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노식

임노식은 유화와 더불어 동판화의 형식을 캔버스로 옮기는 샌딩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작가는 일정량의 유화 작업을 마치고 다시 샌딩 작업으로 넘어가는 지점,
혹은 샌딩 작업을 완성하고 유화 작업에 임하는 변환점의 쾌감을 매우 기쁘게 마주한다.

키아프 kiaf 임노식 작가

티셔츠 에이치앤앰(H&M), 블랙 코튼 팬츠 비슬로우(Beslow), 스니커즈 뉴발란스(New Balance).

한동안 발표하던 ‘작업실’ 시리즈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네요. 2019년의 작업실은 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SeMA)였는데, 창밖으로 한강이나 산이 보였어요. 간혹 창문에 제 모습이 비칠 때도 있었고요.

지금은 자연보다는 건물이 즐비한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여전히 작업실에서 보이는 풍경을 포착하고 있나요? 예전에 그린 작업실의 풍경은 풍경화라기보다 정물화에 가까웠죠. 지금 새롭게 그릴 작업실의 풍경에는 나와 어떤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공기나 분위기를 담아보려고 해요. 일종의 습하거나 건조한 기운일 수도 있겠네요. 그 실험작이 지금 우손 갤러리에 걸려 있고, 올해 12월에 열릴 송은미술대상전에도 출품하려고 합니다.

건조함 같은 공기의 성질을 표현하기 위해 기존에 사용하던 방식이나 재료에 변화를 주기도 했나요? 샌딩과 유화, 두 가지 방식을 진행하고 있는데 공기를 표현할 때는 유화 작업을 해요. 그 가운데 중점을 두는 것은 표면적인 이미지보다는 이미지를 포착하고 캔버스까지 옮기는 과정이에요. 아직 확실한 표현 방법을 선정한 단계는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담아내기 위한 실험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죠.

이미지를 포착하는 방식도 궁금합니다. 예전 작업실에서는 사진을 찍거나 드로잉을 한 후에 이를 캔버스에 옮겼어요. 그런데 현재 작업실에서 작업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드로잉보다는 실제 정물에 집중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미지 수집과 구현하는 장소를 분리하는 실험을 했어요. 이후에 작업한 ‘모래 산’ 시리즈에서는 아버지와 통화하며 이미지를 수집한 적도 있어요. 모래 산은 국가사업의 일환으로 생기는데 그 과정에서 소소한 사건이 발생하곤 해요. 모래 썰매장이 생겼다가 폐장하기도 하고, 1년 안에 없애기로 했다가 10년째 유지하기도 하죠. 제가 그것을 그리는 걸 알고 계시던 아버지가 모래 산을 지나다가 제게 전화를 하셨어요. “모래 산 위에 가는 선이 있어. 가는 나무도 있고.”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가는 선과 가는 나무에 대한 이미지가 제게 다가온 거죠.

선의 굵기에 대한 단서가 핵심이 되었을까요? 제가 동양화과 출신이라 학부 시절에 선의 일필휘지, 기운생동 같은 개념을 배웠거든요. 이 개념의 조건은 마른 화선지에 적당한 먹과 적당한 붓, 적당한 갈피와 스피드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공식에 조금씩 의심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선보다는 바탕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선이 좀 더 힘 있어 보이고, 어떤 덩어리를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임노식, ‘Unfolded(7_25)’, Acrylic and oil on canvas, 153×90cm, 2023

키아프 kiaf 임노식 작가

임노식, ‘Workroom01’, Oil on canvas, 184.5×245cm, 2019

그 표현 방식을 적용한 것이 지금의 샌딩 작업이군요. 우선 가는 선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방법 중 하나가 동판이라고 생각했고, 동판의 형식을 캔버스로 무조건 끌어오고 싶었어요. 동판화는 끌로 긁어내고 프레스로 찍어내는 것이 특징인데, 제 작업은 미디엄을 바르고 송곳으로 그려요. 그리고 말린 다음에 색을 넣고 샌딩을 하면 선만 남죠. 초반에는 미디엄을 바르는 시간이 가늠되지 않아 미완성으로 남는 작업이 많았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상태가 됐어요.

