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킷 COS, 드레스 Eudon Choi, 부츠 Arket

2024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을 축하하며 대화를 시작하고 싶어요. 소설 <이응 이응>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다가갈 텐데 어떤 마음이 들어요?
어떻게 감상하실지 궁금하지만 걱정도 돼요. 쉽지 않은 소재를 다룬 이야기니까요. 소설이 틀에 갇히지 않은 채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커요. 소설 속 ‘이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게 진짜로 가능한 일인지, 결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 하나로 규정된 해석 안에서 굳어지지 않길 바라요.

소설에 등장하는 ‘이응’은 ‘매춘이나 원치 않는 임신, 온갖 질병의 위험에서 벗어나 청결하고 합법적인 공간에서 건강하게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가상의 장치예요. 동시에 타인 없이도 성욕을 해소할 수 있어 ‘성의 비인간화’를 우려하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주인공 ‘나’는 이응 앞에서 여러 상황을 마주하며 변화를 겪죠. 어떻게 이응이라는 소재를 구상했나요?
쉽게 말하자면 ‘이응’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가상 체험 공간 혹은 섹스를 위한 장치예요. 하지만 전 ‘섹스’를 대체할 새로운 말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늘 성에 관한 단어들이 나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느끼거든요. 세상에는 수많은 관계가 있지만 그걸 규정하는 틀은 너무 낡았고, 그 안에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어요. 새로운 언어를 만들면 경험과 이야기가 쌓일 테니 이응을 통해 가상의 세계를 그려봐야겠다 싶었죠.

이응은 억눌린 성욕으로 인한 고통을 해소해주는, 인지과학 발달이 선사하는 혜택이라고도 표현돼요. 기술의 발전과 섹슈얼리티 사이에서 무엇을 고민하며 소설을 썼나요?
요즘 선사시대를 연구한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인데도 인간의 생로병사나 감정, 본능에 관한 이야기는 비슷하더라고요. 성욕을 포함한 인간의 본능은 변치 않지만, 사회는 고도로 발전하는 기술을 따라가고 있어요. 그럼에도 성범죄는 계속해서 일어나고요. 이런 덜거덕거림을 느끼던 중, 기술을 활용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이미지 제공 : 문학동네

“만지거나 닿고 싶은 마음을 성적 쾌감과 완전 하게 분리할 수 있을까”라는 문장이 소설을 읽 은 이후 내내 마음속에 머물렀어요. <이응 이응> 속 이야기는 사랑과 반려 그리고 성적 쾌감 사이 에서 독자에게 꾸준히 물음을 던져요. 작품을 써 가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나요?
저도 그 문장에 의문을 품은 채 <이응 이응>을 써나갔어요. 소설을 완성해가며 결국 그 두 마음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고요. 사랑과 반려의 의미도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다고 봐요. 그래서 주인공이 모든 감각을 더욱 구체적으로 느끼길 바랐어요. 인물이 느끼는 감촉과 감정이 소설 안에 구체적으로 녹아 있길 바라며 주인공의 내면과 심리 상태에 집중했죠.

주인공은 포옹을 나누는 모임인 ‘위옹(WE+포옹)’에 가입하기도 해요. 무언가를 만지고 감각하는 일이 소설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스스로 포유류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웃음) 제 생각에 어류나 곤충과 구분되는 포유류의 가장 큰 특징은 만짐과 만져짐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저도 개나 고양이를 만지거나 누군가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만지거나 만져지는 것이 난 참 좋은데, 이게 왜 좋을까.(웃음) 이게 좋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런 걸 고민하며 소설을 썼죠.

소설에서 ‘나’는 할머니 그리고 강아지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요. 주인공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존재를 할머니와 강아지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주인공이 손으로 만지고 피부로 접촉할 수 있는 대상을 생각했어요. 친구나 애인일 수도 있지만 할머니의 주름진 손, 푸들의 복슬복슬한 털을 떠올리니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제가 그런 감촉을 많이 기억하고 있기도 하고요. 누군가 내 얼굴을 씻어줬을 때의 느낌, 강아지를 만질 때 느껴지는 체온 같은 것을요.

