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술 시장은 급격한 지각변동을 겪었다. MZ라 불리는 새로운 세대의 유입과 함께 온라인 시장의 확산, VR과 NFT 등 신기술에 힘입은 새로운 시작의 바람이 불었고, 2021년을 기점으로 우리는 미술 시장 규모의 확장과 더불어 질적 성장을 목도했다. 서울이 아시아의 차기 아트 허브로 홍콩의 위상을 넘보고 있다는 조심스러운 예측까지 나오면서 한국 미술 시장에 대한 기대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예술을 대하는 태도 자체에도 변화가 있었다. 먼저 투자적 측면의 접근이다. 예술 작품이 지닌 시장적 가치가 크게 부각되며 이우환, 김창열, 박서보, 우국원, 김선우를 비롯한 일부 작가의 작품 거래량과 거래가가 옥션에서 지난 2~3년 사이 큰 폭으로 상승했고, 신진 작가의 강세도 두드러졌다. 시장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작품을 구입할 때 소장 가치 또는 소위 말해 ‘앞으로 뜰 작가인지’ 여부에 큰 비중을 두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물론 최소 몇 백만원부터 억 단위에 이르는 작품을 구입하며 시장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이에 치중하다 보면 컬렉션의 참의미와 즐거움을 놓치게 된다.

이와 함께 나타난 또 하나의 두드러진 변화는 개인의 취향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예술을 대한다는 점이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SNS에 자신의 컬렉션을 공개하는 문화가 확산되며 나타난 현상으로,컬렉팅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고 타인과 소통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술 작품이 마치 취향과 부를 과시하기 위한, 장 보드리야르가 지적했듯 ‘자본주의 사회의 한 기호로서 소비’되는 일종의 ‘플렉스’ 문화 안에서 부상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예술을 이렇게만 활용한다면 이는 예술의 효용 중 극히 일부만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럼 본질로 돌아가보자. 예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감상하고, 더 나아가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사물에 이리도 마음을 빼앗기는가. 여기에서 예술의 효용과 가치를 다 논할 수는 없지만 예술에 대한 몇 가지 미학적 관점을 소개해보려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오직 예술만이 유일하게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삶으로 이끄는 위대한 유혹이고, 삶을 추동하는 위대한 활력소”라고 말했다. 예술이 단순한 심미적 차원을 넘어 삶을 고양시키며 한층 성장하게 한다는 것이다. 실존적 인간으로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과 고통을 발판 삼아 자기 극복으로 향하는 것은 예술의 ‘승화’ 개념과 닿아 있다. 대표작 ‘호박’으로 잘 알려진 현대미술의 거장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를 보자. 유년 시절의 가정불화와 학대로 인한 야요이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환영으로 나타나 그를 괴롭혔지만, 이로부터 그를 구원해준 건다름 아닌 예술이었다. 몇 차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고 정신 치료를 이어가면서도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그의 손끝에서는 탐스럽고 아름다운 호박과 무수한 점들이 피어났다. 이는 운명에 대한 한 인간의 저항이자 결코 놓지 않은 희망의 끈이요, 삶을 향한 의지였다. 몇 년 사이작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며 여성 아티스트 중 역대 경매가 1위라는 기록을 낳은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을 보며 이제는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리스트 중 하나라며 아쉬워하거나, 운 좋게 소장할 기회를 쟁취해 흐뭇해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삶과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시장가치로만 환산할 수 없는 예술의 위대한 힘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예술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 목적인 ‘창조성의 발휘’를 실현한다. 예술은 동시대가 정의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을 해체하고 초월하며 자신만의 새로운 조형 언어로 ‘미(美)’를 창조해내려는 시도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이란 아름다움이라 여겨지는 통념 혹은 사유의 도식에 반하며 ‘미적 규범과 개념의 확장’을 이룬다. 마르셀 뒤샹의 ‘샘’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평범한 남성용 소 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예술가의 선택이나 아이디어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전한 뒤샹의 이 레디메이드 작품은 예술에 대한 개념을 바꿔놓았다. 출품 당시에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전시장에서 철수되는 사태까지 빚어졌지만, 이후 ‘샘’은 현대미술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무수히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예술사는 체제 또는 관습에 대한 저항과 개척의 역사와 다름없다. 우리가 아는 많은 위대한 작품들은 격렬한 저항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족적을 남겼다. 현재 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도 당시에는 너무도 충격적이라 임산부는 관람을 금한다는 조롱 섞인 만평이 나오기도 했으며, 삶의 기쁨과 환희를 드러내는 앙리 마티스의 아름다운 작품들 역시 한때 야수처럼 포악하고 거칠다며 ‘야수주의’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렇듯 훌륭한 작품들은 세계를 새롭게 조직하고 창조하는 힘으로 작용하며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예술가만이 이러한 창조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관람객인 우리 역시 창조적인 미적 체험이 가능하다.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며 영적인 느낌, 숭고, 쾌와 불쾌의 감정, 내적인 은유, 개인의 기억, 역사 등 무한한 텍스트의 바다에 던져져 마음껏 상상하고 사유하고 유희한다. 또 온 감각과 지성을 동원해 내가 마주한 이 미지의 사물이 무엇인지 정의하려 한다. 자신만의 내적 규범으로 아름다움을 새롭게 정의하고 발견해내는 이 과정은 예술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에 버금간다. 예술을 진정성 있게 감상하는 동안 우리의 사고는 현실 밖의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내면화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현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나 스스로 판단의 주체가 되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바라볼 때 예술은 분명 투자 대상이나 집 안 어느 한 벽을 채우는 인테리어, 혹은 나의 취향을 드러내는 값비싼 사치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예술을 삶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여야 한다.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적 태도다. 이러한 태도로 삶을 마주할 때 삶은 곧 예술이 되고, 우리는 그 삶을 창조하는 예술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