붓을 드는 순간뿐 아니라 구상이나 준비 과정 또한 작업을 위한 순간이죠. 다양한 과정 중 어떤 순간을 가장 즐기나요?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작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순간과 마주하는 거예요. 10년 가까이 작업해왔지만 단 한 번도 힘들거나 싫은 적이 없었어요. 이 작업 과정에서 저는 변환점의 순간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다음 주면 35개의 샌딩 작업을 모두 마치고, 유화 작업으로 들어가는데 그 지점이 참 좋거든요. 유화 작업이 어느 정도 쌓여 다시 샌딩으로 올 때도 짜릿함이 들고요.

일종의 게임 같네요. 어려운 퀘스트를 수행하면 다른 종류의 퀘스트로 진출할 수 있잖아요. 비슷해요. 작업의 전환이 몇 번씩 반복되면 나 자신도 업그레이드된 기분이 들어요. 붓을 안 잡다가 잡으면 뭔가 이전보다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고, 또 붓을 잡다가 안 잡으면 이전보다 훌륭한 스트로크가 나오는데 그런 순간이 무척 즐거워요.

두려워하는 순간이 오지 않도록 평소 경계하는 대상이 있나요? 어떤 실험을 했을 때, 우연히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가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런 작업을 극도로 피해요. 그 우연성이 필연적이든 절대적이든 그것을 멀리해야 좋은 작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죠. 우연성도 어떤 반복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야만 한다고 믿고 있고요.

다양한 작업을 하는 와중에 본인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나요? 되새김질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어쩌면 좋지 않은 면만 계속 보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전시를 할 때마다 되새김질을 하는 데는 좋지 않은 것은 비판하되 이전의 좋은 것을 다시 끌어오려고 하는 의도 역시 내포하고 있거든요.

 

많은 아티스트가 신인 시절에 발현되었던 표현력을 그리워하기도 하죠. 학부 시절에 한겨울의 소를 그린 적이 있어요. 지금은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당시에는 그런 표현도 가능했더라고요. 첫 개인전 <안에서 본 풍경>도 그래요. 주목받거나 인기를 끈 전시는 아닌데, 지금껏 연 다섯 번의 개인전 중 그 전시가 가장 좋았거든요. 이유를 떠올려보니 서사적인 내용이 강한 전시였는데, 그 방식이 가장 나다운 전시인 것 같아요. 표현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나만의 진정성이 조금이라도 상대방에게 전달되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별일 없으면 늘 작업실로 출근해 작업하고 있죠. 권태기가 오지 않도록 하려면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리라 봅니다. 제 아내의 눈에는 지금의 제 상태가 다 보인대요. 하루라도 작업실에 출근하지 못하거나 하루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고 왔을 때 특유의 표정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최대한 작업실에 오래 머물기 위해 집안일이나 육아도 열심히 하는 편이예요. 새벽 3시에 출근해 오후 5~6시에 퇴근하는 일정인데, 작업실에 있는 내내 작업할 수는 없지만 작업실이라는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제게는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곧 키아프 서울에 참가하죠. 어떤 작품을 선보일 예정인가요? 출품작은 2019년에 그린 작업실 풍경 작품 2점과 샌딩 작업으로 구성할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은 아트 페어가 조금 무서워요. 그동안 저는 대형 미술관이나 갤러리보다는 신생 공간에서 더 많은 전시를 해왔고, 아트 페어의 분위기 역시 가늠이 되지 않아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누군가의 관심이나 인기 있는 작품에 초연한 편인가요? 관심 자체는 많아요. 소위 말하는 힙한 작품이 있죠. 요즘은 에어브러시로 작업하는 작품도 많던데, 저도 그런 트렌디한 그림을 좋아하지만 동시에 멀리하려는 마음도 있어요. 석사과정에 있을 때, 어떤 동료 작가가 제 그림을 보고 이렇게 작업하면 안 된다면서 너무 올드하다고 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저는 올드함을 계속 가져가고 싶어요. 다만 올드함을 클래식함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다하죠.

작가로서 어떤 꿈을 꾸며 살아가나요? 당연히 롱런하고 싶고, 좋은 작업을 선보이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내일도 모레도 자연스럽게 작업을 하는, 단기 목표 정도밖에는 없어요. 그저 건강하게 오랫동안 작업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꿈이자 목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