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아티스트 상희의 작품은 그저 바라보는 것, 혹은 한 번의 체험으로 끝나지 않는다. VR, 설치, 게임 등 그는 다양한 매체를 미술 안으로 끌어들이며 동시에 관객과 밀접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 안에서 작가와 관객은 함께 머물며 우리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보다 넓고 새로운 지금의 미술이 그의 작업에 담겨 있다.
그러니까 방에서 거실로 출근을 하는 거죠? 거실에 작업 공간을 마련해두었어요.
무조건 작업실이나 다른 공간으로 나가야 작업이 된다고 하는 분도 있던데, 저는 집에서 해도 괜찮더라고요. 제 책들도 다 여기에 있고, 그래서 더 편하게 느껴져요. 테이블, 그 위에 컴퓨터, 옆에는 VR 기계. 이렇게 두고 작업하고 있어요.
미디어 아티스트의 작업실은 아주 미니멀할 수도, 방대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인가요?
항상 미니멀을 꿈꾸지만, 맥시멀에 가까워요.(웃음) 일단 제가 기계를 되게 좋아해요. 작업하며 인터페이스 같은 걸 시도하길 즐기거든요. 입력장치도 사서 해보고, 아두이노 같은 피지컬 컴퓨팅(physical computing) 작업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부품으로 점점 채워지더라고요.
필모그래피를 보니 작가로서 첫 활동은 사진으로 시작했고, 이후 VR이나 영상, 설치 등으로 방식이 다양해지고 있어요. 장비가 많을 수밖에 없겠어요.(웃음)
맞아요. (웃음) 2018년쯤에 사진 작업을 시작했는데, 저는 지금도 제 작업이 일종의 사진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인터랙티브 VR 작업인 <원룸바벨>도 라이다 스캐너(LiDAR Scanner)라는 3D 스캐너를 썼는데, 저는 그 스캐너를 처음 봤을 때 카메라 같다고 생각했어요. 빛을 이용해 공간을 스캔하는 건데, 물론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일단 캡처해서 고정된 공간 데이터를 받는 형식이거든요. 그런 지점에서 그 스캐너가 더 흥미롭게 느껴진 것 같아요. 한편으로 사진을 할 때 사진이란 매체는 좋아하면서도, 단지 평면으로 머무는 이미지를 끄집어내거나 확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이유로 다른 매체를 배워보고 싶었고, 그러다 스캐너를 발견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VR로 작업이 확장된 거고요.
첫 VR 작품이자 대표작인 <원룸바벨>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작업인가요? 원룸과 바벨을 연결 짓게 된 연유가 궁금합니다.
원룸으로 탑을 쌓아보고 싶다, 이런 욕구를 단초로 출발했어요. 누구나 원룸 같은 좁은 공간에 살면 ‘방이 하나만 더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다음은 투룸을 알아보고, 방 개수를 늘려가는 게 바람이자 삶의 주기이기도 한데요. 각자의 원룸을 이으면 아파트가 되고, 거대한 건물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으로 처음에는 확장된 큰 집을 떠올렸어요. 그러다 세로로 계속 쌓아서 탑이 되는 형상이 더 재미있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고요. <원룸바벨>이라는 이름은 수직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다가 나왔어요. 그리고 배경은 심해로 만들고요. 관객은 VR 기기를 썼을 때 원룸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돼요. 그래서 마치 그 안의 일을 모두 이해한 것 같고, 알 것만 같은데, VR 기기를 벗으면 그 공간이 사라져요. 그게 바닷속을 잠수하고 나왔을 때와 비슷한 경험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심해를 배경으로 하면서, 해파리를 찾으며 한 층씩 올라오면 모든 공간을 둘러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게 됐어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실제 원룸에 사는 이들을 인터뷰하고, 이를 통해 획득한 문장들을 작품 안에 남겨두었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신기한 점이 23명의 인터뷰이가 각기 다른 경험을 하면서도 공유하는 일관된 정서가 있는 거였어요. 그건 자기 공간에서 나름대로 삶을 꾸려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여기서 계속 살게 될 것 같다는, 이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어요. 그런 게 지금의 청년 세대가 공통적으로 가진 정서가 아닐까 싶었고, 이 정서를 반영한 문장들을 <원룸바벨> 속 4개의 방에 남겨두었어요. ‘내 집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이곳이 집이 아니라 꾸미지 않고 그냥 산다’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식의 말들을요.
이 작품은 미디어 아트 공모전 ‘2023 프리 아르스 일렉트로니카(Prix Ars Electronica)’ 특별상 수상과 베니스 국제영화제 국제 경쟁 부문에 초청이라는 성과를 이뤘습니다. 어떤 성과를 기대하고 출발한 건 아니겠지만, 이러한 결과들이 작가로서 작업하는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사실 미술 작업이라는 게 전시가 끝나면 더 이상 보여줄 수 있는 장소가 없잖아요. 작가로선 늘 이렇게 열심히 만들었는데, 보여줄 수 있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싶거든요.(웃음) 심지어 저는 VR 작업이니까 아무리 오래 전시해도 일정 이상의 관객을 만나기 어려워요. 그래서 이 작업을 좀 더 많이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출품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얻었어요. 어안이 벙벙하달까요. 결과적으로 많은 분의 주목을 받으면서, <원룸바벨>을 선보일 수 있는 전시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된 게 가장 큰 기쁨이지 않나 싶어요.
