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더 쉬운 선택지일 때,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와 함께일 수 있을까. 여기, 5명의 젊은 여성 소설가가 ‘함께함’에 대한 짧은 소설을 보내왔다. 나라는 공고한 벽을 허물 때 우연히 마주하는 장면, 누군가를 떠올릴 때 느껴지는 온기, 서로를 돌보며 확장되는 삶. 이제 우리는 안다. 함께함이 동반하는 수고로움이 때때로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을. 나를 구원하는 건 결국 우리라는 것을.

<사는 맛>

서이제

2018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0%를 향하여》 《낮은 해상도로부터》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 등이 있다. 제12회, 제13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관문에서 전단지를 떼어냈다. 아직도 전단지를 뿌리는 가게가 있구나. 집 안으로 들어가며 대충 훑어보니, 중국집 광고였다. 배달 앱을 이용하지 않고 가게로 직접 전화하면 짜장면 한 그릇에 오천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짜장면이 오천 원밖에 안 한다고? 순간 혹했지만, 당분간 집에서 밥을 먹을 일이 없을 것 같아 문 앞 쓰레기통에 전단지를 버렸다.

나는 신발을 벗자마자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제야 비로소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병원에 출근한 지 이제 막 보름이 지나고 있었다. 아직은 간단한 데스크 업무를 보는 게 전부였지만, 왜 이렇게 맨날 피곤한지. 아무래도 사람을 상대하느라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다. 더군다나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내게는 부담이 되었다. 그게 뭐가 문제냐 싶겠지만, 나처럼 아침잠이 많은 사람에게는 고행이나 다름없다. 아마 저혈압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알람을 듣고도 쉽게 깨어나지 못했고, 일어나더라도 오전 내내 정신이 또렷하지 않았다. 이런 내가 하필이면 병원 오픈을 맡게 되다니….

우리 병원은 오전 8시에 진료를 시작한다. 출근 시간은 7시 반이지만, 우리 집에서 병원까지 40분 거리였으니 늦어도 6시 50분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나는 거의 매일 퉁퉁 부은 얼굴에 머리를 덜 말린 채로 지하철에 올라탔다. 미처 화장을 하지 못하고 나온 적도 종종 있었다. 그런 날에는 선크림만 대충 바르고 출근해 화장실이나 탈의실에서 남몰래 파운데이션을 발랐다. 그러다가 한편은 맨얼굴로 박 원장님을 마주쳤다. 박 원장님은 얼마나 부지런한지, 지난주 목요일에는 나보다 일찍 병원에 나와 직접 셔터 문을 올렸던 것이다. 내가 게을러 보였을까, 아니면 한심해 보였을까. 그날은 지각을 한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하루 종일 눈치가 보였다.

다음 날, 어김없이 알람이 울렸다. 역시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때 갑자기 벽이 쿵- 하고 울렸고, 거의 동시에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내 알람 소리에 옆집 사람이 화가 났나?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눈이 번뜩 뜨였다. 얼른 알람을 껐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니, 그는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울먹이며 누군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다른 목소리는 들리지 않은 걸 보아 아마 전화를 하는 듯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일로 이 이른 새벽에 전화를 붙잡고 화를 내는 걸까. 목소리는 점점 고조되었다. 그러다가 이내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서럽게 우는 소리는 처음이었다. 나는 이불 속에 가만히 누워 그 울음소리를 들었다. 울음은 오래도록 그칠 줄 몰랐다. 어느새 창문 밖으로는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병원은 오전부터 환자들이 몰렸다. 더군다나 오늘은 진료 안내에 진상 환자들까지 상대하느라 혼이 쏙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점심시간에 진료를 봐주지 않는다고 소란을 피우는 환자가 있었고, 오후에는 진단서 발급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환자와 실랑이가 있었다. 진단서를 발급받은 또 다른 환자는 차가운 말투로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 간호사 말로는 우리 병원에 오랫동안 다닌 환자라고 했다.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걸핏하면 진단서를 떼어 간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이곳저곳이 아프고 힘이 없다며 매번 링거를 맞는다고, 링거 주사를 놓으려고 소매를 걷으면 자해의 흔적들이 수십 개도 넘게 있다고 했다. 팔목에는 검은 나비 문신이 있는데, 아마 자해의 흔적을 가리기 위한 것 같다고도 했다. 그는 정말로 죽으려고 했던 걸까.

