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서 이번 개인전이 팔순이자 화업 51주년의 선물이라고 하는데, 나는 난도질당하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습니다.”
오는 10월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을 앞둔 이강소 작가를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가 이곳 경기도 안성에 작업실을 마련한 것은 30년 전이다. 뉴욕 연수에서 돌아왔을 때, 동료 작가들과 안성에 터를 잡고 예술가 마을을 만들려는 계획을 공유했다. 하지만 동료들이 피치 못할 이유로 하나둘 떠나고, 이제 그 혼자 남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직접 설계해 작업실 건물을 하나씩 지었으니, 이 건물도 그의 조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한옥도 한 채 지어 유유자적 쉴 수 있으니, 이곳을 이강소 미술관이라고 명명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팔순의 조각가는 사람 만날 일 없는 이 외딴곳에서 오늘도 묵묵하게 작업에 열중한다. 작업실은 냉난방 시설이 열악하지만 계획이 많은 그에게 그런 정도는 장애물이 될 수 없다. 아직도 만들고 싶은 작품이 많아서 주름이 늘어갈 시간도 없다.

최근 일본 도쿄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죠. 소감이 어떠신지요? 

도쿄 화랑에서 20여 년 만에 개인전을 갖게 되었어요. 1990년, 2000년에 이어 올해가 세 번째 전시입니다. 1984년에 도쿄 화랑이 주관한 <휴먼 다큐멘타 84/85> 단체전에 한국 작가 몇 명과 참여해 인연을 맺게 되었어요. 대표가 화랑을 경영하는 원칙은 일본, 한국, 중국 미술을 다루는 것이었어요. 그분은 한국 미술을 무척 사랑하셨지요. 젊을 때 골동품상 점원으로 출발하셨다는데, 일본 화랑계의 거목으로 성장했어요. 그분의 목표에 공감했고, 같이 전시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사장은 이제 작고했고, 동아시아 3개국을 사랑하고, 그 나라의 작가를 평생 소개하겠다는 정신을 아들이 이어받아서 화랑을 운영하고 있지요. 조각과 페인팅 여러 점을 선보였는데, 컬러 작품도 포함됩니다. 그간 주로 흑백 작품을 그렸는데, 지금은 컬러 페인팅을 계속 시도하는 중입니다.

도쿄 화랑 전시 오프닝에서 멋진 축사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도쿄 화랑 오프닝에서 서로 인사하는데, 나보고 축사를 하라더군요. 그래서 1973년 서울 명동화랑에서 열린 나의 첫 개인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화랑에 그림을 거는 것이 아니라, 선술집을 차렸던 재미있는 전시였지요. 어릴 때 생각으로 전시 제목을 <소멸>이라고 멋지게 지었지만, 참 어설픈 제목입니다. 지금 그 순간은 기억할 수 없지만, 오늘 여러분을 뵙고 인사를 드린 지금은 보석 같이 귀한 순간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인사해서 박수를 받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고, 찰나가 아름답습니다.

첫 개인전의 선술집 작업이 우리나라 미술사에 이렇게 남게 될지 모르셨지요? 이 전시가 2018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과 2019년 국립 싱가포르 미술관에서 다시 선보였고, 올해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에도 등장할 예정이라니 반갑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내가 아직 어려서 미술을 잘 모르던 때지만 명동화랑 전시 제목을 <소멸>이라고 지었어요. 선배 작업실에 놀러 갔다가 포장마차에서 점심 먹고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버린 나무로 만든 테이블에 냄비에 탄 자국, 담뱃불 자국이 있는데도 아주머니가 잘 닦아서 반들반들하더라고요. 내 앞에 앉은 선배를 보다가 선배는 나를 볼 수 있는데, 나는 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더군요. 그 자리에 같이 있지만 서로 같은 조건에서 현실을 보는 것이 결코 아니었지요. 선배는 나와 다른 경험을 하고 있고, 이 모든 것이 다 현실이라고 생각하니 무척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의자를 하나 팔라고 해서 작업실에 갖다 놓았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이는 고미술과 같아 박물관에 두어도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 의자와 테이블을 모두 사서 작업실에 갖다 놓았지요. 작품으로 만들려고 구입한 것은 아니고 단순히 좋아서 그랬습니다. 명동 화랑 사장은 운수업을 하다가 갤러리를 차린 분인데, 당시 서울에는 현대미술 갤러리가 딱 그곳 하나뿐이었습니다. 로얄호텔에 있다가 안국동 걸스카웃 회관 지하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내가 첫 개인전을 연 것이지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으셨는지요? 

