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많은 이들이 미디어아트를 더 이상 난해하게 바라보지 않는 때가 온 것 같다. 어딜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프로젝션 매핑과 미디어 파사드를 비롯한 스크린 경험과 더불어 팬데믹 이후 강화된 가상 혹은 온라인 경험이 이러한 변화를 자연스레 끌어당겼다. 올해 키아프 서울이 선보이는 뉴미디어아트 특별전 <Gray Box Area: 사건으로서의 공간>의 설명 글에서는 미디어아트가 ‘우리 사회와 삶, 그리고 문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체감케 하는 문화 예술 활동이자 그 결과물’이라고 언급한다. 이번 전시는 공간 스크리닝이라는 표면적 형식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우리 곁에 닿는 ‘접촉과 중첩의 미디어아트’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듯하다. 한국 미술의 저변을 넓히고, 한국 현대미술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한 자리인 키아프 서울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깝게 다가온 미디어 아트를 직접 경험하고 사유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 것이다.
전시 제목의 ‘Gray Box’는 소프트웨어 테스트의 한 형태로, 시스템의 구조에 대한 부분적 지식을 가지고 테스트를 수행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그레이박스 테스트처럼, 관객이 기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이 품고 있는 의미와 그 세계를 자유롭게 발견하고 탐험하기를 바라는 의도를 담은 것이다.
한편, 미술사의 흐름에서 살펴보면 모더니즘 이후 전통적 미술관의 전시 공간인 ‘화이트 큐브(White Cube)’와 ‘블랙박스(Black-box)’를 거치며 융합된 형태인 ‘그레이박스(Graybox)’가 등장했다. 기술 발전과 매체의 확장에 따른 변화, 특히 1990년대 춤이나 연극을 비롯한 퍼포먼스 장르의 이입과 함께 대두한 공간이 바로 그레이박스다. 영국의 미술사가 겸 비평가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은 이러한 변화가 ‘관객과 즉각적으로 상호 소통하는 새로운 관람 방식을 연 네트워크 기술 그리고 스마트폰이 등장한 시기와 맞닿는다’고 이야기한다.
전시의 제목이 둘 중 어느 쪽에 가깝든, 우리는 이제 이 회색 지대에서 더 적극적이고 즉각적으로 본인의 관점을 세우며 작품에 개입하고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번 미디어아트 특별전에 함께한 10팀의 작가와 그 작품들을 살펴보자.
최성록
최성록 작가는 디지털 애니메이션과 비디오 작업을 통해 기술에 의해 발생하는 동시대의 풍경 그리고 서사를 탐색해왔다. 그가 이번 미디어아트 특별전에서 선보이는 ‘Genesis Canyon’은 창조 설화에 등장할 법한 장면으로 구성된다. 모든 감각이 시작되는 계곡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만들어진 빛, 바람, 용암, 물의 움직임이 어우러지며 장면이 완성된다. 가상에서의 사물 경험이 현실을 대체하는 과정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실제와가상이 혼합된 공간 경험을 선사한다.
이예승
이예승 작가는 드로잉, 설치, 인터랙티브 미디어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매체를 활용해 작품의 형식을 탐구해왔다. 기술 변혁기에 마주하는 각종 현상에 주목해 미래 시나리오, 특히 동양철학과 동양화의 관점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정중동·동중동(靜中動·動中動)’, ‘수평관찰’ 등의 대표작과 함께 ‘증강괴석도 2023’ 신작을 포함한 10여 편을 그레이 박스 바닥과 삼 면의 벽을 활용한 입체적 공간에 새롭게 선보인다. 영상 속 QR 코드를 찍으면 AR을 통해 작품과 상호소통할 수 있는 설정이 흥미롭다. 관객은 산책하듯 작품 속을 유영하고, 그 안의 상상의 풍경을 스스로 구성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이남
이이남 작가는 디지털의 빛을 매개로 한 현대사회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며 고전적 명화와 산수화 등에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주제의 움직임을 입히고, 한국적 해학이나 풍자를 더하며 우리 시대 상황의 여러 단면을 표현해왔다. 그가 소개하는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는 작가 본인의 유년 시절과 관한 자전적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관객들이 작품 세계를 탐험하는 여행 또는 각자의 기억을 비춰보는 여정을 떠날 수 있도록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