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삶이 결국 내 작업을 결정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삶을 가치 있게 살아내고자 했어요. 그만큼 예술이 내게 중요했고, 예술이 중요한 만큼 삶을 견디고 지키려 했어요.” 지난 40여 년간 치열하게 자문하고 자답했던, 김수자라는 이름의 질문과 답.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몸과 마음을 감싸 안아주는 듯한 경험을 한 적 있는가. 차분히 맞춰지는 눈, 낮은 목소리, 등을 쓰다듬는 손… 김수자 작가와 마주 앉으면 소란하던 사위가 고요해진다. 일찍이 ‘보따리’ 연작을 통해 싸는 행위, 감싸고 아우르는 ‘포용’을 작업의 근간으로 삼아온 김수자 작가는 자신이 창조하고 행해온 작품처럼 드넓은 품과 태도로 눈 앞의 이를 어루만진다. 2년 전 서울에서 처음 만난 그를 지난 4월 파리에서 다시 만났다. 현대미술의 가장 뜨거운 현재라고 불리는 부르스 데 코메르스-피노 컬렉션(Bourse de Commerce-Pinault Collection)으로 부터 카르트 블랑슈(Carte blanche, 기획부터 실현까지 전시 전권을 아티스트에게 일임하는 것)를 부여받으며 참여한 전시 <흐르는 대로의 세상(Le monde comme il va)>이 열리는 때였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부르스 데 코메르스의 가장 상징적 공간인 지름 29m, 높이 9m의 원형 홀 ‘로통드(Rotonde)’ 바닥에 4백18개의 거울을 설치해 ‘호흡 – 별자리(To Breathe – Constellation)’를 완성했다. 거울을 이용해 반원형의 천장 돔을 바닥에 반사시켜 완전한 ‘구(球)’를 빚어냈다. 동그란 건축적 보따리, 달항아리 안에서 관람객은 저마다 천장과 발아래를 수차례 번갈아 보고, 산책하듯 걷기도 하고, 드러누워 하늘을 보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이 신비에 몸을 맡겼다. 그 외 로통드를 아우르는 24개의 쇼케이스에는 40여 년간 김수자 작가가 축적한 작업의 역사가 선별돼 있었다. 수십 년간 작가가 사용해 몸의 움직임이 그대로 기록된 요가 매트, 밤하늘의 별을 보고 바느질을 떠올린 사진 작업, 굽는 과정에서 갈라지고 뒤틀린 모습을 그대로 품은 달항아리 등 성찰과 수행, 존재와 관계, 이해와 포용, 나눔과 공존에 골몰해온 사유의 흔적들이었다. 전시장 지하에서는 ‘바늘 여인’, ‘실의 궤적’ 등 세계의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며 기록한 영상 작업을 상영했다. 그야말로 김수자 작가의 결정적 순간들을 망라한 전시였다.


촬영을 마치고 인터뷰를 위해 그가 오랜 시간 머물고 있는 레지던시로 자리를 옮겼다.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단출한 침대, 책상과 의자 하나, 작은 조리대가 전부인 8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생활을 위한 물건은 최소한으로 청빈하게 자리해 있었다. 방금 머물던 부르스 데 코메르스의 화려함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 작은 방이 작가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예술가가 생에 걸쳐 차분하고도 고집스럽게 쌓아온 철학의 가장 깊은 곳을 목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전에 만났을 때 “예술가가 아니었다면 종교인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와 무릎이 닿을 거리에 마주 앉아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기 위해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떠올렸다. 좁은 방에서 시작한 대화는 무한히 드넓은 곳으로 뻗어나갔다.

도전의 순간에 더 예술적 충동이 일어나죠. 행복할 때, 좋은 기운으로 작업할 수도 있지만 작가로서 결정적인 순간은 도전과 역경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흥미로워요.

