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6명의 필진에게 삶의 코어가 무엇이냐 묻자,
이토록 다채로운 생이 우리 앞에 당도했다.
오늘을 살아내며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그 무언가에 관한 6개의 이야기.
꿈의 인력
김선오, 시인
올해 초 진행한 인터뷰가 ‘나는 사치스럽게 잔다’라는 제목으로 발행된 적 있다. 나에게 잠은 무척 중요하다. 잠의 방식으로서의 꿈 역시 내가 살아가는 하나의 세계라고 여긴다. 현실이 연속적 세계라면 꿈은 비연속적 세계로서 현실의 연속성을 기반으로 재상영된다. 꿈은 너무 많은 현실이 중첩되어 있는 공간이기에 오히려 현실이 내가 꾸는 꿈의 한 층위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일곱 살 무렵 꿈을 꿨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평원 위에 벽돌로 지은 작은 방이 있었다. 방은 그 안에 서 있으면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작았다. 팔을 들거나 몸을 돌리면 벽에 살이 쓸렸다. 벽은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쌓여 있었는데 천장이 뚫려 있었기 때문에 그 공간을 방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 지상에 지어진 우물 같기도 하고 기둥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속에 갇혀 있었고 눈앞에는 벽돌이 하나 빠져 있었다. 빈 곳을 통해 눈 내리는 평원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꿈은 시작된다. 나는 분명 기둥 속에 갇혀 밖을 보고 있는데, 꿈의 시선은 밖을 보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개의 시선이 겹쳐 꿈을 이루는 셈이었다. 평원에는 거대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고, 나는 기둥 속에서 안전함을 느끼면서 또 한없이 외로운 채로 몰아치는 눈보라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고, 또 이곳을 나갈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도 없이, 벽돌 크기만큼의 네모난 시야에 의지해 평원을 쳐다보는 일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밖을 내다보는 시선과 갇힌 나를 내려다보는 꿈 밖의 시선이 뒤섞였고 그 두 장면은 평행하게 나열되었다가 번갈아 상영되었다가 아예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혼재되기도 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꿈의 내용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후로 꽤 오랜 시간 동안 같은 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꾸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며칠에 한 번씩, 열 살 즈음에는 몇 달에 한 번 간격으로, 청소년기에는 1년에 두어 번 같은 꿈을 꾸다가 최근 몇 년간은 한 번도 꾼 적이 없고, 아마 다시는 내 꿈에 찾아 오지 않을 장면이라는 예감이 들지만, 이 꿈은 내가 가장 자주 회상하는 나의 과거 중 하나다. 나는 기억 속에서 자주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나를 끌어 당기는 꿈의 인력은 나의 현실을 다르게 재구성할 동력으로 전환된다. 그것이 내가 꿈을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