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사랑해>
알랭 레네, 1968
서이제
소설가
소설집 『0%를 향하여』, 『낮은 해상도로부터』
등을 펴냈다. 영화과를 졸업했고, 2018년 중편소설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으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오래도록 기억하는 얼굴들이 있었다. 영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밝아지던 친구들의 얼굴, 결혼식에서 활짝 웃던 룸메이트의 얼굴, 뒤돌아 나를 보던 애인의 얼굴, 문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강아지 얼굴, 병상에 누워 작별 인사를 하던 아빠의 얼굴. 나는 그들의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떠올릴 수 있었지만, 말로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었다.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또는 ‘입이 찢어지게 크게 웃으며’와 같은 말로는 부족했다. ‘무표정에 슬픈 눈으로’ 또는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와 같은 말로도 부족했다. 그 어떤 수식을 이어 붙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표현하기 어려운 건 눈빛이었다. 도대체 얼굴과 눈빛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나는 영화와 문학의 차이를, 그러니까 이미지 언어와 문자 언어의 차이를 이해하고 싶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 말고, 체험함으로써 이해하게 되는 것이 있을까. 처음에는 내 영화를 소설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소설을 쓰며 가장 큰 어려움을 느낀 건 한 인간의 얼굴과 눈빛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이 세상 언어가 턱없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얼굴과 눈빛을 온전히 표현하고 싶은 나의 욕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소설을 쓰기 전에는 나는 내가 클로즈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다. 영화 속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는 것이 피로했기 때문이다. 늘 인물의 얼굴을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봐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올해 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알랭 레네의 <사랑해 사랑해>를 본 후에 나는 다시금 분명히 알게 되었다. 사실 그 누구 못지않게 클로즈업숏에 애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이 영화는 시간 여행 실험에 참여한 클로드 리치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시간 속을 헤매게 되는 이야기다. 그는 이미지가 만들어 낸 시간 속에서 시간성을 잃는다. 그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즉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시간이 아니라 뒤죽박죽 뒤섞인 시간 속을 헤맨다. 이때 그는 얼핏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사람처럼 보인다. 더불어 같은 이미지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반복되는 이미지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되돌려놓는다. ‘사랑해 사랑해’. 같은 말이 반복되는 영화의 제목처럼 말이다.
나는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했다. 도대체 어떻게 끝내려고 이렇게 계속 시간을 되돌려놓는 건가.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인데, 이렇게 ‘파편화되고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는 무엇을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이 영화의 시간성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을 헤매는 인물을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클로드 리치의 얼굴과 마주했다.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이었다. 클로즈업. 나는 그 장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분명 사랑을 잃고 괴로워하는 자의 얼굴이었다. 아, 얼굴이 절정이 되는 영화구나. 파편화된 시간 속에서 오직 클로드 리치의 눈물 한 방울이 절정이 되는 영화구나. 그 얼굴을 본 순간, 그 얼굴과 함께 살아갈 것을 직감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이 떠올랐다. 클로즈업을 아껴 사용하고 싶었다. 결정적인 순간, 영화 속에 딱 한 번 나와도 좋을 것 같았다. 그 얼굴들이 내게 너무도 소중했기 때문이다.
<애프터썬>
샬롯 웰스, 2023
이준오
음악 감독
일렉트로니카 밴드 캐스커의 프로듀서이자 DJ.
<불도저에 탄 소녀>, <리틀 포레스트>, <더 테러 라이브>
등의 영화에서 음악 감독을 맡았다.
스크린을 마주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순식간에 몰입해 끝까지 함께하게 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가끔 시계를 확인하고, 도중에 길을 잃어 내용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없게 되는 영화도 있다. 모두가 쇼트폼에 길들고 있는 요즘, 긴 상영 시간 동안 관객을 붙들어두는 이야기를 만난다는 건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가끔 이상한 영화가 등장한다. 불친절한 컷 편집, 기묘한 음악, 추상적인 이미지. 평단의 찬사와 영화제 수상 등 화려한 수식이 떠오르며 ‘이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거야?’ 하는 반감이 간간이 생기던 중, 어느 한 장면에 이르는 순간 얼어붙은 듯 전율하고 이전의 모든 이야기를 복기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 말이다. <애프터썬>은 나에게 그런 영화였다.