서울에 사시던 할아버지가 서예를 즐기셨는데,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대구로 내려오셔서 같이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삼촌도 할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우고, 아버지도 평생 서예를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고서적도 수집하셨어요. 나는 옆에서 구경한 것뿐이지요. 우리 집이 한옥이었는데, 소장한 옛날 글씨본이 많았습니다. 집안 사람들이 틈만 나면 다 같이 둘러 앉아 목판을 만들어 칼로 빚고 글을 현판에 새겨서 기둥에 붙이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지요. 나는 어려서 구경만 했지만, 그런 집안 분위기가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전통에 관한 논문을 쓰신 것이 아마도 그러한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미술 대학 4학년 때 교수가 졸업논문을 쓰라고 했는데, 내 주제가 전통이었지요. 아마 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전통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릴 적부터 서양의 인상파, 야수파,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졸업 무렵에는 선배들이 액션페인팅을 하는 모습을 봤어요. 나도 3학년 때 따라 해보기도 했습니다. 우리 세대의 회화가 서구의 경향을 모방하면서 변하고 있는데, 우리가 서양 사람도 아닌데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지요. 나만이 아니라 우리 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에 공감해서, 졸업 이후 학연과 지연을 뛰어넘어 그룹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

우리나라 현대미술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신체제, AG그룹 등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그룹을 본격적으로 조직하기 전부터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정보도 교환했습니다. 이런 모임을 반복적으로 갖다 보니 우리가 유럽의 경향이나 일본 미술 경향에 많이 경도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사상적·전통적 흐름을 다 놓치고 서구 지향적 미술로 나아가면 안 된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1969년 무렵 우리 젊은 세대의 반성적 사고가 그룹 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이건용 작가는 ST, 나는 신체제 그룹, AG그룹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더 강렬하게 무브먼트를 일으켜야 한다는 의식과 경쟁으로 교사를 그만두고 대구에 내려가 전시를 기획하게 됐지요. 대구백화점 회장이 고등학교 선배라 갤러리를 만들어 우리의 제안을 다 받아주었어요. 그 작은 갤러리에서 실험 작가 전시를 열고, 수시로 박서보, 이우환, 윤형근, 정창섭의 전시를 열었어요. 이렇게 서로 긴밀히 협조하며 미술계를 바꾸게 되었고, 이것이 1974년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로 연결되었지요. 박현기, 최병소와 함께 계명대학교 미술관에서 첫 전시를 열었습니다.

1974년 대구현대미술제로 우리나라 현대미술이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정의해도 될까요? 

네, 그렇습니다. 1974년 AG그룹에서 기획한 서울 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실험 작가’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미술계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마땅찮아서 실험 작가라고 쓴 것이지요. 그리고 같은 해 대구백화점 화랑 기획전에서 우리가 당돌하게 <한국 실험 작가 초대전>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당시 우리 젊은 작가들이 추구하는 무브먼트가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로 나아가는 단계에 놓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러 다양한 작가를 모으고 싶어서 전시를 많이 했습니다.

특정 사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다양한 민중미술 작가, 표현주의 작가, 전위미술 작가가 섞여 활동했지요. 서울에서는 서로 견제했지만 대구는 작가들끼리 화합이 잘되는 미술 도시였어요. 그러면서 1976년 부산현대미술제와 광주현대미술제, 1978년 전북현대미술제가 생겼지요. 1974년이 시작점입니다. 그것이 자극이 되어 박서보 작가도 에꼴 드 서울을 만들고, 하종현 작가도 AG그룹을 통해 현대미술로 진입했어요. 현대미술의 흐름이 형성된 중요한 계기입니다.

미술 대학을 졸업하면 생계가 유지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돈은 없고 부모님은 내가 판사나 검사가 아니라 미술 전공자라고 실망하니 막막했습니다. 유학을 못 가도 외국 작가와 경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수준을 높여 경쟁하고자 하는 자존심 때문에 미술 운동을 한 것입니다. 1970년대는 모든 것을 바쳤고, 인생이 바뀌었어요. 이제 키아프나 프리즈 같은 국제적 아트 페어가 서울에서 열리는 시대가 오니 감동스럽습니다.

