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더 쉬운 선택지일 때,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와 함께일 수 있을까. 여기, 5명의 젊은 여성 소설가가 ‘함께함’에 대한 짧은 소설을 보내왔다. 나라는 공고한 벽을 허물 때 우연히 마주하는 장면, 누군가를 떠올릴 때 느껴지는 온기, 서로를 돌보며 확장되는 삶. 이제 우리는 안다. 함께함이 동반하는 수고로움이 때때로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을. 나를 구원하는 건 결국 우리라는 것을.

<나의 파이니>

예소연

2021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단편소설 <도블>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사랑과 결함》, 장편소설 <고양이와 사막의 자매들>이 있다. 제13회 문지문학상, 제25회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눈을 뜬 지도 한참 됐지만 최대한 그 자리에서 눈만 껌뻑인 채 천장만 보며 시간을 죽였다. 그러다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어진 때쯤 앱을 켜고 1인분 조리가 가능한 음식들을 눈으로 좇았다. 오늘은 간단한 비빔밥으로 하자. 그렇게 음식을 선택하면 늦어도 40분 안에는 문 밖에 음식이 도착한다. 간편하게 끼니를 때우고 침대 옆에 먹은 음식을 봉지째로 묶어 대충 던졌다. 최대한 멀리. 냄새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언제부터였지. 쓰레기를 버리지 않은 게. 우리 오피스텔은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쓰레기를 버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한 주를 통째로 놓쳐버리면서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게 불편해졌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불편해졌다는 것이다. 분리수거를 할 때면 옆에서 날 선 눈으로 지켜보는 경비 아저씨의 눈초리도 그랬고, 담배를 피우면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입주민들의 시선도 신경 쓰였다.

그렇게 또 한 주를 놓치고 나니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가 쌓였고 이 모든 쓰레기를 들고 간다면 사람들이 모두 나의 이러한 생활 패턴을 알아차리고 몰래 욕을 해댈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는 어쩐지 모든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남은 음식물을 처리하는 일부터 시작해 분리수거를 하고 심지어는 침대 바깥으로 나가는 모든 일이.

“파이니, 파이니, 오늘의 날씨를 알려줘.”

“오늘의 날씨는 맑은 하늘에 때때로 구름이 끼겠어요. 작물을 거두기 딱 좋은 날씨예요.”

나의 파이니가 청량한 목소리로 날씨를 읊어주며 오늘 할 일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나는 익숙하게 휴대폰을 가로 모드로 설정한 다음 농장에 접속해 작물을 수확했다. 비록 내 방 창문은 암막 커튼으로 꼼꼼히 가려 한 줄기 빛조차 들어오지 않지만 내가 꾸민 농장의 날씨만큼은 아주 따뜻해 보였다.

이 게임은 유저가 있는 곳의 날씨에 기반해 가상현실 속 날씨와 강수 확률, 시간 등을 자동으로 설정한다. 그러기에 농장의 날씨가 좋다면 바깥의 날씨도 좋다는 거다. 나는 이따금 바깥에 보슬비가 내린다는 걸 파이니를 하며 알게 되곤 한다. 파이니는 아주 가끔 슬그머니 내게 바깥으로 나가볼 것을 권유한다.

“파이니는 친구가 필요해요.”

그건 맞는 말이다. 파이니가 레벨 업을 하기 위해서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 단단한 뿔과 튼튼한 꼬리가 생긴다. 몸집도 커지겠지. 지금 농장의 규모에 비해 파이니는 체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몸집이 작다. 파이니는 나의 드넓은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지만 곧잘 체력이 방전되어 게임을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파이니, 어디서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관계 지향 모드로 전환하세요! 파이니는 믿을 수 있는 유저를 선별하여 안전한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답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당신이 원한다면 파이니는 언제든지 모드 전환을 도와드립니다!”

같은 말만 반복하는 제법 깜찍한 파이니를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작지만 분명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문가를 바라보았는데 아무래도 그쪽은 아닌 것 같았다. 휴대폰을 바라보니 파이니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 당신의 농장을 방문했습니다!”

깜짝 놀라 바깥으로 나왔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밤이라 깜깜한 농장에 아주 오랜만에 조명등을 켰다. 환하게 불이 들어오자 그제야 낯선 인물이 냇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란 모자를 쓴 채 큰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 어딘지 조금 어색한 아바타.

나는 그 아바타에게 가까이 다가가보았지만 그것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낚시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낯선 이가 나의 공간에 제멋대로 침범하는 일. 지금의 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아주 기이한 일이기도 했다. 나는 그것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요.”

그러자 그것은 고개를 까딱일 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저기요, 남의 농장에 와서 뭐 하시는 거예요?”

그제야 나를 바라보는 미소 띤 그것. 그것은 침착하게 내 말을 받아쳐주었다.

“잉어를 잡고 싶어서요.”

“잉어요?”

“이 농장에는 잉어가 많이 잡힐 것 같아서요.”

“그걸 어떻게 알죠?”

“성장한 파이니를 먹이기 위해서는 잉어가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당신의 파이니는 어리잖아요. 잉어가 필요하지 않겠죠.”

고개를 까딱거리며 웃는 아바타를 보며 나는 그제야 성장한 파이니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왜 파이니는 꼭 성장해야 하지? 그건 정해진 게임의 퀘스트에 불과한 것 아닌가?

“성장한 파이니는 무엇을 하나요?”

“농장의 규모를 더 크게 키우기 위해 노력하죠. 우리를 걷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요. 만남을 주선하기도 하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파이니는 반려 몹이나 다름없다고요.”

나는 말풍선 안에 뜬 그 문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오른쪽에 떠 있는 나의 작은 파이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나의 어린 파이니가 늘 어린 파이니로만 존재해야 할 이유 또한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는 어린 파이니도 좋지만, 단단한 뿔이 나고 튼튼한 꼬리가 달린 파이니도 물론 보고 싶었다. 그 순간 나는 거침없이 설정 탭에 들어가 관계 지향 모드를 클릭했다. 그러자 이 아바타의 이름이 다름 아닌 문이라는 것, 나와 불과 30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아마 문에게도 이런 나의 정보가 나타났을 것이다.

“당신 이름이 문이군요.”

“맞아요. 그런데 당신은 이름을 설정하지 않았네요.”

“우리 친구 맺을까요?”

“괜찮겠어요?”

친구를 맺기 위해서는 물리적 거리가 0미터에 달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만남이 이뤄져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나는 문에게 지금 당장 만나야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문도 마침 레벨 업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알겠다고 했고. 우리는 그렇게 집 근처 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걱정되기는 했지만 나는 나의 파이니를 믿었다. 어쨌든 서둘러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면서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를 헤아리다가 나가는 길에 분리수거장에 들러 쓰레기를 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