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신 작가는 오늘도 전기톱의 스위치를 켠다.

오버사이즈 재킷과 선글라스 모두 가격 미정 Balencia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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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그간 김윤신 작가를 몰랐을까?” 지난해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더하고 나누며, 하나>를 본 미술계 인사들과 관계자들은 크게 감탄했다. 물론 그녀가 남미에서 40여 년간 활동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한국에서 작은 전시를 여러 번 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없었는데, 미술관 전시에서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 한국에서의 첫 회고전이던 이 전시는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 <이방인은 어디에나 있다>에도 초대받는 연결 고리가 되었다. 그 결과 한국과 미국의 대표 화랑인 국제갤러리, 리먼 머핀 갤러리와 전속 계약 체결에까지 이르렀다. 그녀는 열렬한 박수에 화답하고자 한국에 인생의 마지막 작품들을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이삿짐을 쌌고, 요즘은 대전 이응노미술관 개인전 <아르헨티나에서 온 편지>, 아르코미술관 단체 전시 <집>에 참여하고 있다. 내년에 구순과 화업 70주년을 맞이하는 김윤신 작가를 파주 작업실에서 만났다.

근황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드디어 아르헨티나에서 이삿짐이 모두 도착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사 준비 과정이 힘들었습니다. 처음 정리해보는 40년 시간의 짐과 작품들로 컨테이너가 여러 개였지요. 특히 아르헨티나는 작품의 해외 반출이 힘든 나라이기에 마음고생도 했습니다. 지난 2023년 10월 중순 아르헨티나에 도착해 짐을 싸기 시작해 2024년 2월 중순에야 서울로 향했어요. 40년 동안 머물던 곳이기에 아쉽지만, 딴 나라가 아니라 내 나라로 가는 거니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내가 멈춰서 사는 곳이 내 나라라고 생각하며 그곳에서 살았지만, 이제 앞으로 이곳에 못 사는구나 생각하니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고요. 내가 추위를 싫어하니까 겨울에는 한국과 계절이 반대인 여기에 와서 작업하면 되겠다는 마음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지의 김윤신미술관은 정리했고, 살던 집은 언제든지 다시 가서 쉴 수 있게 비워놓았습니다. 김윤신미술관에 대한 애정이 컸는데 아쉬운 것은 둘째치고 정신이 없었어요. 요즘 파주에 작업실을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안정이 되지 않았어요. 아직도 작업실을 정리하는 중이고, 전시 준비를 해야 하니 수장고에 일단 풀어놓았다가 다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작업실은 유리 건물을 레노베이션해서 그림 그리는 곳과 조각하는 곳으로 나누었어요.

오늘은 회화 조각을 작업하고 계시네요. 회화 조각 작업이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다니 반갑습니다.

요즘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 대전 이응노미술관, 서울 아르코미술관 단체 전시에도 작품이 나가 있어서 작업실이 텅 빈 것 같아요. 그래서 빨리 작업을 더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촬영팀을 기다리면서도 시간이 아까워서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코로나19 때 작업실에 갇혀 있으면서 새로운 나무를 구하기 힘들어서 나뭇조각에 색칠하는 회화 조각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한국 나무는 보존이 어려워서 얼마 전부터 이를 브론즈 작업으로도 만들고 있어요. 브론즈는 에디션이 있지만, 난 브론즈 조각에도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사실상 모두 각각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니크 피스입니다. 형태는 하나이지만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다르지요. 색깔이 작품마다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 재미있어서 하고 싶은 대로 신나게 작업하는 중입니다. 브론즈는 나무와 달리 표면이 건조하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곤 해야 합니다. 이런 회화 조각은 젊을 때에도 작업하긴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밖에 자유롭게 나갈 수 없어서 집을 짓다 남은 나뭇조각을 주워다가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어요.