그 순간 불현듯, 서럽게 울던 그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지금쯤 그는 안정을 되찾았을까. 마음이 좀 나아졌을까. 아까 아침에 씻고 나올 때는 옆집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그사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건 아니겠지. 순식간에 끔찍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함부로 그런 상상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나는 현관문을 열다가 잠시 옆집 문을 바라보았다. 그 문은 항상 굳게 닫혀 있었다. 관심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지금껏 옆집에 사람이 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저기에는 누가 살고 있는 걸까. 뭐 하는 사람일까. 내 나이 또래일까. 언제부터 저기에 살고 있었을까. 새삼 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주 어릴 때는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살았는데. 떡이나 수박 같은 것들을 나눠 먹기도 하고, 이따금 망치 같은 공구를 빌려 오기도 했는데. 우리 집이든, 옆집이든,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고 지냈고, 그 문을 통해 인사를 나누곤 했는데. 이제는 옆집 문을 두드리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거두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목욕을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면서 맥주를 마셨다. 유튜브를 봤지만 딱히 흥미를 끄는 게 없었다. 볼 만한 것이 더 없을까 스크롤을 내려보았다. 부동산 위기와 심각성을 다룬 영상과 Z세대 트렌드를 분석한 영상이 나란히 떴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전쟁 소식을 알리는 뉴스와 스페이스 엑스의 우주선 시험 비행 영상도 있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특수 청소부 브이로그를 발견했다. 차마 그것을 누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영상을 보지 않더라도, 어떤 장면들이 이어질지 그려졌기 때문이다. 방 안에 스며든 짙은 혈흔과 구더기 사체들, 집 안 곳곳에 남겨진 고독의 흔적들. 나는 고개를 들어 텅 빈 벽을 바라보았다. 고요가 무섭게 느껴졌다. 옆집 사람이 작은 기척이라도 내어줬으면 좋겠
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오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그래서 그런지 병원은 평소와 다르게 한적했고, 나는 그게 좋지만은 않았다. 자꾸만 잡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어제는 옆집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는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잘 지내고 있다면, 어째서 나는 그가 집을 나서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지. 그가 외출했는지 알 수 있도록, 문틈에 작은 종이나 실이라도 끼워놓을까. 음식을 너무 많이 했다면서 팬케이크나 부침개라도 들고 가볼까. 그렇게 문이라도 두드려볼까.

나는 간호사에게 그 일에 대해, 그러니까 옆집 사람이 서럽게 울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서럽게 우는 건 처음 들어봐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 봐 걱정돼요. 간호사는 별일 없을 거라며 나를 안심시켜주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샘솟는 불안은 쉽게 잠재울 순 없었다.

비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나는 역에서 내려 우산을 쓰고 걷다가, 과일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가판대에 귤 바구니가 진열되어 있었다. 벌써 귤이 나오다니, 벌써 그런 계절이 왔다니. 작고 귀여운 귤을 보니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런데 왜였을까. 그 순간 귤이 내게 용기를 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손에 귤이 있다면, 내가 그것을 꼭 쥐고 있다면, 엄마가 귤을 한 박스나 보내줬지 뭐예요, 하고 말을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아서 조금 가져왔어요, 날씨가 쌀쌀해지면 귤을 까먹어야죠, 역시나 그게 사는 맛 아니겠어요, 아무쪼록 감기 조심하세요, 하고 안부를 전하며 그의 안색을 살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귤을 많이 샀다. 아주 많이.

나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귤 한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서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너무 늦은 시간에는 문을 두드릴 수 없었으니까.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신발과 바지가 다 젖은 상태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서 문을 두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니, 귤을 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는 우산을 접고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복도 불이 켜졌을 때 나는 멈칫했다. 그의 집 앞에 빈 짬뽕 그릇 하나가 놓여 있던 것이다. 며칠 전에 현관문 앞에서 떼어냈던 전단지가 떠올랐다.

그래, 맞아. 오늘은 비가 오는 날이었지.

빈 그릇은 나를 안도하게 했다. 그리고 이내 헛웃음이 나왔다. 그를 걱정하느라 불안해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져서가 아니라, 옆집 사람이 귀여워서. 마치 내가 사 온 귤처럼 귀여워서. 옆집 사람은 잘 울고 잘 먹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서럽게 울다가도 비 오는 날이면 짬뽕을 챙겨 먹는 것은 잊지 않는 사람이구나. 그 별것 아닌 사실이 나를 웃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