어쩌면 이 재능은 DNA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증조할머니부터 우리 가족은 직관을 따라 행동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이는 엄청난 실행력과 자유를 동시에 가져다주죠. 직관에 의해 잘못된 결정을 할 위험도 있지만 그때는 재빨리 방향을 틀면 되고요.
악셀은 일곱 살부터 이웃에게 꽃을 팔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열네 살 때 처음 아버지에게 교통비만 빌려 영국으로 앤티크를 사러 갔죠? 당신의 아버지도 당신이 아트 비즈니스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꿰뚫어 봤던 걸까요? 악셀 아버지는 무척 엄격한 분이었어요. 제가 예술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저 취미이지 삶을 영위하고 사업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러다 제가 열여덟 살 무렵, 저희 가족의 친구 중 한 분이 매달 저에게 돈을 주며 자신의 집을 꾸밀 오브제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자 아버지의 태도도 바뀌더군요. 아트 딜러로서 저를 지지한다기보다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바뀌었죠. 이자를 내는 날짜가 매달 15일이었는데 절대적으로 지켜야 했어요. 아직까지도 그 날짜를 또렷이 기억해요. 아버지는 저에게 돈을 빌려주는 만큼 똑같은 금액을 여동생의 몫으로도 떼어두셨습니다. 여동생이 원할 때 바로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죠.
가족이 함께 비즈니스를 하는 것은 분명한 장단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보리스는 언제 본격적으로 악셀 컴퍼니 뛰어들었나요? 보리스 안트베르펜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어요. 그러다 앤티크나 아트 오브제를 찾아다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이후 아트 히스토리로 전공을 바꿔 졸업했어요.
이런 보리스의 결정을 지지했나요? 악셀 그럼요. 저도 그랬거든요. 경제학을 공부하다 중도 하차했습니다. 대학 입학 전부터 이미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었고, 제 모든 관심이 학위보다 사업에 집중되어 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요. 다만 예술 공부는 평생 했습니다. 작품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최고의 딜러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모든 발견은 더 많은 지식과 연결되어야 하니, 공부를 하는 수밖에요. 보리스가 사업에 참여한 순간부터 회사의 조직이나 재정 운영, 그 결정에 대한 자유를 주기 시작했어요. 이 부분만큼은 저보다 훨씬 낫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보리스는 회사를 더 크게 키우고 싶어 했죠.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 저의 의견과 별개로(웃음) 사업이 자연스럽게 확장되기 시작했어요.
보리스가 무엇을 제안하든, 아버지이자 동업자로서 항상 지지해주는 편인가요? 가족이지만 각자의 캐릭터가 확고해서 의견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해결하는 편인가요? 악셀 문제가 있더라도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결국엔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종결되죠.
아버지이기 때문에 설령 납득이 되지 않아도 따르는 것은 아니고요?(웃음) 보리스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는 분석보다는 직관이나 첫인상 같은 감성적 요소에 따라 의사 결정을 하는 성향이 강한 분입니다. 아버지의 결정에 반대해야 할 경우도 있죠. 각자 우선순위가 다르니까요. 하지만 사고를 전환하면 조금 왼쪽으로 가거나 오른쪽으로 가는 것에 대한 논쟁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럼 자연스레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되죠.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 후 유럽 여러 곳을 함께 다니며 오브제를 구입하고 회사를 꾸려왔죠. 당신의 남동생 딕(Dick)은 악셀 컴퍼니의 부동산 개발 및 신규 사업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고요. 악셀 컴퍼니 안에서 가족 간의 분업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요? 보리스 창의적인 문제 해결(Creative Problem Solving) 방식을 분석, 제안, 개발, 실행의 네 가지로 분류한 포사이트(Four-sight) 모델에 적용해 설명해보죠. 분석가는 해결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쥐고 있어야 하고, 제안가는 발상의 전환에 탁월하고, 개발자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일하며 실행가는 행동을 주저하지 않죠. 아버지에게는 아이디어를, 동생에게는 분석을 바탕으로 한 통찰력을, 어머니에게는 실행 방향에 대한 조언을 얻고 있습니다.
굉장히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들리네요. 보리스 부모님의 결혼 50주년 기념사에서 제가 한 말이 있어요. ‘악셀은 꿈꾸고, 메이는 현실로 만든다.’ 악셀 항상 그렇지는 않고요. (웃음)
함께 회사를 운영하면서 서로에게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인가요? 악셀 보리스는 회사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며 인재를 배치하고 운영하는 데 능숙합니다. 제가 크리에이티브한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죠. 보리스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열린 마음이요. 개방성이야말로 굉장한 가능성이자 위대한 도구라고 생각해요. 항상 새롭게,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니까요.
함께 일할 작가를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인가요? 보리스 저희는 악셀 컴퍼니를 비롯해 악셀 갤러리, 또 다른 모든 사업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는 신념 아래 일합니다. 작가를 선정하는 기준 역시 마찬가지고요.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고, 정치적이지 않으며, 평등한 커뮤니티나 사회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의지나 메시지가 엿보이는 작가 혹은 작품을 들이죠. 그저 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상주의자보다 현실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 혹은 작가를 선호한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보리스 아니요. 꿈을 꿔야죠. 잠재적으로 실현 가능한 일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이 성공적인 사고의 시작이고, 그런 면에서 꿈은 최고의 실험실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꿈을 어떤 에너지와 방식으로 풀어냈는가를 봅니다. 악셀 느끼는 거죠. 직관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