이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김윤신미술관이 없어졌다니 저도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15년간 경영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김윤신미술관은 없지만 주한 아르헨티나 한국문화원에 2018년에 만든 김윤신특별관이 남아 있습니다. 좋은 작품들을 기증해서 상설 전시가 항상 열리고 있으니 혹시 아르헨티나에 가게 되면 들러주세요. 아르헨티나 문화계에서는 내가 한국에서 와서 열심히 작업하는 작가이며 미술관도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에 초대 받았다는 것이 발표되면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어요. 하지만 엠바고로 인해서 내가 아르헨티나를 떠나는 날에야 발표가 난 바람에, 인터뷰를 할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내가 없더라도 기사를 크게 내주고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마웠습니다.
매년 11월, ‘미술관의 밤’이라는 행사가 열리는 데 우리 김윤신미술관에서 이때 가장 특별한 작품들을 선보였어요. 그때마다 사물놀이를 우리 미술관에서 했고, 하루 8백~9백 명이 미술관에 왔어요. 새벽 6시까지 밤새 모든 미술관이 열리고, 시내버스도 무료로 탑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힘들어서 새벽 서너 시면 문을 닫곤 했지만요.(웃음) 힘들지만 재밌었던 추억입니다.

2023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더하고 나누며, 하나(Towards Oneness)>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이 전시로 인해 베니스 비엔날레 초대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몇 해 전 한원미술관과 흰물결갤러리에서 전시를 가졌어요. 그러면서 인사를 나눈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전 관장이 미술관에 작품 기증을 해줄 수 있는지 물어봐서 인연을 맺게 되었어요. 조만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전시를 하자고 제안해주셨는데, 그때만 해도 아르헨티나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라서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제자들과 같이 전시를 보러 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전시관도 공간이 좋았기에, 최대한 빨리 남서울관에서 전시를 하면 어떨지 제안을 드렸지요. 마침 남서울관에 권진규 상설 전시관이 생길 예정이라서, 부랴부랴 그 전에 날짜를 잡아서 전관에서 전시를 하게 된 것이지요. 다행히 이전에 여러 갤러리에서 전시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전시할 작품들이 한국에 많이 남아 있었어요.(웃음) 반디트라소 갤러리, 박여숙갤러리, 동아갤러리에 작품들이 남아 있었어요. 후배의 집에도 1970~1980년대 작품들이 있었고요. 이전 갤러리 전시는 신작 중심이었는데, 덕분에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은 회고전 형식이 되었지요. 지난 전시 작품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서 특별했습니다.


호평을 받은 이 전시 이후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받으셨는데, 상세한 말씀 부탁드려요.

2023년 7월 한밤중에 김윤신미술관 김란 관장에게 모르는 번호의 문자가 왔어요. 밤에도 아르헨티나에서 문자가 종종 오기에 자다가 문자를 힐끗 보니까 전시에 대한 내용이더라고요.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 초대한다고 쓰여 있기에, 당연히 스팸 문자인 줄 알았어요.(웃음) 그래도 일단 이메일로 상세 설명을 보내라고 답장을 보내고, 문자 보낸 사람 이름을 검색해보니까 진짜 베니스 비엔날레 감독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더군요. 그래서 벌떡 일어나서 대화를 시작했지요.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전시가 5월 7일에 끝났는데, 5월 초에 그가 한국에 왔다가 전시를 봤다고 하더라고요. 광주비엔날레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내 전시를 추천해서 보러 갔었다고요. 내 전시를 보니 너무 좋고, <이방인은 어디에나 있다>라는 주제와도 잘 맞아서 꼭 초대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이메일에 답장이 없어서, 전화번호까지 수소문해서 문자를 보낸 것이더라고요. 확인해보니 이메일이 워낙 많이 와서 내가 그의 이메일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버렸던 거죠. 하마터면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를 받고도 못 갈 뻔했습니다.

11월까지 베니스 비엔날레가 이어지는데, 다녀와서 가진 새로운 변화와 영감이 있다면요?

