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바람결에도 구겨지지 않을 기백을 지닌 채, 빼꼼 고개를 내미는 희망을 찾아 한 해를 살아내기 위해.
시작하는 마음을 충만하게 해줄 1월의 책.

임지은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

새해 첫날은 작가 임지은의 글로 열고 싶다. 그의 세 번째 산문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 하여>는 무언가 이유 없이 싫어지는 날마다 그 마음을 가만히 응시해온 이의 수고로운 기록이다. “크고 균질한 사랑이 대세이자 미덕”인 세상에서, 기어코 좋은 것의 뒷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마음. 나 역시 자주 그런 마음이 되어버려서, 그런 스스로를 감당하기 곤란할 때마다 임지은의 문장을 찾게 된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가 내내 가장 아끼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자연스레 알게 된다. 싫어하는 마음은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또 무엇을 지키고 싶어하는지를 설명해주기도 하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것, 욕망하는 것 앞에서 결코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런 스스로가 “찌질하고 옹졸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 그 자명한 진실을 받아들이며 한 해를 시작하면 나를 조금 더 잘 견디게 되지 않을까 싶다.

최재원 <백합의 지옥>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로 최재원 시인이 문단에 등장했을 때, 그의 기백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일상 속에서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종이 위로 스스로를 밀고 나가 그 자체로 시가 된 사람 같았다. 두 번째 시집 <백합의 지옥>이 나왔을 때는 4백23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에, 시 속에서 언어들이 엉키고 뒤집히고 충돌하며 뿜어내는 에너지에 압도당했다. 삶에서 말을 발견 하고 또 글로 쓰며 시인이 보냈을 시간을 생각하면 아득해졌다. 새해 첫날에는 <백합의 지옥>에 수록된, 한 편이 무려 1백58쪽에 달하는 시, ‘목련은 죽음의 꽃’을 읽으려 한다. 5편의 시가 한데 모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읽다 보면 거대한 공연장에서 여러 명의 배우가 동시에 말을 건네는, 일종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삶과 죽음 그리고 상실이 무수히 반복되는 인생이라는 여정에 대해 고뇌하는 시라고 표현하고 싶다. 하나의 질문을 붙들고 끝까지 돌진하는 의지, 언어의 거대한 힘에 무력해지지 않은 채 멈추지 않고 쓰는 마음을 <백합의 지옥>을 읽으며 얻고 싶다.

이수명 <내가 없는 쓰기> <정적과 소음>

텍스트에 파묻혀 있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건 무거운 일상과 자의식에서 도망쳐 아름다운 문장 안에서만 살길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이수명 시인의 산문집 <내가 없는 쓰기> <정적과 소음>은 매우 소중하다. 시인은 ‘아무것도 아닌 글을 쓰고 싶은’ 욕구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문학화시킬 필요가 없는 평평한 순간들, 어떠한 의미도 들어서지 않는 평이한 순간을 유지하려는 시도라고 말이다. 2편의 산문집은 <내가 없는 쓰 기>라는 제목처럼 ‘나’의 바깥에 시선을 둔다. 소파, 수건, 물병, 지붕 등 일상적이고 사소한 세계를 가만히 응시한다. 의미를 부여하거나 감정을 의탁하지 않은 채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바라보고 수용하는, 그 숭고한 태도가 이 두 권의 책에 담겨 있다. 오래도록 시와 시론, 산문을 넘나들며 ‘나’에게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지속해온 이수명 시인이 포착한 순간을 따라가다 보면, 더욱 가볍고 희미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와 저기를 넘어, 글 안에서 더욱 둥글어지길 바라며 새해에는 이수명의 산문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