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원은 디지털 세계에서 채집한 이미지, 혹은 가장 가까이에 실재하는 존재를 그린다. 그리고 그가 그린 이미지는 평면 혹은 조각 같은 조형물 위에 입혀진다. 디지털과 현실, 평면과 조각.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인식되어온 이 단어들은 그의 작업 안에서 병합되어 존재한다. 애초에 분리된 세계는 없었다는 듯이.
안태원 혹은 뿌리, 어떤 이름으로 칭해야 하나요?
뿌리는 별명이에요. 입시할 때였는데, 친구가 다짜고짜 저를 뿌리라고 불렀어요. 별다른 의미도 없이 그냥 ‘뿌리야’라고요. 때마침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고민하던 터라 저 역시 그냥 뿌리(ppuri)로 짓고 작품 사진을 올렸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이 저를 ‘뿌리 작가’라 부르더라고요.
에어브러시로 작업을 해서 지은 이름이라는 설도 있던데요? ‘뿌리는’ 작업을 해서 ‘뿌리’라고요.
전혀 아닙니다.(웃음) 이전까지는 따로 해명하지 않고 지내왔는데, 이제는 안태원이라는 본명을 쓰고 싶어요. 그래서 최근에 마친 개인전 제목을 <뿌리 PPURI>로 지은 것도 있어요. 이 전시를 기점으로 저와 뿌리라는 호칭을 제대로 분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에어브러시는 언제부터 썼어요?
6~7년 썼어요. SNS를 돌아다니다가 오스틴 리라는 작가의 작품을 보고 대체 뭐로 그린 건지 모르겠는데 너무 써보고 싶은 거예요. 그게 에어브러시였어요. 처음에는 이 도구가 만들어내는 효과가 무척 재미있어서 쓰는 행위에 집중했는데, 작업하다 보니 당시 제가 주목한 주제와 잘 어울리는 도구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상공간에서 접하는 시각적 경험을 물질적 작업으로 가져오는, 특히 인터넷에 떠도는 밈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서 느낀 중간자적 감각을 표현한 초기 작업과 확실히 잘 어울리는 도구인 것 같아요.
주제에 맞춰 작업 도구를 선택한 게 아니라 오히려 에어브러시로 표현하다 보니 그 느낌이 디지털 편집 프로그램에서 그림을 그린 것 같은 형태로 연상되면서 지금의 작업에 이르게 된 것 같아요. 물론 붓으로도 흩뿌린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제가 생각한 것을 시각화하기에 에어브러시가 가장 적합한 도구라고 생각해요.
밈 이미지를 채집해 자신만의 관점으로 풀어낸 초기 작품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건가요?
평소 ‘짤줍’을 하면서 밈 문화를 되게 즐기는 사람이었어요. 이른바 짤로 불리는 이미지 자체에 흥미를 느꼈고, 이를 레퍼런스 삼아 작업을 시작한 거죠. 그런데 막상 작업이 되니 시각적으로 심하게 피로감이 드는 거예요. 디지털상에서 요동치던 이미지들이 멀리서 볼 때는 재미있었는데 막상 수집하고 파고들다 보니까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왠지 한 발짝 물러서서 거리감을 두고 싶었고요. 그렇게 디지털과 실재하는 세상 사이, 어딘가에 머물면서 작업한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불완전해 보이는 작품이 나왔다 생각하고요. 디지털스러운데 그게 정교한 형태가 아니라 심하게 왜곡되거나 과장된 부분을 계속 넣어온 작업의 결과인 셈이죠.
다음 작업으로는 반대로 실재하는 존재를 포착하기 시작했어요. 밈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는 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한 거죠. 그 이유를 한 전시 서문에서 발견할 수 있었어요. “닿을 수 있는 거리는 무한에 가까워지는데 어쩐지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곳들은 오히려 멀어진다. 나는 그것들을 붙잡고 싶다.”