지난 4월 13일 베니스에 도착하자마자 전시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드리아노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주었어요. 그동안 온라인으로 아드리아노 페드로사와 많은 소통을 했지만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니 더 반가웠어요. 좋은 자리에 작품을 설치해주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와 같이 본 전시에 초대받은 이강승 작가와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엿새 동안 베니스에 있었는데, 베니스 비엔날레는 이번이 첫 방문이라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1974년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작품만 보내고 강의 때문에 가지 못했거든요.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 자체도 건축적으로 아름답고 엄청나게 스케일이 컸어요. 여러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게 기획했다는 것이 멋졌어요. 게다가 내 조각들과 같은 공간에 전시한 작품들이 서로 상통하는 주제를 가지고 있어 감탄했습니다. 미국 원주민 출신 작가 케이 워킹스틱(Kay WalkingStick), 레바논 작가 아베프 엘 레이스(Avef el Rayess), 오스트리아 작가 레오폴트 스트로블(Leopold Strobl)이 나처럼 광활한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보여주고 있어요. 여러 작가의 작품을 이렇게 균형 있게 설치한 거대한 전시장에서 내 작품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새삼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아직도 나아갈 길이 멀다고 느꼈지요.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그 끝에 완벽하게 도달할 수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해 나 김윤신의 작품 세계가 확고하게 전달되는 작품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나의 조각과 다른 작가의 그림이 서로 어울리기에, 조각은 건축적이면서 평면이 아닌 입체 공간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싶었어요. 물론 그림도 공간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조각은 또 다르지요. 내가 조각을 선택했지만, 조각은 끝까지 하는 작가가 드물어요. 작품에 나의 정신을 반영해서, 젊은 작가들이 본받을 만한 작품을 남기고 떠나고 싶어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최선이라는 것은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지요. 정신을 집중하면 사람의 영혼이 그 속에 있어야 하는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염려도 됩니다. 나이가 드니까 다리가 아파서, 앉아서 작업하는 시간이 많아졌거든요.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8점을 예술 감독이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전시에서 직접 선정했다고 하는데요. 어떤 기준에서 선정했는지 들으셨는지요?

아니오. 8점을 만든 장소와 시대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우리 제자들이 생각하기로는 완전히 껍질이 일어나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나무 작품, 나무 가운데가 썩어서 가운데를 파낸 아슬아슬한 작품처럼, 자연 그대로를 가져와서 작가의 손이 닿아서 자연을 어색하지 않게 담아낸 최상의 작품을 선정했다고 하더라고요.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을 고른 듯합니다. 자연을 꾸밈 없이 가져다 그것이 원래 갖고 있는 일부분을 온전히 살린 것. 자연에 가깝게 살린 것, 최고의 조형미를 이루어낸 것이요. 인간의 힘이 아니고 자연이 만들어낸 듯한 아름다움이 있는 작품을 선정한 듯해요. 장식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 같이 이루어낸 그런 작품들이었습니다. 전시 공간 내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자연을 옮겨 놓은 듯했습니다.

구순을 앞둔 요즘도 직접 전기톱을 들고 작업하시는지요?

