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감’이라는 말이 넘쳐나는 시대. 청각과 시각을 모두 사로잡아야 하는 K-팝 씬의 특성 상 대형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팀들의 고민과 감각은 더 첨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틈새에서 자신들만의 미학을 발굴하고 있는 5팀의 걸그룹.

리센트(RESCENE), K-팝의 프루스트 효과

2024년 3월 26일 데뷔한 리센느(미나미, 리브, 제나, 원이, 메이)의 콘셉트는 명확합니다. 바로 ‘향기’ 인데요. 향기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는 개념인 프루스트 효과를 음악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만큼 앨범마다 각기 다른 향기를 주제로 음악에 녹여내 선보이고 있죠. 처음 이 팀에 관심을 갖게 됐던 건 두 번째 싱글에 포함된 곡 ‘Mood’의 아카펠라 버전 영상이었어요. 특별한 효과없이 청량하게 울려 퍼지는 멤버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자연스럽게 비 오는 초여름 오후의 가벼운 흙 냄새와 익숙한 수풀향이 연상 되더라고요. 이 때는 팀 콘셉트를 알지 못했던 때였는데도 말이죠.

데뷔 초 ‘틴 프레시’ 향수 시향지를 앨범에 넣었던 스테이씨나 콘서트에 향을 퍼뜨리는 효과를 썼던 태연, 투모로우바이투게더처럼 K-팝 아티스트들이 ‘향기’를 매개체로 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청각을 후각으로 감각화해 콘셉트를 잡아가는 팀은 리센느가 최초입니다. 개연성있으면서도 차별화된 기획력을 매번 선보여야 하는 K-팝 씬에서 이런 전략은 꽤 유효하죠. ‘향’이라는 주제 하에 설득력있는 콘셉트를 풍부하게 선보일 수 있으니까요. 리센느가 소속된 더뮤즈엔터테인먼트는 신생 기획사입니다. 기획사 대표님 이주헌을 비롯해 경영진 모두 버클리 음대 출신으로 알려져 있죠. 다양한 콘셉트를 겨냥한 양질의 곡들이, 향을 콘셉트로 시각화 되는 즐거운 경험을 제공합니다.


다른 향을 만날 때 시너지 되는 ‘앰버그리스향’을 테마로 한 첫 번째 EP ‘SCENEDROME’, 친근하면서도 맑은 ‘비누향’을 형상화한 두 번째 싱글 ‘Dearest’, 베리 향들을 테마로 한 세 번째 미니 앨범 ‘lip bomb’을 거쳐 지난 4월 8일 발매된 싱글 ‘Runway’의 테마는 스산한 공기와 연기를 연상하는 ‘인센스’향이었습니다. 그동안 밝고 행복했던 소녀들이 신비로운 콘셉트로 변모한 ‘Runway’ 뮤직 비디오는 ‘향기’라는 일관성 안에서 한층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며 리센느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죠. 무궁무진한 향의 세계처럼, 리센느가 아티스트로 보여줄 다음 세계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코스모시(cosmosy), 소녀들은 뭐든 될 수 있다

XG의 성공 이후 일본에서는 파워풀한 안무와 화려한 비주얼, 트렌드를 반영한 음악 등 K-팝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이식한 걸그룹이 모습을 속속 드러내고 있습니다. 챤미나가 프로듀싱한 하나(HANA)가 보디 포지티브하고 일상적인 메시지를 전한다면, 4월 11일 데뷔한 코스모시(히메샤, 디하나, 카미온, 에이메이)는 서브컬처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합니다. 우주를 의미하는 ‘COSMOS of Youth’의 약자인 팀명에서 짐작 가능하듯 멤버들은 여고생, 아이돌, 미소녀 전사라는 3개의 정체성을 오가며 아이돌 데뷔와 우주를 구하는 운명에 도전할 정도죠.

멤버 네 명 모두 일본인이지만 블랙핑크 탄생에 관여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는 YG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출신 신성진(Sinxity)이 참여하고, 한국에서 트레이닝을 받은 코스모시의 곡과 콘셉트에 혼재되어 있는 것은 학생과 미소녀 전사를 오가는 정체성 뿐만 아닙니다. 일본어와 한글이 곡 안은 물론이고, 주요한 영상 텍스트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돼요. 영어는 물론이고요. 하긴, 아무래도 우주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 국경은 너무 미미한 요소이긴 하죠!

데뷔곡이었던 ‘zigy=zigy’가 학교에서 전투를 펼치는 소녀들의 모습을 담았다면 ‘Lucky=one’은 미소녀전대물(특촬물)을 연상 시킵니다. 앞의 두 곡처럼 첫 번째 EP ‘the a(e)nd’ 앨범의 곡들 다수가 가진 아프로팝 스타일과 강렬한 사운드는 어쩐지 블랙핑크의 초창기 곡들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었는데요. 지난 3월 발매된 두 번째 EP ‘~ of the world ~’의 수록곡들은 하우스와 팝 등 훨씬 가볍고 산뜻한 노선을 택했습니다. 싱글로 공개된 ‘Silence ~ body & soul ~’도 마찬가지죠. 강렬한 비주얼과 달리 곡 자체는 하우스 비트와 신스 사운드가 돋보입니다.