사춘기가 시작된 열한 살 딸 ‘소피’, 그와 함께 튀르키예 여행을 떠난 아버지 ‘캘럼’. 둘이 함께 떠난 여행과 그들이 담긴 캠코더 속 영상이 이 영화를 이루는 전부다. 마음 같지 않은 숙소, 그러나 낯설고 아름다운 여행지의 풍광. 호기심 넘치는 딸과 아버지의 모습을 담는 카메라. 순간순간 아버지에게서 알 수 없는 어두움과 고통이 읽히지만, 그들의 여행은 전체적으로 잔잔하고 평화롭다. 그러다 문제의 장면에 도달한다. 여행을 끝내고 공항에서 환하게 손을 흔드는 딸의 모습을 담던 아버지는 캠코더를 끄고 돌아선다. 이때 음악 감독 올리버 코츠(Oliver Coates)의 가슴 시린 첼로 선율이 들려온다. 영화 말미에 펼쳐진 이 한 장면 때문에 영화는 내 안에서 완전히 다시 시작되었다. 부녀가 나눈 사소한 대화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숨어 있었는지 복기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그 어떤 정보도 직접적으로 전달해주지 않았지만, 엔딩에 도달한 후 되짚어보면 캘럼에 대해 많은 것을 추측할 수 있게 된다. 깊숙한 우울감에 빠져 있던 캘럼은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면서 딸에게는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며 호신술을 가르친다. 그는 딸이 원하는 것을 맘껏 하게 해줄 경제적 여유도 없다. 딸은 하늘을 쳐다보고 미래를 그리지만, 그는 딸과 다른 온도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에게 하늘은더 이상 다다를 수 없는, 덧없는 이상처럼 느껴질 뿐이다. 네겐 시간이 충분하고 원하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어디서든 살 수 있다고 응원하지만, “열한 살 때 아빠는 무엇이 되고 싶었어?”라고 묻는 딸의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못한다. 이혼한 아내의 집으로 딸을 돌려보내고 혼자 남은 아버지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말과 눈빛은 어쩌면 길고 고독한 유언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상실과 불안을 안고 산다. 각자의 고통 속에서 세상은 어느 정도 붕괴됐다. 이 영화에 깊숙이 배어 있는 우울감이 지금 이 시대를 반영하고 있지 않을까. 자신이 짊어진 슬픔의 무게를 버티느라 상대에 대한 배려심을 잃어버린 지금, 이 영화는 슬프게도 우리와 닮아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 역시 적잖은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고, 우리는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재편될지 쉽게 예단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로 돌아와 현재의 소피는 어느덧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소피는 그때의 아버지를 기억하려 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어른이 되었고, 그것은 슬픔을 직면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는 뜻이다. 소피의 삶 역시 열한 살 때처럼 환하게 빛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버지와 소피의 여행이 어떠했는지 감상자들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는 것은 20년이 지난 캠코더 속에 담긴 어떤 기억의 파편일 뿐이니까. 어쩌면 이 영화에 담긴 것은 소피가 멋대로 만들어낸 기억과 상상일지도 모른다.
다시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볼까. 소피가 손을 흔드는 장면은 많은 여행객들이 북적대는 전형적인 공항 게이트 풍경을 뒤로하고 있지만, 캘럼을 담은 장면은 창백할 정도로 하얗다. 텅 빈 복도에 혼자 서 있을 뿐이다. 비현실감으로 가득한 장면 속에서 외롭게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소피가 보지 못한 것이다. 20년 전 사랑한다고 말하며 자신을 배웅했던 아버지가 자신이 떠난 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상상할 뿐이다. 서른한 살이 된 소피는 이제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