“할머니와 나는 그 나무를 잘생긴 나무라고 불렀다. 우리는 나뭇잎 모양이나 열매를 보며 나무의 진짜 이름을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름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을까. 어떤 이름이든 나무 스스로 지은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라는 문장이 소설의 도입부에 등장해요. 소설에 거듭 등장하는 ‘이름을 짓는 일’은 내가 아닌 다른 대상을 판단하고 명명하는 일의 불완전성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다만 우리가 어떤 대상을 판단하거나 이름 짓는 일을 아예 안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름을 불러야 그 존재와 관계를 맺고, 그와의 기억을 쌓을 수 있잖아요. 말 없이는 생각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언어가 필요하고 판단과 가치 기준이 있어야 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포섭되지 않는 희미하고 불완전한 영역이 있다고 봐요. 소설에 담긴 ‘섹스라는 말은 너무 낡아서 우리를 잘 표현하지 못한다’라는 말처럼요. 저는 소설 안에서 그 영역들과 같이 가고 싶어요. 일상에서는 확고한 명제들 안에 갇혀 있는 시간이 많지만, 소설 안에서는 명제 바깥의 세상을 그려낼 수 있거든요.

첫 소설집을 묶을 때 자신의 소설을 ‘알 수 없음을 조금이라도 설명해보려는 시도’라고 설명한 것과 비슷한 맥락인 듯해요.
맞아요. 새로운 언어가 많아질 때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질 거예요. 무언가를 바꾸고 싶으면 말부터 새로 정의하고 그걸 자꾸 써야 해요. 섹스 대신 이응이라는 말을 만들며 독자들이 자신만의 이응을 그려보길 바랐어요. 만약 이응이 존재한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성적 쾌감과 사랑, 반려 사이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랐죠.

기술이 발전해 우리가 더 이상 타인과 물리적으로 접촉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그때도 여전히 사랑이 유효할까요?
그때야말로 우리가 진짜 사랑을 찾을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해요.(웃음) 억지로 노동하지 않아도 되고 의무로 관계 맺지 않아도 될 때. 물질적인 이유나 필요에 의해 누군가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면 진실로 연결되고 싶은 존재를 찾을 테니까요. 인간, 세포, 원자의 존재 원리를 따라가다 보면 거기엔 결국 ‘연결’이 있다고 해요. 저는 그 연결의 방식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요. 세상이 어떤 여건에 처하건 인간에게 사랑과 연결은 부재할 수 없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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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응 이응>을 쓰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 소설은 결국 사랑을 확인하며 끝난다는 것이요.(웃음) 누군가 죽고 관계가 파탄 나더라도 결국엔 타인과 사랑을 한번 더 믿어보는 이야기여야 소설을 끝낼 수 있더라고요. 완전히 비극적으로 끝나는 소설을 쓰려고 한 적도 있지만 인물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건 결국 사랑뿐임을 알게 돼요. 결국 내가 내 목소리로 하고싶은 이야기는 사랑이라는 것. 사랑해, 고마워, 보고 싶어. 이런 말을 현실에서 꺼내기 어려워 소설 안에서 표현하고 있음을 깨달았어요.

이때 말하는 사랑에는 최소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음… 내려놓기요.(웃음) 내 주장을 내려두고 사랑하는 존재의 뜻을 채워주는 것. 놀랍게도 그게 나의 기쁨이 되잖아요. 그게 사랑의 선물 같은 면이지 않을까요?(웃음) 하지만 그건 관계 안에서 배우고 노력하고 또 훈련해야 하는 일이죠. 나를 내려놓는 훈련을 거듭하는 게 제가 말하는 사랑의 최소 조건이 아닐까 싶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결국 작가로서 소설을 쓰게 되는 동력은 무엇인가요?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보고 싶어요. 비록 소설 안에만 존재할지라도요. 내가 느낀 아름다움의 감각, 슬픔의 정서, 사랑의 순간을 소설 안에 녹여내고 싶어요. 그 안에도 미움이나 갈등이 있겠지만, 인물이 스스로 헤쳐나가 결국 타인과 사랑에 다시 한번 마음을 열게 되는 그 과정을 응시하고 만들고 싶어 소설을 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