레지던시가 검박해서 놀랐습니다. 마치 종교인의 거처 같달까요. 좀 전까지 부르스 데코메르스에 머물다 와서 그런지 공간의 낙차가 더 드라마틱하게 다가옵니다. 이 작은 방이 김수자 작가의 많은 것을 설명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 과거에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이에요. 파리에 머물 때는 늘 이곳에서 지냅니다. 필요한 물건들만 최소한으로 뒀는데 불편하지 않아요. 일상을 살아가는 데 많은 게 필요하지 않은 편이에요.



두 달 뒤면 2024 파리 올림픽이 열리죠. 파리를 찾는 세계인이 광활한 거울 정원 ‘호흡 – 별자리’를 거닐게 될 텐데요. 40년 전, 에콜 드 보자르가 주관하는 프랑스 국비 장학생으로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기대에 얼마나 가까워진 건가요?

오늘 같은 날을 기대하거나 상상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프랑스 미술계가 제 작업에 대해 꾸준히 관심과 지지를 보내준 덕분에 작가로서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올 수 있었어요. 그 도움의 시간들을 지나며 지금에 온 것인데… 글쎄요. 흥미로운 건 있어요. 줄리 머레투(Julie Mehretu)와 뉴욕 할렘 갤러리에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었거든요. 이후 그는 상업적으로 승승장구했고, 지금 베니스 팔라초 그라시-피노 컬렉션(Palazzo Grassi-Pinault Collection)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잖아요. 같은 시기에 저는 파리에 있고요. 지금까지 비상업적 공간에서의 전시나 비엔날레, 인스티튜션을 주로 떠돌며 작업 해왔는데, 오늘날 세계 미술 시장을 좌지우지한다 할 피노 컬렉션에서 전시를 하는 이 상황이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로워요. 피노 컬렉션이 품는 작품의 폭이 상당히 넓다는 걸 새삼 느끼고요. 다양한 작업을 아우르는 포용성과 열린 안목을 지닌 분이죠.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에 몸을 싣고 세계 곳곳을 찾아다니며 난민, 이주, 전쟁, 테러 등 동시대의 폭력 앞에 두 발로 선 시간도 깁니다. 그런 역사 때문인지 이번 전시는 주류 미술 시장에 최적화된 작가가 아님에도 자기 세계를 구축하다 보면 어느 순간 중심에 선다는 메시지로도 다가옵니다. 그래서 더 고무적이고요.

저 역시 이 전시를 통해 젊은 작가들에게도 희망의 여지가 전해졌으면 해요. 많은 작가들이 상업적으로 자신을 알리기 위해 초조해하고 번민하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어요. 어떻게 보면 저는 상업화의 반대 방향으로만 걸어왔잖아요.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주고 싶고요.

미술계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청년들에게도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삶의 가치라는 것은 특정한 물질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물론 그 역시 손쉽다고 할 수도 없지만.

돌이켜보면 김수자 작가의 보폭이나 걸음의 방향은 늘 같았습니다. 재료와 방법을 실험하며 방대한 작업을 해나가면서도 전시의 규모나 명성에 치우치지 않고, 필요한 자리에 섰습니다. 필연적으로 주류 미술계의 반응이나 화답이 있지 않은 순간도 있었을 텐데요. 외롭진 않으셨나요?

세간의 관심보다는 전시마다 내게 주어진 질문에 적절하게 답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라 생각해왔어요. 장소나 시간, 주제와 방법 등에 대해 최대치의 사색 끝에 던지는 한마디의 답을 세상에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어요. 그 외적인 것들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함께 작업해온 큐레이터들에게 감사해요. 작가는 비엔날레를 통해 동시대의 가장 첨예한 질문과 주제를 건네받게 되는데 이를 고민하며 저 역시 발전해왔죠. 장소 특정적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특정 장소에서 할 수 있는 접근 방법이나 최선의 솔루션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 과정을 거치며 나아갈 수 있었어요. 찾아가고 알아가는 와중에도 마음 안에 분명한 건 있었어요. 작업 과정의 노력들이 어느 순간 종합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죠.

과정 중임을 인식하는 것이 긴 호흡을 갖게 한 것이죠?

그렇죠. 저는 결과를 빨리 보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절대로.