네, 그렇습니다. 내가 전기톱을 든 여성 조각가라고 언론에 여러 번 소개되었는데, 물론 아직도 사용하고 있어요. 새 작업실에서도 쉬지 않고 톱질을 하려고 합니다. 톱은 아르헨티나에 가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아르헨티나에 여행 갔다가 급하게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현대미술관장 로베르토 델 비야노(Roberto del Villano) 관장의 제안으로 전시를 준비하느라고 거리에서 나무를 주워 자르다 보니 쓰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 전기톱이 조각에 쓰인다는 것도 몰랐어요. 현지에서 작품을 만들어 전시한 미술관 개인전을 마치고 3년치 전시가 밀려서 한국에 못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지요. 한국에서라면 대학 강의하면서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고통을 이기고 예술가가 되고 싶었어요. 대학에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3년을 기다려준다고 했는데, 계속 전시가 있어서 40년을 남미에에 머물게 되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 참 잘한 것 같아요. 아르헨티나에서도, 한국에서도 주위 분들 도움을 받으며 이렇게 작업을 이어오고 있지요.
아직 작업실을 정리하는 중이지만 이제부터 조각을 하려고 합니다. 조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비로소 안정이 될 겁니다. 아르헨티나와는 다르게 작업실과 집이 분리되어 있어 아쉽기는 해요. 거기서는 집에서 작업하고, 찾아온 이들에게 언제든 작품도 보여줄 수 있었거든요. 작업실과 집이 같이 있으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아무 때나 작업할 수 있고, 아무 때나 쉴 수도 있고요. 점점 새벽에 일어나기가 어려워지고, 다리가 아파서 속상합니다. 한의원에 다니고 있는데 쉽게 치료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아르헨티나에서 인생의 마무리를 하고 싶어하셨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김윤신미술관의 존재 때문이겠지요? 베니스 비엔날레 초대로 인해 결국 한국에 정착하시기로 결심하셨다니 반갑습니다.

사실 20년 전에 이미 아르헨티나에 내가 묻힐 자리도 준비해두었어요. 하지만 많은 작품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컸어요. 아르헨티나와 한국 모두 작품 기증이란 까다로운 문제니까요. 나이가 듦에 따라 한국을 오가기 힘드니까 2022년에 마지막으로 일 년만 한국에서 살자고 생각하고 들어왔어요. 보고 싶은 곳 다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 다 만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려고요. 5월에 한국에 왔는데,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과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 같은 좋은 기회가 이어지면서 한국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이후 한국에 더 있고 싶은데, 거주할 곳이 마땅찮았어요. 그런데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 레지던시에 머물 수 있게 되었고, 1년간 그곳에서 작업을 하게 되면서 마음을 굳혔지요. 양구는 내 고향 원산 근처의 작은 도시인 안변과 비슷해서 어릴 적 추억이 떠올라 더 좋았어요. 안변은 사과가 유명했는데, 일제강점기 시대에 외국인들이 와서 이젤에 그림을 그리던 모습을 유심히 보던 기억이 나요. 레지던시는 그림만 그릴 정도의 규모여서, 산림조합을 공짜로 빌려서 조각 작업을 했지요. 마침 조합에서 일할 시기가 아니었기에, 내가 여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어요. 나이 든 미술가가 전기톱을 들고 작업하니까, 고맙게도 내가 다칠까 염려가 되어 CCTV까지 설치해주었어요.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아르헨티나에서 온 편지> 전시를 시작했는데, 소개 부탁드립니다.

이응노 작가님과 홍익대학교에서 만난 스승과 제자 사이입니다. 내가 1964년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면서 파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응노 작가님과 교류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이응노 작가님이 조언해주시길 “좋은 화랑의 좋은 작품만 보러 다니라”라고 하셨어요. 학교에 다니고는 있지만, “네가 파리에서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씀해주신 것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당시 이응노 작가님은 파리에서 피에르 술라주, 자오우키, 장다이첸과 파리 시립 체르누스키 미술관에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셨어요. 이응노 작가님 댁에 찾아가 종종 이야기도 나누고, 조각 기법을 알려달라고 하셔서 1년 정도 일주일에 한 번씩 가르쳐드렸어요. 자귀, 끌, 망치를 준비하라고 말씀드렸고, 주위에 밤나무가 있어서 이를 주워오셨는데 밤나무는 작업도 어렵고 조각하기에도 어려운 나무입니다. 나중에는 자주 못 만났는데, 이응노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번에 아르헨티나에서 가져온 작품 가운데 내가 오래도록 갖고 있고 싶은 큰 조각들과 판화, 회화 등을 선보이고 있어요. 파리에서 학교 다닐 때 만든 판화도 있고, 최근 작품도 있고요. 오는 9월 22일까지 열리니까 관심 있는 분들의 관람을 부탁드립니다.

