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는 ‘헬조선’이라는 자조적 용어가 유행했다. 청년 실업 증가, 빈부 격차 심화, 비정규직 확대를 중심으로 한 노동시장의 불안 정성을 바라보던 젊은 세대가 국가에 내린 진단명이었다. 2015년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이런 사회 배경 안에서 탄생했다. 조국에서의 익숙한 불행보다 타국에서의 낯선 행복을 택하는 청춘의 이야기는 픽션이되 픽션만은 아니었다. 그사이 용어 자체의 유행은 희미해졌지만, 한국 사회의 현실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청춘은 어떤 선택을 내리고 있을 것인가.

<한국이 싫어서> 스틸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한국이 싫어서>가 동명 소설을 원작 삼아 2023년에 어떤 방식으로 변화된 말들을 건넬지 자못 궁금해지는 이유다. 주인공과 주요 플롯은 원작과 동일하다. 피로와 무력감만 안겨주는 일상을 견디던 사회 초년생 ‘계나’는 한국이 싫다. 오랜 연인 ‘지명’과의 관계도 행복을 보장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사회적 계층 차이가 뚜렷한 서로의 집안 배경도 계나에겐 스트레스다. 현재의 삶이 미래까지 순탄하게 이어질 답이 보이지 않는 순간, 계나는 전환점을 만들기 위해 뉴질랜드로 향한다. 그곳에서 새롭게 만난 유학원 동기 ‘재인’은 밝고 자유분방한 영혼이다.

<한국이 싫어서> 스틸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은 “현시대 한국 사회에 사는 젊은이들의 고민과 좌절뿐 아니라 희망을 찾는 모습까지 담은 작품”이라며 개막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 영화는 2000년대의 시대 공기, 청춘의 방황과 고민을 현실적으로 담아냈다.

연출을 맡은 장건재 감독은 2009년 <회오리 바람>으로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뒤 <잠 못 드는 밤> <한여름의 판타지아> 등을 연출하며 호평받은 실력파다. 김종관 감독과 공동 연출한 장편 <달이 지는 밤>, 최근작인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와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괴이>까지 꾸준하게 확장해 온 그의 작품 세계 정수를 이번 작품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예정이다.

 

<영화의 황제> 스틸

영화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으로 남아야 하는가. 팬데믹 이후 한층 더 위기론이 짙어진 산업 안에서 이 질문은 창작자들의 현실적 고뇌로 이어진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가장 진지하게 답을 고민해볼 때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폐막작 <영화의 황제> 는 여러모로 시의적절하게 찾아온 기획이다.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를 자처하는 이 작품은 부조리한 상황의 소동극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블랙코미디 세계를 구축해온 닝하오 감독의 신작이다. 그의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건 2006년 <크레이지 스톤> 이후 두 번째다.

홍콩 영화 스타 ‘라우 웨이치’는 배우로서의 위기를 겪고 있다. 홍콩필름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을 놓친 뒤, 그는 작품성을 우선으로 한 영화에 출연해 해외 영화제 수상을 노려보기로 한다. 기존 이미지를 모두 내려놓고 대륙의 평범한 촌부 역할을 맡아 열연을 결심하지만, 함께 작업하는 ‘린하오 감독’은 연기에 리얼리티가 없다며 맹렬히 비난한다. 제작비 부족, 감독과의 소통 오류 등 현장에서 각종 문제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라우 웨이치는 거대한 스캔들에 휘말릴 위기에 처한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이야기 안에서 영화는 산업을 둘러싼 외적 갈등뿐 아니라 창작자들의 내적 혼란까지 담아낸다. 모두가 인플루언서를 자처하는 시대의 스타덤, 서구 영화제와 아시아 창작자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 홍콩과 중국 영화 산업 간의 긴장, 산업 자체의 위기까지 작품 안에서 모두 풍자의 대상이 된다. 특히 시대 변화의 혼돈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스타 배우의 위기를 실제 현실의 스타인 유덕화가 연기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가 연기하는 라우 웨이치는 유덕화(Lau Tak-wah), 양조위 (Leung Chiu-wai), 주성치(Chow Sing-chi)의 이름을 합쳐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