전시를 앞두고 미술관으로부터 작가에게 전시의 기획부터 실현까지 전권을 부여하는 카르트 블랑슈를 제안받았습니다. 흔치 않은 특권입니다. 이 기회를 허투루 쓰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무엇을, 어떻게 펼치고자 했나요?

작가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건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의미잖아요. 영광스러운 동시에 책임이 따르는 일이고요. 전시의 중심이 되는 로통드관은 거울을 이용해 건축적 보따리로 풀어내고자 했습니다. 바닥에 설치한 거울이 돔을 비추며 발아래 시각적인 돔을 만드는 거죠. 관람객을 천상과 천하, 그 중간 세계 어딘가에 놓고자 했어요. ‘nowhere’인 것이죠. 어디도 아닌 곳. 지상인지 지하인지 모를 곳을 그저 부유하는, 중력이 사라진 공간처럼도 느껴지도록요. 그리고 로통드 관을 24개의 쇼케이스로 둘러싸, 지금까지 보따리를 배회하며 던졌던 질문들의 흔적을 선별해 전시했습니다. 로통드가 몸통이라면 쇼케이스는 손과 발의 형상인 거죠. 24개의 쇼케이스를 통해 제가 지금까지 다양한 매체와 방법론을 통해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달리 해석하고 시도해왔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여 년 전부터 거울을 도구로 다른 차원을 열어왔습니다. 시작은 1999년 제48회 베니스 비엔날레였죠. 당시를 기억하시나요?

‘망명의 보따리 트럭(d’APERTutto or Bottari Truck in Exile)’이라는 작품이었어요. 보따리를 실은 2.5톤 트럭 전면에 거울을 설치했는데 이는 당시 코소보 전쟁(1999년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의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과 세르비아 정부군 간에 벌어진 전쟁) 난민들에게 헌정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트럭 앞에 놓인 거울을 하나의 출구로 제시하고자 했어요. 반사 효과를 통해 거울 뒤로 보이는 모든 공간을 감싸는 의미로 트럭이 한 번 더 싸이고, 다시 싸이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게 시작이었어요.

이후 거울을 사용해 공간의 무한성, 접힘과 열림, 채움과 비움 등을 꾸준히 탐구해왔습니다. 보따리로 시작된 ‘구’의 형태는 작가에게 중요한 개념이자 키워드이고요.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의 주요 개념들이 단 한 작품 안에서 집대성 됐습니다. 어떤 경로로 개념들이 모이게 되었나요?

지금까지 거울을 통해 공간을 반사함으로써 하나의 정체성을, 총체성을 갖는 공간을 선보이고자 했습니다. 특히 이번 공간은 돔이라는 명확하고 명쾌한 형태를 지니고 있기에 구를 만들고자 하는 바람이 자연스럽게 일었죠. 구 형태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느낀 건 ‘연역적 오브제 보따리(Detective Object-Bottari)’라는 제목으로 달항아리를 보따리로 개념화한 세라믹, 테라코타 작업을 했었는데 이번 작업을 하면서 돔 아래 거울을 놓는 것이 마치 달항아리를 만들 때 두 개의 반원을 뒤집어 엎는 작업과의 동일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한데 이를 사전에 계산하고 작업한 건 아니었거든요. 계속해서 질문을 품으며 작업하다 보니 다르다고 여겼던 두 작업이 만나게 된 거죠.


개념적으로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행함으로써 알게 되는 사실이 있는 거죠?

제 작업 대부분이 그래요. 바느질, 감싸기 컨셉트나 그것이 다시 보따리가 돼 삼차원적 바느질로 재해석되는 것, 바늘과 몸의 관계 등 사전에 철저히 개념화해 시작한 작업이 아니에요. 직관적인 논리의 감각이라 해야 할까요. 직관과 예술적 충동으로 실행한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저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규율이 이미 존재했던 거죠. 행함으로써 나를 발견해왔어요. 지나고 나서 규율들이 보이고 한데 꿰어지는 거죠. 이 작업을 왜 시작했고,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를요. 어떻게 보면 자연의 이치를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관람객들입니다. 10명 남짓한 어린이 관람객들은 손을 잡고 둥글게 서서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기도 하고, 어떤 관객은 편안히 누워 있더군요. 공원의 한 풍경처럼 느껴졌어요. 각자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을 품는 포용성도 느껴지는 작업입니다.

