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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삶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고, 김은지는 믿었다. 그래서 삼성토탈을 뛰쳐나와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온 마음과 시간을 다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막 성장하는 스타트업이었던 에어비앤비 싱가포르 지사에 입사해 한국 지사 설립 과정을 함께했고, 한국 지사장까지 맡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삶이 회색빛이 되었다. 잡스의 말은 틀렸고, 번아웃이 찾아왔다.

지금까지 믿어 온 모든 것이 번아웃으로 까맣게 타버린 자리에서, 김은지는 새로운 마음을 쌓아 올렸다.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불사조처럼.

‘번아웃을 지나 점점 푸르게’ 저자 김은지. © 본인 제공

‘번아웃 신드롬’은 이제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말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게 내 얘기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 지금 번아웃이구나’를 명확하게 느낀 순간이나 증상이 있었나요?

번아웃이 아니었을 때는 아무리 일이 많고 힘들어도 재미있었어요. 내가 만들어 내는 성과를 보는 게 좋았고,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늘 살아있었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긴 휴가를 받아 충분히 쉬어도 마음에 기운이 없더라고요. 삶에서 다양한 색이 사라지고 무채색만 남은 느낌이었어요. 그때, 내가 단순히 피곤하고 지친 게 아니라 심각한 번아웃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실패지점까지 운동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흔히 포기하고 싶은 그때가 바로 성장하기 직전이라고도 하고요. 하지만 이런 말이 우리를 번아웃으로 몰고 가기도 하죠. 성장통과 번아웃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자기가 결정권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번아웃을 잘 겪지 않는다고 해요. 내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 성장할 수 있고,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 확실하면 번아웃에 빠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반대로 열심히 일했는데 계속 실망이 쌓이면, 신체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소진되어서 번아웃이 올 수 있고요.

그러니 적절한 환경에서 내게 맞는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는지, 내 노력이 나에게 필요한 물질적·정서적 보상과 잘 연결되는지 확인하면서 속도를 조절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열심히 운동하면 근육이 생기기도 하지만, 내 몸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 무리해서 운동하면 근육이 파열되기도 하잖아요.

에어비앤비에서 김은지 작가는 ‘꿈에 그리던, 완벽한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 본인 제공

영혼을 소진해 가면서까지 일하는 우리는 일중독일까요, 성취감 중독일까요?

둘 다일 확률이 높겠죠? 많은 현대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일에서 성공해야만 쓸모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집단으로 세뇌당하고 있다고 봐요. 일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거죠.

우리가 일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역사에서 일이 인간의 삶에서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기간은 아주 짧아요. 로마 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일은 계급이 낮은 사람만 하는 거였으니까요. 미래에는 어떨까요? 전 지금 인간의 일자리를 앞으로는 대부분 로봇과 AI가 채울 거로 생각해요. 그럼 오직 일로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일에 대한 과한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면 좋겠죠. 그렇지만 ‘꿈의 일자리’를 찾는 것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려 하는 게 훨씬 더 건강한 선택이라 생각해요.

나의 욕망이 세상의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인지, 진짜 내 안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작가님이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사용했던 기준이 되는 질문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종종 저 자신에게 ‘이 삶을 통해 내가 경험하고 배우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꼭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고요. 사람들 속에 있으면 어떤 에너지에 휩쓸려서 일을 벌이거나, 내가 원하지도 않는 역할을 맡게 될 때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조용한 자연 속을 산책하면서 자신에게 질문해요. 때로는 혼자 글을 쓰기도 해요. 그럼 다른 사람의 욕망이 투사되지 않은 나만의 답을 만날 수 있더라고요.

번아웃을 경험한 후, 귀촌하여 존재의 기쁨을 충실히 누리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누군가는 이를 ‘이미 충분한 경제적 안정을 확보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삶’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주는 안정감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느린 삶을 살고 싶어도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분들도 있죠. 그런데 저의 경우는 내 욕망이 아닌 것들을 깨끗하게 포기했기 때문에 귀촌하고, 풀타임에서 파트타임 재택근무로 일의 모양을 바꾸고, 좀 더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조금 덜 일하고 덜 버는 대신 좀 더 시간이 많고, 한적한 삶을 선택한 거죠.

물론 제 삶의 모습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각자가 원하는 삶의 모습은 모두 다르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골에서 조용하고 한적하게 삶이 좋은데 또 누군가에게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결국 내가 어떤 삶을 선택하는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의 책임이고, 그렇기에 거기서 벗어날 힘도 나에게 있다고 언급하셨죠. 번아웃 앞에서 무기력하게 자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책임지는 삶으로 향하는 첫걸음은 어떻게 뗄 수 있을까요?

꾸준히 일기를 쓰는 걸 추천하고 싶어요. 저는 긴 번아웃을 겪으면서 번아웃의 책임을 계속 회사나 사회 같은 외부에서 찾았어요.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일기를 쓰다가 깨달았어요. ‘책임의 주체를 바깥에서 찾으려고 하니까 내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거구나.’ 번아웃의 궁극적인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면 문제를 해결할 힘도 내게서 나온다는 걸 알게 돼요. 사실 이걸 인정하는 게 힘들기는 한데요. 일기를 쓰면 한 걸음 떨어져서 내 상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니까 도움이 되더라고요.

김은지 작가가 써온 일기. © 본인 제공

계속 더 많은 일, 더 큰 일을 벌이는 것만이 도전이 아니라는 메시지가 인상적입니다. 성취로 나를 증명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는 데 도전하려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일로 나를 증명해야 한다고 믿었을 때는 일을 잘하고 무언가를 성취해야만 쓸모 있는 인간, 사랑받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어요. 성취하고 도전하는 건 좋아요. 하지만 그걸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인간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가치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대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삶을 채워 가고 계신 지금, 작가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예전에는 늘 ‘5년, 10년, 20년 뒤에 무엇이 되고 싶다’는 식의 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는 않아요. 대신 저는 이번 삶에서 좀 더 성숙하고 가벼운 사람으로 나이 들어가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하고, 공부하고, 좋은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