서울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여성 조각가 16인의 전시 <집(ZIP)>도 잘 보았습니다. 김윤신 작가님부터 20대 여성 작가까지,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전시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요새 젊은 작가들은 특별한 물성의 재료를 많이 쓰더군요. 그래서 나도 변화된 물성으로 작업해서 새로운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구작을 출품한 것이 마음에 걸렸어요. 오프닝에서 선배 작가로서 한마디 해달라고 하길래 물성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 깃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물성에만 집중하지 말고, 물성을 통해서 작가의 정신 세계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술이지요. 재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재료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젊은 작가들은 굉장히 감각적이고 빨라요. 내가 살던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느리고 처지는데, 한국에 와보니 정신이 바짝 듭니다. 내가 따라가기 어려우니 좋고, 좀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고 해요. 박윤자, 한애규, 노시은, 김주현, 신미경, 노진아, 정소영, 정문경, 오묘초, 조혜진, 김태연, 이립, 서혜연, 홍기하, 박소연 작가가 참여한 전시이고, 9월 8일에 끝납니다.

아우터 EENK, 팬츠와 슬라이드 모두 ZARA.

아르코미술관 전시에서 우리나라 여성 조각가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자리에서 본 것 같아서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조각은 물질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남성 작가에게 유리하다는 고정관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작가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작가로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남성은 여성보다 에너지가 많고, 힘이 더 센 것뿐이지요. 완성된 작품이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로 인해 달리 보일 수는 있어요. 똑같은 도끼질이나 톱질을 해도 남녀 차이는 있고, 같을 수는 없습니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자신이 가진 에너지에 따라 작품을 만들면 되는 겁니다. 여성은 섬세하면서 따뜻하게, 남성은 폭이 넓으면서 과격하게 만들 수 있겠지요. 물론 남성이 여성스러운 작품을 만들 수도 있고요. 하지만 별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내가 여류조각가협회를 만들어서 창립 50주년이 곧 다가오는데, 그냥 협회 이름일 뿐입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꾸준히 할 수 있는 능력까지 최선을 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지, 미술가에게 성별의 구분은 필요 없어요.

회화도 조각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작가님 작업의 시작과 끝은 조각이라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까요? 조각가라고 불리기를 원하시는지, 미술가라고 불리기를 원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무엇이라고 불리든 상관없습니다. 조각과 판화는 내 전공이지만,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작업 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각가냐, 화가냐, 판화가냐 물으며 내 정확한 전공이 무언지 궁금해 하시는데 장르 구분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 작업이 작품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작가로서 최선을 다한 혼이 들어 있는 작품인지가 중요합니다.

판화, 회화도 하시지만 특히 조각 작업을 완성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조각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작하면서 그것을 느끼고, 그 느낌을 찾아들어가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스케치도 하고, 그다음 드로잉도 하고, 점토로 모형도 만들어보고는 했는데 어느 시기에 이르니 그것이 필요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것을 벗어나 그 재료와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이 왔을 때, 공간의 내면을 보고 느끼는 대로 따라갑니다. 주어진 것에서 따라가는 것이지요. 작업을 다하고 나서 보면 어느 부분에서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요. 나무든 캔버스이든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작업실에 캔버스와 통나무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있어요. 모든 나무가 쓰러져 있거나 세워져 있거나 하죠.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서 연구하고 고민합니다. 나무 냄새도 맡아보고 살펴보고 만져보면서요. 그렇게 교감이 이루어진 후에야 작업을 시작하고, 어떤 작품은 하루만에 끝낼 수도 있어요. 주어진 재료를 충분히 흡수하고 쏟아붓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작업할 때 했다는 명언 “나는 대리석 안에 들어가 있는 천사를 보았고, 그가 나올 때까지 돌을 깎았다”와 비슷한 원리인가요?

