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당해의 시대상을 반영한 주제를 다루는 키아프 서울의 특별전이 올해 주목하는 화두는 ‘한국 미술의 외연 확장’이다. 단색화가 각광받고 있는 요즘, 한국 회화사의 시작점에 있는 전통 채색화의 역사를 재조명함으로써 한국화가 지닌 잠재적 역량을 다시금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키아프 서울은 수묵화를 중심으로 재편된 한국 화단에 새로운 채색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두 명의 거장 박생광과 박래현을 나란히 호명한다. 전시명 <그대로의 색깔 고향>은 박생광의 아호인 ‘그대로’와 박래현의 아호인 ‘비의 고향(雨鄕)’을 병치한 것으로, 그 사이에 놓인 ‘색깔’이라는 단어는 두 작가의 작품 세계를 묶어주는 중요한 키워드다. 해방 전후 비슷한 시기에 작품 활동을 이어온 두 작가는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미술계에 입문해 그곳에서 수학한 채색화 기법을 한국 전통 회화의 영역에서 새롭게 풀어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특별전은 지난 3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된 대규모 기획전 <위대한 만남: 그대로·우향>을 골자로 가나문화재단 소장품을 더해 두 작가의 주요 작품 40여 점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박생광의 전시에서는 ‘그대로 화풍’을 확립한 1980년대 무렵 작가의 말년 작업들이 불교, 무속, 십장생, 탈 등 소재별로 나누어 전시되며, 박래현의 전시에서는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작품의 변모 과정을 시대순으로 감상할 수 있다. 한국화의 기반 위에 형형한 색채를 수놓은 두 거장의 시도가 어떤 심상을 자아낼 것인지 작품으로 확인해보자.

 

박생광
Park Saeng Kwang

1904~1985

박생광, ‘무당12’, Ink & color on paper, 136×139cm, 1984

박생광, ‘토함산 해돋이’, 한지에 채색, 69×77cm, 1980년대

박생광 키아프 서울 Kiaf Seoul 특별전 미술 전시

박생광, ‘십이지신 소’, Ink & color on paper, 160.2×100cm, 1982

 

190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박생광은 일본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현 교토예술대학)에서 다케우치 세이호(Takeuchi Seihō)와 무라카미 가가쿠(Murakami Kagaku) 등을 사사해 채색 중심의 일본화를 배웠다. 광복 이후 귀국해 30년간 추상화 작업에 몰두하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본 화풍에서 벗어나 민화의 영역을 탐구하며 일명 ‘그대로 화풍’이라 불리는 자신만의 독자적 화풍을 구축한다. 이후 그는 진채(眞彩)를 활용해 십장생과 불교, 무속 등 우리나라 민속 소재를 강렬한 이미지로 재해석한 작품을 다수 선보인다. 대표적인 연작 ‘무당’과 ‘무속’에서는 오방색을 활용해 대비가 돋 보이는 채색화를 시도했으며, 수묵과 채색을 결합한 독창적인 기법으로 한국 화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84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미술관의 <르 살롱>전에 특별 초대 작가로 선정되었고 타계한 이듬해에는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한국 화단에서는 1986년 호암 갤러리가 개최한 1주기 회고전을 통해 그의 작품이 총체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박생광의 독자적인 화풍은 당시 한국 회화에서 다루지 않던 민속, 주술, 무속의 소재를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타계 직전의 순간까지 고구려 벽화와 불화 등에서 발견한 전통적 이미지에 착안해 완성한 말년작들로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는 평을 받는다. 대표적으로 ‘무당’은 굿판에서 신을 부르기 위해 춤을 추는 무속인의 모습을 담아낸 연작이다. 만년에 이르러 샤머니즘에 매료된 박생광은 해당 연작을 완성하기 위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김금화 만신(萬神)의 굿판을 찾아다니며 역동적인 율동과 강렬한 색감을 화폭에 옮겼다. ‘무당 12’(1984)에는 사찰의 단청에서 보이는 오방색의 적·황·녹·백·청색을 화면 가득히 여백 없이 채워 넣은 대담한 구성을 적용했다. 중앙에서 악귀를 짓밟고 있는 무당을 비롯해 그림의 사방에는 무당이 섬기는 대상인 ‘용궁부인’과
‘비천’이 자리 잡고 있다. 박생광은 ‘무당’ 연작을 두고 “샤머니즘의 색채, 이미지, 무당, 불교의 탱화, 절간의 단청, 이 모든 것들이 서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그야말로 ‘그대로’ 하나의 종교인 것 같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또한 학창 시절 한국 현대 불교의 거목 청담 대종사와 인연을 맺으면서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82년 인도의 불교 유적지와 힌두 사원을 순례하며 불화에 대한 영감을 얻은 그는 경주 토함산에 있는 불교 유적을 답사하며 수집한 스케치 도상들을 화폭에 옮겨 ‘토함산 해돋이’(1980년대)를 완성한다. 보현보살과 석굴암의 금강역사, 봉황과 호랑이 등 다양한 불교적 요소와 전통 민화의 상징물을 화면에 어지럽게 나열하면서도, 뒤편에서는 석굴암 본존불의 옆모습과 붉은 해에 초점을 맞춰 토함산의 해돋이가 주는 영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단청 안료와 아교, 먹을 배합해 만든 이 시기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불화적 기법을 창안했다는 평을 받는다.