작가님의 작품 중 갈대밭 작업과 닭 퍼포먼스가 특히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보아도 놀랍고, 이번에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도 전시되었지요. 

197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제2회 AG그룹 전시를 할 때에는 갈대밭 작업 ‘여백’을 선보였어요. 어릴 적 고향 대구 인근 낙동강 변에 갈대밭이 많았습니다. 외갓집에 오갈 때마다 무성한 갈대밭을 보았지요. 여름에는 새까만 어린애들이 햇볕에 그을린 채 그 속에서 뛰놀고, 가을과 겨울에는 바람에 갈대가 흔들리며 우수수 소리가 납니다. 시간의 순환성과 재귀성을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았어요. 1975년 파리 비엔날레에 다녀왔는데, 미술계 분위기는 여전히 근대적이었습니다. 파리도 옛날 도시였지만, 파리 비엔날레는 35세 이하 젊은 작가만 참여하는 행사여서 장르가 다채로웠지요. 나는 닭 한마리를 전시장에 묶어 놓고 분필 가구를 뿌린 작품을 선보였어요. 닭이 움직일 때마다 발자국이 생겨서 희고 큰 원을 이루는 작업이었습니다. 요즘은 동물 학대로 여겨 다시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만 각자 닭을 상상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현대미술이 전개되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것이 역사가 될 것을 알았습니다. 1977년에는 박현기 등 대구 작가들과 스튜디오를 빌려서 영상 작품을 하나씩 만들었어요. 이 중 몇 작품이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해머 미술관을 순회한 <한국실험미술 1960-1970> 전시에 출품되어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 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한국실험미술 1960-1970(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전시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거쳐 로스앤젤레스 해머 미술관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미국에 가서 직접 전시를 본 감회가 특별하실 것 같아요. 

혼자 가만히 생각해보면 감동스러워요. 내가 1943년생이고 내 나이 연배는 우리나라 건국 이후 교육을 받은 첫 세대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1949년 초등학교에 입학해 한국 정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로 배우고,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나 야외 숲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겪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미군 부대 PX를 통해 서적이나 <라이프> 잡지를 즐겨 보았는데, 잡지에서 윌리엄 드 쿠닝의 액션페인팅을 본 기억이 납니다. 선배들은 일어가 능통하니까 현대미술 운동 이후 일본 화단과 교류했지만, 우리 세대는 영어를 조금하니까 서구 정보에 익숙했지요. 그러다 보니 선배 세대는 일본 유학파가 많았는데, 일본은 서구 유럽의 영향을 받았기에 서양미술을 일본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우리나라도 향토적 미술의 경향이 있었지만, 서구 미술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 실정에 맞는 미술을 하고자 했습니다. 서구 미술을 접했던 초창기 세대가 한국 현대미술 형식을 구현했다고 해서 세계적 미술관에서 작품을 전시를 한다는 사실이 재미있었습니다.

1973년 첫 개인전 이후 지난해 화업 50주년을 맞이하셨습니다. 소감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2023년이 화업 50주년이었지요. 선배와 동료에게 배우기도 하고, 스스로 배우고 노력했는데 돌이켜보니 변화가 많았습니다. 미술 영역이 분화되어 확장되었고, 서양화와 동양화라는 분류에서 동양화 대신 한국화라는 말도 생겼어요. 미술 대학에서도 동양학과가 아니라 요즘은 한국화과로 의견이 수렴되어 예술가의 정신이, 주체성이 바뀐 것이 새롭습니다. 예전에는 미술의 영역이 동양화, 서양화, 조각뿐이었는데, 이제는 이벤트, 해프닝, 영상, 사진 등 영역이 크게 확장되고 거기에 따른 많은 작가가 생기고 분야도 넓어졌습니다. 난 영역에 구애받지 않고 다 경험하고 싶었어요. 새로운 형식을 전개하되, 내가 생각하는 형식을 생각 안 할 수 없지요. 회화를 다시 해석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동양화와 서양화의 전통과 달리 현대 한국인으로서 나는 어떻게 이를 표현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캔버스를 꿰기도 하고 여러 실험을 해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1970년대 미술 운동을 하면서 조각도 했는데, 술 한잔 하다가 조각을 왜 꼭 만들어야 할까, 갈라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미술 대학에서 강의할 때 옆방에 흙이 잔뜩 있길래, 흙을 치대 팽이 쳐서 칼로 자르는 작업도 해보고 조각에서도 여러 실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리안 갤러리 서울에서 첫 조각 전시 <바람이 분다: 조각에 관하여>를 여신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조각도 크게 보면 몇 종류로 나눌 수 있지요. 중세 이후 근대까지 예수상, 마돈나상 같은 종교 조각이 있고, 근대에 들어오면서 데카르트, 뉴턴 시대에는 조각가의 시선이 인간 자신에게 향했지요. 자기표현적 작업이 회화와 조각에서 이뤄지는데, 로댕이나 부르델의 조각이 여기에 속합니다. 회화도 그런 식으로 발전해왔어요. 앵포르멜이나 액션페인팅이 자기중심적 세계의 표현이지요.