일맥상통하지만, 같지는 않아요. 미켈란젤로는 그 돌의 형상에서 영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나는 그 안에 이런 형태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안에서 형태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것을 그냥 보이게 놔두고 생김에서 원래 갖고 있는 것을 살립니다. 안과 밖 속성의 차이를 보면서 작업합니다. 잘라내는 것은 그 돌이 갖고 있는 속성에 대한 것을 더 느끼면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다른 이들은 내가 그냥 마구잡이로 작업하는 줄 아는데,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과정들입니다.

오랜 남미 생활에서 받은 에너지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남미 문화와 역사가 작가님의 작품 세계에서 어떻게 발휘가 되었는지요?

딱히 남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아닌데, 그 안에서 살고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스며든 것 같아요. 내가 한국 사람이니까 어떤 표현을 하더라도 한국적인 것이 나오듯이, 거기서 오래 살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스며들어서 표현이 나오는가 봅니다. 볼리비아와 인디언이 쓴 색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원초적 컬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한국적 색감이라고 생각해서 썼는데, 남미를 연상시킨다고 해요. 파리에서 공부하다 한국에 왔을 때는 파리의 색감이 느껴진다는 평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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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보는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나는 작품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작품은 관람객으로부터 완성됩니다. 보는 사람마다 작품을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작품의 메시지는 각자 느끼는 것이기에, 그냥 스쳐지나가지는 말고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얻어가길 바랍니다. 내 감정과 모든 것을 담은 작품이라도, 관람객이 보면 그의 상황과 관심에 따라서 작품이 보이기에 각자의 생각에 따라 완성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작품에 어떤 제목이 있더라도 각자 제목을 달리 해석하게 되고, 감상하는 사람에게 모든 결론이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구상이 아닌 추상 작업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고, 이것이 추상 작업의 매력입니다.

나무, 브론즈, 준보석, 캔버스 등 여러 매체를 사용하시는데, 새로운 물질을 탐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작가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의 물질에서 무언가를 느꼈다면, 또 다른 물질도 탐색하면서 발전해야 합니다. 여러 다른 물질을 가지고 실험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가만히 정체되어 있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당장 작업을 시작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메모라도 해놓지요.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니까 마음이 급합니다. 내가 신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작업만 했는데 이 정도도 못하면 안 됩니다.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진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위기를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제자로 만난 수양딸들이 항상 보살펴주어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2025년은 구순이며, 화업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일단 작업실에서 새로 시작한 작품을 완성해야 합니다. 그림은 밤에 그리고, 조각은 낮에 하려고 해요. 내가 곧 아흔 살이니까 시간이 없어요. 오늘은 건강하지만, 내일은 내가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정신이 멀쩡할 때 부지런하게 작업하자 싶어요. 내가 어릴 적 아침에 할머니를 깨우러 갔더니, 안 일어나셨던 기억도 나고요.
이번 키아프 서울에서는 국제갤러리를 통해 솔로 부스를 선보입니다. 2025년에는 리먼 머핀 런던 갤러리 전시도 예정하고 있는데, 아마 구작과 신작을 같이 보여줄 것 같아요. 미술관 전시도 계획하고 있는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줄게요. 그리고 반디트라소 갤러리에서 제자 22명과 구순 잔치 겸 단체 전시를 같이합니다. <김윤신과 미술가 제자들>이라는 전시 제목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김윤신을 기억하는 제자들의 책도 함께 발간할 예정입니다.

이전에 미술사에 남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마음은 변함 없으신지요?

화업 70년을 앞두고 이제야 미술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내 입장에서 현재가 자꾸 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대에 이런 사람이 살아서 좋은 작품을 남겼다는 것을 후대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후배들에게 그들도 투철한 작가 정신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 내가 선배로서 할 일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