맞아요. 밈 이미지를 레퍼런스 삼아 작업할 때 디지털 세상에서 한 발짝 멀어지고 싶던 마음이 더 커져서 그랬달까요. 멀리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많아졌는데, 그럴수록 이를 더 거부하고 싶은 거예요. 앱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고요. 그래서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존재에 집중해보기로 했고, 그 결과 저의 고양이 ‘히로’ 시리즈가 시작됐어요.
출발점은 완전히 다르지만 두 작업 모두 어딘가 어긋나거나 과장된 형태를 띠고 있어요.
기술의 발전으로 디지털이 현실 세상에 계속 영향을 주는 게 재미있을 때도 있고 삶이 조금 더 편리해지긴 했지만, 한편으로 반감도 들거든요. 이렇듯 디지털 세상이 주는 묘한 불안감이 제 작업에 계속 연결되는 것 같아요. 완벽하게 정교한 이미지를 선호하지 않는 제 성향도 한몫했고요.
디지털 세계의 경험을 작업 안팎에서 표현하게 된 데는 무엇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제가 1993년생인데,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쓰던 세대인 거죠. 게다가 아버지가 프로그래머로 일하셔서 제 또래보다 컴퓨터를 빠르게 접했어요. 어떻게 보면 현실의 것들을 보는 시간만큼 디지털에서 생성된 이미지를 보는 시간이 많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화된 생각이나 익숙한 효과를 작업에 옮긴 것 같아요. 가상공간이 실재한다면 집처럼 오래 머무는 공간일 테니까, 그 안에서 느끼고 얻은 것을 표현하는 게 제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거죠.
평면 회화에서 출발한 작품이 조각 혹은 설치로 확장되어가고 있어요.
온전한 평면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게 조각이나 설치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과는 달라요. 그린 이미지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옮길지 고민할 뿐이지, 이건 평면이고, 저건 조각이고 하는 식의 사고는 안 하는 편이에요. 그냥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 것 같아요.
밈 이미지, 반려묘 히로. 그다음은 무엇이 작업에 담기게 될까요? 요즘 관심을 갖는 주제는 무엇인가요?
원래는 제가 가상과 현실을 나눠서 생각하고 작업해왔거든요. 그런데 최근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기획자와 얘기하다가 깨우친 부분이 있어요. 디지털과 아날로그라는 단어는 이전 세대에서 만든 거잖아요. 저도 그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분리해 인식해왔는데, 제 작업을 쭉 살펴보니 사실 저는 두 세계를 나누어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둘 다 저에겐 현실이고, 동일한 존재로 보는 거죠. 이전에는 가상 세계에서 떠돌아다니는 이미지를 가져왔고, 지금은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히로의 모습을 관찰해 가져오는데 이 두 작업이 제겐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예요. 저는 디지털과 현실 중간쯤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세계에서 작업해왔던 거죠. 이렇게 정리하는 시간을 보냈고요. 요즘 그리는 건 히로 시리즈도 계속하지만,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작업에 등장시켜보는 중이에요.
어떤 존재를 그리든 에어브러시라는 도구는 계속 사용하게 될까요?
그럴 것 같아요. 그림을 배울 때도 붓으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성격이 좀 급한지 붓보다 빠르게 효과를 낼 수 있는 도구를 찾았는데, 에어브러시만 한 게 없다 싶어요.
개인전 <뿌리 PPURI>로 상반기의 마침표를 찍었는데요. 이후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제가 히로 시리즈로 주목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 그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어요. 한 3년 정도 엄청 휘몰아쳤거든요. 전시 제안도 많이 오고요. 그때는 작업을 즐긴다기보다는 스케줄을 소화해내야 한다는 데 급급해서 빨리 잘할 수 있는 이미지를 무차별적으로 많이 만들기도 했던 것 같아요. 올해 남은 시간 동안은 다시금 제가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를 바라보려고 해요. 문득 ‘이런 걸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데, 그걸 바로바로 포착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템포를 늦추고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찾아내는 훈련을 하려고 해요.
그 훈련 끝에 어떤 작업을 만나게 되길 바라나요?
좀 더 스스로에게 솔직한 작업을 하고 싶어요. 더 자유로워지고 싶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