대학교 1학년 때 서예 교수가 말하길, 붓을 들면 붓끝이 있고, 화선지와 책상이 있고, 붓은 팔을 통해 신체가 땅을 딛고 일체감이 생기면서 서예가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우주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서예의 기본이지요. 조각도 근현대를 거쳐 표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스스로 만들어지는 조각은 불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어 던져보게 된 것이죠. 붓을 놀리는 것처럼 반죽을 던지면 농도와 힘에 따라서 스스로 뭉개지고 형태를 띱니다. 에너지가 그대로 응축되는 것이지요. 이런 조각도 가능한데, 그동안 왜 아무도 안했을까요? 어린애도 할 수 있는 이렇게 쉬운 조각이 있는데 왜 아무도 안 하지요?(웃음) 조각은 아직 초보자입니다. 던질수록 엄청나게 변화할 수 있어요. 붓으로 예상하지 못하는 짓거리를 하는 거처럼 던지는 것도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변화무쌍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가을·겨울이 되면 또 미친 짓을 한번 해볼까 하고 있지요. 

10월에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으로 세계 미술계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미술관 전시를 준비할 때와는 느낌이 다릅니다. 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은 긍정적으로 또 달라졌다고 봅니다. 학예연구사와 여러 구성원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우리 세대와 의식이 다르게 상당히 전문적입니다. 그래서 내 작품을 보여주고 모든 전시 구성을 다 맡겼습니다. 완전히 맡겨보니 기분이 좋고 신선합니다. 또다시 나를 배우는 기분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것이 좋은 기회구나 싶어요. 타자가 내 작업을 어떻게 보는지 기대되고, 그들이 어떻게 전시를 구성할지 설렙니다. 작업이라는 것이 꼭 기존 방식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전개되어도 좋은 것이지요. 그래서 전시와 작품이 새로운 형식으로 구현된다 면 금상첨화지요.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은 회고전 형식인가요? 

네, 아직도 논의하는 중인데 회고전에 가깝습니다. 2025년 가을에 개인전 2부가 대구미술관으로 이어집니다. 일부러 개인전을 1, 2부로 나눈 것은 아니고, 화업 50주년을 정리하는 의미의 개인전이다 보니 두 미술관의 제안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두 전시 구성 모두 내가 직접 개입할 것은 아니고, 미술관 구성원들이 열심히 연구해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인생을 사는 것이고, 미술 세계의 전개입니다. 전시 제목을 어떻게 할지, 미술관에서 여러 의견을 묻는데 믿고 맡길 작정입니다. 주위에서 이번 개인전이 팔순이자 화업 51주년 선물이라고 하는데, 나는 난도질당하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습니다. 회고전에 가깝지만 신작도 선보입니다. 

신작도 만날 수 있다니 기대가 큽니다. 요즘 컬러 작업을 하신다고요? 

아마 신작 발표회는 미술관 전시와 별도로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에도 컬러 페인팅을 조금씩 선보이기는 했지만, 컬러 작업도 계속 하는 중입니다. 요즘은 본격적으로 내가 왜 컬러를 못쓸까, 겁내지 말고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방법을 구현해보자 하고 도전하는 중입니다. 물론 내가 늘 그렇듯이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보려고 해요. 그림이 예상대로 되면 재미가 없습니다. 예상대로 이뤄지지 않아야 재미가 있지요. 요즘 색깔 그림을 그려보고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색깔을 쓰면 주관적 회화가 됩니다. 예상에서 벗어난 색깔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면, 내가 컬러 작품을 잘할 수 있게 되리라 봅니다.