 

박래현
Park Rae Hyun

1920~1976

박래현 키아프 서울 Kiaf Seoul 특별전 미술 전시

박래현, ‘기도’, Ink & color on paper, 211.5×243cm, 1959

박래현, ‘작품’, Ink & color on paper, 150.5×135.5cm, c.1963

박래현 키아프 서울 Kiaf Seoul 특별전 미술 전시

박래현, ‘작품’, 종이에 채색, 169.6×134.5cm, 1966-67

 

1940년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일본화를 전공한 박래현은 유학 당시 머물던 하숙집 주인의 딸을 화폭에 옮긴 ‘단장’(1943)으로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 총독상을, 1956년 한국전쟁 시기 군산 시장의 모습을 담은 ‘노점’(1956)으로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는 30여 년에 걸친 활동 기간 동안 수묵과 채색, 구상과 추상, 회화와 태피스트리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넘나들며 끊임없는 실험을 추구했다. 일상적인 소재를 주로 그리던 초기 구상 회화 작업을 시작으로 해방 이후에는 일본화 경향을 덜어내고 현대 한국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입체주의를 새롭게 탐구했다. 1969년에는 뉴욕 프랫 그래픽 아트센터(Pratt Graphic Art Center)에서 수학하며 판화와 태피스트리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후 중남미와 아메리칸 원 주민 유적, 프랑스, 인도, 태국 등을 여행하며 고대 문명과 세계 각지의 문화유산을 소재와 패턴에 응용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의 작품 세 계를 총망라한 대규모 개인전 <박래현, 삼중통역자>가 개최됐다.

박래현은 활동 기간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새로운 표현 기법과 매체를 시도하며 작품 경향을 시시각각 변모시켰다. 박래현의 화업 전반기의 조형적 특성을 잘 나타내는 작품 ‘기도’(1959)는 중앙에 위치한 성상을 둘러싸고 기도하는 여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 시기 군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며 접한 민중의 모습, 그중에서도 여성의 척박한 삶을 표현했다. 일본에서 배운 화려한 채색 대신 한지에 여러 번 색을 덧바르는 수간채색 기법을 활용해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번짐 효과를 냈다. 동양화의 재료를 활용해 당대 서양의 조형에서나 시도할 법한 입체적인 형태 해석과 면 분할을 시도한 실험성도 돋보인다.

대만, 홍콩, 일본을 여행하며 추상화의 물결을 확인한 작가는 196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추상화 제작에 몰두한다. ‘작품’(c.1963)은 작가가 본격적인 추상의 세계로 진입한 시기에 제작한 작품으로, 사실적인 묘사를 기초로 피사체를 분석하고 화면을 구획하던 기존의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추상적인 형태의 붉은색 색채 덩어리를 만들고 붓질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이밖에도 노란색, 파란색 등 강렬한 색채가 한지에 스미고 번져나가는 형상을 표현한 연작을 운보 김기창과 함께한 부부전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 시기에 제작한 ‘작품’ 연작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앵포르멜(informel) 화풍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이용해 색채와 형태의 미학을 탐구했다는 평을 받는다.

판화와 태피스트리를 새롭게 탐구하기 시작한 1970년대 작업들은 새로운 기술을 익혀 동양화의 표현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 박래현의 시도다. 그는 뉴욕에 체류하던 당시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하며 동판화 기법을 하나씩 익히면서 표현 방법을 확대해나갔다. 유학 기간 동안 제작한 새로운 태피스트리 및 판화 작품들은 1974년 개최한 귀국 판화전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손으로 뜨개질을 하던 초기 태피스트리 작업을 시작으로 이후에는 직조 틀을 이용해 1미터가 넘는 방형의 직조 물을 제작해 커튼 고리, 하수구 마개 등의 오브제를 결합하는 등 다양한 조형 실험을 시도했다. 한국 공예계에서 섬유예술 분야가 자리 잡기 전인 1960년대부터 박래현은 생활 미술에 대한 관심을 태피스트리의 영역에까지 확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선구자적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