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6명의 필진에게 삶의 코어가 무엇이냐 묻자,
이토록 다채로운 생이 우리 앞에 당도했다.
오늘을 살아내며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그 무언가에 관한 6개의 이야기.
제주도라는 방
정가영, 영화 감독
나는 스무 살까지 언니와 한방을 썼다. 예민한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그땐 그게 고통스러운지 자각하지도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만의 방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인생을 살며 경험한 무수한 일 중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단 하나의 가정(if)을 꼽는다면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유년 시절 내 방이 있었더라면’을 선정할 거다. 내 방이 있었더라면 내 내면세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따금 내 자아가 굉장히 단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곤 한다. 아마 영화감독인 나의 직업, 내가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저돌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서른다섯 살이 된 요즈음에는 나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다가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렇게 말캉말캉하고 우유부단한 순두부 혹은 푸딩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 연해. 너무 연약해.
만약 어린 시절부터 나만의 방이 있었더라면 내면의 고요함을 더 일찍 찾았을지 모른다. 그럼 난 어떤 어른으로 자랐을까? 아마 더 내성적인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고, 영화가 아닌 미술이나 소설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을 수도 있고. 사실 잘 모르겠다. 추측만 할 뿐. 과거를 바꿀 수는 없고, 그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이런 식으로 생각을 눙쳐 버린다. 다만 지금은 나만의 방이 있다. 그건 바로 제주도다. 나는 마음의 고요를 찾고 싶을 때, 뒤도 옆도 안 돌아보고 제주도로 향한다. 여행 앱으로 티켓을 예매하고, 간소하게 짐을 싸고, 운동화를 신고 바로 나간다. 집을 나선 후 3시간 안에 제주에 도착한다. 공항에서부터 반겨주는 야자수와 돌하르방 그리고 제주의 공기. 내 방 안으로 들어온 기분이다. 성산 쪽으로 갈지 애월 쪽으로 갈지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정한다. 지금까지 가본 곳 중에선 한림이 가장 내 스타일이다. 조용하고 한적하다. 사람은 없지만 학교나 병원은 다 있다. 문명과 동떨어져 있지는 않으면서 사람은 없는 곳. 한림에 처음 갔을 때, 유럽에 처음 갔던 순간만큼 어떤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얼마 전엔 종달리에 갔었다. 지인이 추천한 식당에 가보고 싶었다. 식당은 휴무였지만 종달리의 풍경과 하늘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름도 예쁜 종달리. 제주에 산다면 기분이 어떨까. 한 달 살이…나는 버틸 수 있을까.
운전을 하고 싶다. 아직 면허가 없는데 운전을 하게 되면 제주를 좀 더 마음껏 누빌 수 있겠지. 그러고 보니 아직 한라산에도 안 가봤네. 한라산 정상에서 컵라면 정도는 먹어줘야 제주 좀 다녀봤다고 허세 좀 부릴 텐데. 아직 멀었다.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가영이가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내 방엔 돌하르방도 있고 바다도 있고 맥주도 있다. 나는 그곳에서 운전도 하고, 풍경도 실컷본다. 친구들은 생각하겠지. ‘가영이…역시 좀 특이해…’ 다시 돌아간다면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럼에도 떨쳐낼 수 없기에 어쩌면 오늘도 미련 없이 제주로떠나는지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제주에 고마워하는 것. 고마워 제주, 나의 고요한 방이 되어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