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계절 가을. 여행 가는 길에 읽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한 책 4.

김연덕 <폭포 열기>

‘조용한,// 근섬유의, 사나운,// 그런 아름다움 앞에 말을 잃기 위해서만 가끔/ 사는 것 같아.’ 김연덕의 새 시집 <폭포 열기>에 수록된 ‘나의 레리안’의 첫 구절이다. 시집 <폭포 열기>에는 어떤 용기가 있다. ‘나’라는 공고한 성 안에서 느끼던 안전함을 내려두고, 폭포와 같은 거대한 에너지를 가진 ‘바깥’으로 향하려는 마음. 기꺼이 타인을 끌어안고 새로움으로 뛰어드는 의지가 거기에 있다. <폭포 열기>의 여러 시편 중에서도 앞서 언급한 ‘나의 레리안’을 읽으며 여행의 문을 열려고 한다. 사실 여행지에서 낯선 풍광을 보고 있어도, 어떤 ‘머리 아픈 기억’은 부끄러움을 동반한 채 우리를 습격하곤 한다. 하지만 이 시는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내내 끝나지 않던 한 순간이 약한 섬광과 함께 죽어버리는 것 오래된 1초를/ 죽이는 것’이라고. 여행을 통해 ‘내내 끝나지 않던’ ‘오래된 1초를 죽이고’ ‘깨끗한 기분을 몇 초간 느끼’고 싶다. 그런 섬광과 같은 아름다움을 목격하길 바라며 고성으로 향할 것이다.

박솔뫼 <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 좋은 일이 일어남>

여행의 마지막 날엔 좋은 책을 읽다가 잠에 들고 싶다. 그러니 박솔뫼 소설가의 <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 좋은 일이 일어남>을 읽다 잠들어야만 한다. 이 책은 박솔뫼가 좋아하는 소설에 관한 에세이다. 로베르트 볼라뇨부터 리처드 브라우티건까지. 박솔뫼는 자신이 애정을 품은 작가와 그들의 소설,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깊은 사유를 담되, 투명하고 덤덤하게. 도착지를 정해두지 않고 산책하는 사람처럼 글을 밀고 나가는데, 그걸 따라가다 보면 좋아하는 마음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이야기의 힘이 어찌나 거대한지 새삼 느낄 수 있다. 박솔뫼가 에세이에 쓴 마이조 오타로의 소설 제목을 한 번 더 빌려 표현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좋아좋아 너무좋아 정말 사랑해’의 상태가 된다고.

임유영 <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다>

나는 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나? 생각해보니 꽤 많다. 마감 후 귀가하는 내 가방엔 매번 맥주나 와인이 들어 있었고, 그것으로 모자랄 땐 친구들을 불러내 소주를 들이켜야 지난했던 한 달과 이별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임유영 시인의 새 책에 마음이 절로 이끌린다. 12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참여하는 ‘시의적절’ 시리즈의 열 번째 책으로, 임유영 시인이 한 달간 매일 쓴 글들을 10월이라는 테마 아래 엮었다. 시와 에세이부터 메모까지, 그가 자유로운 형태로 써내려간 글은 사진, 회화, 음악, 영화 등 예술 전반을 다룬다. 일상 가까이의 예술을 누리는 삶에 취하고 싶은 가을밤, 위스키 한 잔을 곁들이며 읽어보려고 한다. 음악은 임유영 시인이 직접 고른 곡들을 틀 생각이다. 유튜브에 업로드된 그의 플레이리스트 제목은 이렇다. ‘술보다 좋은 게 있는 것도 같아.’

한강 <희랍어 시간>

마감하는 사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언제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지’ 싶다가도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하며 소스라친다. 이틀 사이 그의 책이 50만 부나 판매되었다. 이 요란스러운 행렬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여행길에 한강 작가의 책을 가져가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 인생의 책을 묻는다면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대번에 꼽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두 책의 첫 장을 다시 열려면 바위 같은 용기가 필요하니까. <희랍어 시간>은 그의 작가적 정체성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와 소설의 경계를 아름답게 넘나든다. 분량은 비교적 짧지만 유려한 문장에 감탄하고 복기하느라 시간이 꽤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순간을 그린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깨끗해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