‘크리스털 팔라스’ 작업을 할 때 부터 관객을 제 작업의 퍼포머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공식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저 혼자서 그분들을 ‘비밀스러운 퍼포머’라 상정한 거죠. 그래서 이번 전시 역시 즐기는 마음으로 관람객들을 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동작 하나하나를, 어떤 만남과 어긋남 같은 것들, 혹은 나르시시스트적인 반응들을요. 그리고 위로만 보던 천장을 발아래로 골똘히 보다 보면 ‘여기가 어디지?’, ‘내가 이렇게도 보일 수 있네?’ 하는 질문들이 만들어지기도 하잖아요. 그 모습들을 보며 저에게도 새로운 질문이 생겼어요. 천상과 천하의 세계, 그 중간 지점은 절단면이기도, 연결선이기도, 공간이기도 하고 허(虛)이기도 하잖아요.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를 하나씩 해부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전개가 만들어질 수 있겠다는 기대도 있어요.

소재도 방법도 다른 와중에 작가의 작품은 공통된 개념을 예리하게 통과합니다. 작가의 작품을 두고 ‘영적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고요.

나를 둘러싼 우주의 진동과 흐름, 빛과 어둠 등 자연의 현상을 감지하고 반응하고 흡수하는 모든 과정이 어떤 계시처럼 다가옴을 느끼는 순간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런 순간들을 어떻게 만났는가 하면, 글쎄요. 그냥 오는 것 같아요. 직관과 예술적 충동으로 길을 찾아가다 보면 모든 것이 하나로 만나는 접점이 있어요. 그렇게 길을 찾아가는 과정에도 분명한 목표는 있어요. 삶과 예술의 토털리티(totality)에 도달하고 싶다’고 수십 년 전부터 이야기했어요. 그 총체성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삶과 예술을 이분화 하지 않았던 것이죠. 삶의 일관됨이 작업의 일관됨과도 연결됨을 느끼십니까?

느끼죠. 내가 사는 삶이 결국 내 작업을 결정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삶을 가치 있게 살아내고자 했어요. 그만큼 예술이 내게 중요했고, 예술이 중요한 만큼 삶을 견디고 지키려 했어요.

그래서일까요. 김수자 작가의 작업에는 예술과 인간,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태도가 진실되게 담겨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2백50장의 한지를 수평과 수직을 맞춰 쌓아 올린 작품 ‘Meta Painting’은 시간이라는 비물질을 생생하게 우리 눈앞에 보여주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가 홀대받는 지금, 작가의 작업이 더 깊게 다가옵니다.

‘Meta Painting’에는 수많은 시간의 축적이 보이잖아요. 그 가운데 노동이 보이고요. 우리가 보는 것 이상의 것을 보는 거예요. 이런 작업들을 해오는 저 또한 행하는 과정에서 보는 것 이상을 봅니다. 이제 뭔가가 좀 보이는 것 같다 싶어요. 나아가 나의 어떤 생각에 대해 그게 틀린 생각만은 아닐 거라는 확신도 생기고요.

예술가로 살아온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보인다는 말씀이시죠?

하나씩 교감하고, 스스로를 검증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들이죠. 한데 이것이 명징하게 인과적으로 해석되거나 직선적으로 인식된다기보다는 굉장히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와요. 내가 어디에서 어떤 질문을 하고 답을 해도 이제는 내가 표현하고자 한 것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자유로워요. 어떤 재료든, 어느 장소에서든, 무엇을 하더라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지금 들어요. 겁이 좀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조심스러웠던 부분도 있는데 지금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될 것 같아요. 물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지만.(웃음) 그런 때가 온 것 같아요.

난민, 이주, 전쟁, 테러 등 시대적 폭력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이는 곧 작업으로 이어졌습니다. 20세기를 치열하게 건너온 작가님에게 여쭙고 싶어요. 세계가 나아지고 있다고 믿나요?