주관적 관습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만들면서 자꾸 망쳐봐야 합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주관에서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잘 망쳤을 때 괜찮은 작업이 나오지요. 배열을 생각하고 추가적으로 여러 가지 전통적 생각으로 화면의 조화를 생각하면 이미 그때는 작업의 출발이 아닙니다. 꽤 오래전부터 이렇게 생각했어요.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관습적이라고 보고,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파격을 시도할 수 있을지에 몰두합니다.

이강소 작가님의 작품이라고 하면 주로 회화와 설치 작품을 떠올리는 데, 조각 전시뿐 아니라 사진 전시를 하신 적도 있다니 흥미롭습니다. 

사운드 작업도 하고 영상도 합니다. 안성 작업실 야외에 나의 사운드 작품을 전시해놓았는데, 물소리가 들리십니까?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만들 방법이 없는지 자꾸 생각하는데, 쉽지는 않아요. 사진도 즐겨 촬영합니다. 젊을 때에는 기계에 관심이 많았어요. 나이가 드니 복잡하면 작업하기 어려워서, 카메라도 그냥 표준에 맞춰놓고 계속 그렇게 촬영합니다. 카메라는 참 매력적인 기기입니다. 카메라가 얼마나 좋은 기기인고 하니, 우리가 남의 눈으로 세상을 못 보지만 카메라를 통해 타자의 눈으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기계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타자의 눈으로 여러 광경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렇기에 이 카메라야말로 참 이로운 기계지요. 사진 역사를 훑어보면 대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진 찍는 사람의 관심이 그 대상에 있다는 것이지, 카메라는 피사체로부터 반사되어 오는 빛을 찍는 기기입니다. 그렇다 보니 카메라로 세상을 보다 보면 대상뿐 아니라 그 안에 흐르는 공기나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찍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래서 일부러 으슥한 곳이나 사람이 오래 살던 공간을 찍으며 묘한 분위기를 냅니다. 내 작품은 대상의 형상이 아니라 그 사이의 빛을 생각하는 사진입니다. 서울 예화랑, 프랑스 니스의 아시아 미술관 등에서 사진 전시를 한 적이 있지요. 프랑스어는 잘 못하지만 프랑스에 자주 가는 편입니다. 프랑스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전시를 가졌습니다.

지난 세월, 위기의 순간이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고 작업실에 파묻혀 있으면 위기가 없습니다.(웃음) 1970년 초부터 세계를 달리 보게 됐습니다. 그전에는 젊고 어리니까 이 세상은 끊임없이 푸르고 멋질 것이라고 봤어요. 인생이 창창하고 멋질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세계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것이 약간 허무주의로 변화했고, 동료들과 현대미술 단체전을 시작하고 작품을 만들면서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가 많 다고 느꼈습니다. 현대미술제를 할 무렵에는 성공한 화가라면 해변에 황혼이 질 때 막대기 짚고 베레모를 쓴 채 여유롭게 산보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은 바다가 아니라 산골에 살지만 바다는 습기가 많아서 그 또한 좋습니다. 소나무 사이에 바람이 솔솔 불고, 매일 작업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호흡하니 기분이 괜찮습니다. 어렵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비교적 적게 대하니 안정적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장 할 일이 많아서 내일을 생각 못 하고 있습니다. 주관적 관습에서 벗어난 컬러 작업을 원만하고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을지 생각하는 중이고요. 조각도 일단락 짓고 싶습니다. 얼마 전 가스 가마를 전기 가마로 바꾸었는데, 올 겨울부터는 새로운 조각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뭔가 변화가 생길 것으로 봅니다. 장작 가마도 힘들지만 가스 가마는 2~3일간 잠을 못하고 몹시 고생스러웠습니다. 하고 싶은 작업은 많은데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사진도 배우고 싶어요. 영상 작업도 다시 하고 싶은데 할 일이 많아서 못 하고 있어요. 좋은 조수가 있으면 영상 작업도 하고 싶습니다. 미술하는 행위가 재미있어요. 산골에 있지만 할 것이 워낙 많아 정신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