다음 시리즈로 <Worlding…>을 발표했습니다. <원룸바벨>을 통해 쌓은 경험을 반영한 작업이라고요.
<원룸바벨>은 헤드셋만 있는 작업이거든요. 그런데 컨트롤러, 즉 손이 없는 상태인데도 관객이 무의식적으로 계속 손을 뻗더라고요. 이를 보면서 VR의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는 손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럼 다음에는 손을 가지고 하는 VR 작업을 해야겠다 싶어서 나온 게 <Worlding…>이에요. <Worlding…>은 플레이어가 거인을 묻는 파수꾼이 되는데요.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핸드 트래킹을 써서, 그러니까 주먹을 쥐고 포인팅을 하면서 땅을 파서 쌓아 올려야 해요. 가상 세계에서 실제 신체를 활용해 노동을 하는 거죠. 그리고 그 결과로 지도가 프린트돼요. 등고선 같은 이미지가요. 이렇게 관람객이 플레이어로 참여해 각자 완성한 지도를 전시장에 붙입니다.
가상의 공간에서 어떤 체험을 한 관람객이 물리적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셈이네요.
VR 작품은 대개 한 번의 체험으로 끝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휘발되는 게 아니라 전시장에 계속 쌓이는 VR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 체험의 흔적을 고민하다가 지도라는 방식을 떠올리게 된 거예요.
그 지도라는 키워드가 확장된 방식이 다음 작품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에 담깁니다.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는 <Worlding…>에서 다룬 지도라는 키워드를 플레이어의 행위로 만든 작품이에요. 이건 VR이나 디지털 게임이 아니라 오프라인 게임인데요. <원룸바벨>부터 공동 기획한 성훈 작가, 김지연 디자이너가 함께한 작업으로, TRPG라는 보드게임을 차용해 만들었어요. 일반적으로 게임을 하면 내가 안 죽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 그래야 게임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TRPG는 다 같이 대화하면서 재미있는 얘기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게임이에요. 저는 그 형식이 흥미롭더라고요. 함께 무언가를 공동으로 만든다는 경험을 게임에서 한다는 게 미술적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차용했고, 방식은 다음과 같아요. 성훈 작가랑 제가 번갈아 퍼포머가 되어 관객과 일대일로 플레이를 해요. 1시간 30분 정도 계속 대화하는 거죠. 예를 들어 지금 눈앞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싸우고 있고, 그 둘 뒤에 리어카가 있다. 원하면 리어카를 봐도 되고 아니면 그냥 지나가도 된다. 이렇게 부여된 상황에서 모든 건 관객이 말하는(선택하는) 대로 돼요. 그리고 그 말의 기록으로 전시장 벽에 설치한 거대한 지도가 점점 채워지는 방식이에요. 말하자면 이 작업은 관객이 받아들이기에 따라 퍼포먼스이기도, 게임이기도, 설치 작품이 될 수도 있는 거죠.
관객이 밀접하게 참여하는 형태의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어요. 그렇기에 관객의 반응이 작업에 미치는 영향이 꽤 클 것 같아요.
특히 <조우를 위한 대화형 지도>를 통해 느끼는 바가 컸어요. 미술에서는 작가와 관객이 작업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대개는 “작업이 어땠어요?” 하고 물으면 “좋았어요” 이러고 도망가는.(웃음) 반대로 생각해보면 제가 관객이어도 그럴 것 같은 거예요. 전시장이라는 공간이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좋았던 게, 1시간 30분 동안 얘기하다 보니 끝나면 관객과 제가 꽤 깊은 라포를 형성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무척 자연스럽게 이 작업에 대한 소회를 공유하게 되고요. 항상 관객이 작업을 플레이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았고, 퍼포먼스 작업을 해보니 관객이랑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수 있구나 싶었어요. 그 전시의 감상이 꽤 오래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VR과 보드게임을 활용한 작업을 하면서 부딪히는 질문이 있을 것 같아요. 이것이 미술인지 아닌지, 창작인지 개발인지에 대해서요.
예술의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챌린지가 따르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에 대한 증명은 작업하는 작가들이 해내야 하고요. 그것이 예술적 매체라는 걸요. 그런데 한편으론 게임도 그렇고 VR도 그렇고, 이게 예술인지 아닌지 얘기하는 것보다 그 매체로 어떤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집중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 행위가 예술적이면 예술이 되는 거죠. 물론 작가 스스로 납득하는 것도 중요해요. 저도 매번 스스로 ‘이걸 왜 VR로 만들지?’라는 질문을 하거든요. 그에 대한 답이 나와야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다음으로 어떤 작업을 준비하고 있나요? 계속해서 연결되고 확장되는 세계가 어디로 나아갈지 궁금합니다.
늘 작업의 출발점에서 제가 다루고 싶은 키워드나 이야기를 관객이 가장 잘 경험하게 하는 매체를 고민해요. 제 작업과 더 밀접해지기를 바라면서요. 이러한 방향에서 <원룸바벨> <Worlding…>에 이은 VR 작품이 11월에 나올 예정이에요. <언리얼리스트의 유럽>이라는 작업인데, 이로써 VR 3부작을 완성할 계획입니다. 기후 위기로 해외여행이 불가능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블랙코미디 형식의 작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리고 <원룸바벨> 때부터 협업한 성훈 작가와 컬렉티브 그룹 ‘교각들’을 만들어서 또 하나의 신작을 만들고 있어요. 버추얼 캐릭터의 안팎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작업이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