삶의 향유 면에서는 발전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성 자체의 휴머니티는 퇴보하고 있죠. 이 세상에는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치유를 위한 창조를 하는 이들이 존재하는가 하면 공존을 방해하는 파괴적인 부류의 사람들도 반드시 있죠. 인간의 이중성만큼이나 사회 역시 양분돼 있어요. 이는 인류가 지닌 불치의 병이 아닐까 싶다가도 그럼에도 노력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봅니다. 얼마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라는 프로젝트에 긴 고민 끝에 참여했어요. 나를 결단하게 한 건 ‘부끄러운 역사가 없는 국가는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인류에 반하는 행위를 했죠. 그 프로젝트는 예술과 문화를 통해 과오를 개선하고 치유해 나가려는 노력을 아주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사례라 여겼어요. 내 쪽에서 레드 라인을 그으며 그들의 노력을 꺾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보다는 한 발 힘을 주는 것이 더 옳은 태도겠죠. 완벽한 평화와 공존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우린 무엇을 갖고 있고,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사랑만큼 중요한 가치가 또 있을까요. 사랑이 어떻게 발아되는지는 모르겠어요. 실을 엮듯 사랑이라는 감각과 느낌, 이성적 사고나 판단력, 그로 인한 행위 등 수많은 망들이 마치 인다라망(因陀羅網, 불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온 세상을 덮고 있는 거대한 그물로 각 그물코마다 구슬이 달려 있어 서로 연결되고, 동시에 서로를 비춘다)처럼 섬세히 조합되고 빛을 만들며 신비한 세계를 이루는 것 같아요. 그게 사랑의 본질 같아요. 왜 우리는 ‘사랑’ 하면 하나의 사랑이 가슴으로 턱 하고 뭉뚱그려져 전체로서 다가오잖아요. 하지만 사랑 그 자체는 굉장히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미세한 과정을 통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 같아요.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그래서 기적이에요. 분석 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마음의 상태이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최상의 마음 상태 아닐까요.

마무리할까요. 김수자 작가 하면 뒷모습으로 기억됩니다. 세계의 그늘을 찾아 정면으로 직시하던 모습을요. 지금은 어디를 바라보고, 향하고 있나요?
점점 죽음의 실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나아가 내 몸과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고요. 내가 모르는 미래 속으로 어느 순간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요. 죽음으로 인한 변화는 또 다른 형태의 삶이겠죠. 또 다른 형태의 빛과 그림자인 거예요. 그 빛과 그림자를 내가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고 풀어내야 하는지가 지금의 가장 큰 과제입니다.

무수히 많은 경계를 바느질하고 이어왔는데, 삶과 죽음을 잇는 작업을 생각하고 계시군요.
맞아요. 날숨과 들숨을 반복하다 그것이 멎는 순간 끝나는 거잖아요. 끊임없이 바느질을 이어가다 멈추는 것. 인터뷰의 마무리가 너무 새드한가?(웃음) 한데 정말 의미 있는 작업을 남길 수 있다면 죽음은 두렵지 않아요. 앎에 대한 열망이 유난히 커서 그럴까. 작업은 곧 앎의 표현이잖아요. 더 정확히는 앎과 모름의 표현이죠. 이 앎이라는 게 지식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가, 자기의 시각에서 해석하는가인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삶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표현하는가인데 이를 미술이라는 매체를 빌려 이야기하는 것이죠.

지금껏 앎의 과정에서 무수한 도전들이 있었음에도 이를 놓지 않은 이유이지요?

되레 그럴수록 더 강해져요. 도전의 순간에 더 예술적 충동이 일어나죠. 행복할 때, 좋은 기운으로 작업할 수도 있지만 작가로서 결정적인 순간은 도전과 역경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어요. 그래서 흥미로워요. 도전과 그로 인한 예술적 충동 속에 드러나는 우주의 진실, 트루스(truth)를 목격하는 것이 흥미롭고, 자꾸만 빠져들어가는 것 같아요. 모르면서 하고, 모르면서 또 하면서.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