코스모시는 일본 최대의 통신사인 NTT 도코모 스튜디오 앤 라이브에서 제작한 걸그룹입니다. 일본 팬들도 ‘엔터테인먼트외 대기업에서 이렇게까지 좋은 K-팝 그룹을 만든 건 도코모가 처음인 것 같다’라며 코스모시의 기획력에 높은 점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코스모시는 뉴욕 스포티파이 본사 공연부터 태국 페스티벌, 일본 도쿄 걸즈 컬렉션 무대에 선 것에 이어 최근 알렉산더 왕과의 협업으로 뉴욕 패션 위크에 다녀오기도 했는데요. 범우주를 가로지르는 코스모시의 여정은 계속 지켜볼만 합니다. 일단 노래와 영상, 앨범 아트까지, 비주얼이 너무 재미있거든요!
앳하트(AtHeart), 조금 이상한 소녀들의 기묘한 이야기

지난 8월 13일에 정식 데뷔한 앳하트(미치, 아린, 케이틀린, 봄, 서현, 아우로라, 나현)의 소속사 타이탄콘텐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 받았습니다. 첫 번째는 소녀시대, SM을 떠난 이후 더보이즈를 론칭하며 독보적인 리더십을 펼쳐온 강정아 대표의 걸그룹이라는 점, 두 번째는 처음부터 미국 LA에 자체 스튜디오와 지사를 냈다는 점이죠. 이들의 미국 유통은 리퍼블릭 레코드가 맡고 있어요. 멤버들의 국적은 또한 다채롭습니다. 한국, 일본 멤버는 물론 필리핀 출신인 케이틀린, 하와이 출신으로 미국과 일본 혼혈인 미치가 다양한 색을 더해요.
하지만 프리 데뷔 곡 ‘Good Girl’ 이후 앳하트의 음악은 캣츠아이보다는 소녀시대와 레드벨벳이 뒤섞인 감성을 조준합니다. 초기 소녀시대처럼 파스텔 컬러가 연상되는 순수한 이미지를 가지면서도, 어쩐지 레드벨벳 같은 기묘한 위화감이 있죠. 데뷔 EP ‘Plot Twist’의 타이틀곡인 ‘Plot Twist’는 아름다운 아카펠라 사운드로 시작해 멜로디컬한 보컬이 내내 쌓이지만 몸을 기이하게 비트는 안무나, 멤버들의 손에 쥐어진 수류탄과 도끼 같은 이미지들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하트(Heart)’라는 직관적이면서도 음악적으로도, 비주얼적으로도 변주할 요소가 많은 키워드를 팀명으로 내세운 것도 좋은 전략입니다. 최근 선보인 두 싱글 ‘Shut up’과 ‘Butterfly Doors’은 비주얼적으로는 조금 더 캘리포니아걸 바이브가 더해졌지만 풍성한 멜로디와 쌓아올려진 화음,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한 보컬 등이 조화롭게 만들어내는 기분좋은 사운드는 여전해요. 한때 많이 인용됐던 ‘이지리스닝’의 성공 공식에서 지금 앳하트의 사운드는 가장 그 적확한 후예입니다. 그것도 훨씬 발전한!


베이비돈크라이(Baby DONT Cry), 공감 가능한 달콤 쌉싸름함
2025년 6월 싸이의 피네이션에서 선보이는 최초의 걸그룹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4인조로 데뷔한 베이비돈크라이(이현, 쿠미, 미아, 베니)는 데뷔 10개월에 접어든 현재 자신들의 색을 완전히 찾은 것 같습니다. “학교는 지겹고 공부는 지루해, 친구는 즐겁고 엄마는 피곤해”라며 A부터 F까지 나를 평가하는 세상을 못마땅해했던 ‘F Girl’과 역시 첫 싱글 수록곡이었던 ‘지금을 놓치면 분명 넌 후회할 거야’로 보여준 당당함과 하이틴 감성은 유지하되 조금 더 ‘착한 아이’가 되기로 한 것이죠.

지난 11월 발표한 디지털 싱글 ‘I DONT CARE’가 교복을 입고 경쾌한 팝 록 사운드를 소화했다면, 이번 3월 선보인 첫 번째 미니 앨범 ‘After Cry’의 타이틀곡 ‘Bittersweet’ 뮤직 비디오는 학원, 아파트 계단, 지하철 등에서 홀로 있는 멤버들의 모습을 담습니다. 뮤직 비디오 첫 장면에 등장하는 베니가 엄마에게 문자 답장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이모티콘을 보내는 모습이나, 혼자 눈물 흘리는 장면들은 누구나 공감할 만 하죠. “내가 제일 좋아하던 모든 것들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영원한 건 없다고 다이어리에 쓰면서 그때 나는 외로움을 알아버렸어” 같은 가사도 마찬가지고요.

트리플에스(TripleS)의 소녀들도 아파트 단지와 거리, 지하철역을 종횡무진 다녔지만 노래방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최대치의 일탈인 듯한 ‘Bittersweet’ 속 베이비돈크라이의 모습에, 아마도 대다수의 소녀들은 자신을 대입하기 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한발 앞서 공개한 ‘Shapeshifter’에서는 자유자재로 모습을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 또다른 공감대를 자극하기도 했습니다. 베이비돈크라이가 어떤 방식으로 소녀들의 마음을 더 대변할지, 이 네 명의 작지만 단단한 소녀들이 써내려갈 틴팝이 기대가 됩니다.

언차일드(UNCHILD), 2026년 최고의 데뷔곡?
하이업엔터테인먼트에서 스테이씨에 이어 선보이는 두 번째 걸그룹 언차일드(박예은, 히키, 티나, 아코, 이본, 나하은)가 지난 4월 21일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구독자 500만 명의 자체 유튜브채널 ‘어썸하은’의 주인공이자 뛰어난 댄스 실력으로 2018년 MMA 스페셜 무대에 올라 조회수 8천만 뷰를 기록한 적 있는 나하은이 소속된 그룹으로 데뷔 전부터 기대를 모았는데요. ‘펑크 스쿨’ 콘셉트를 내세운 언차일드의 데뷔곡 ‘UNCHILD’는 팀의 정체성을 더할 나위 없이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오래된 규칙을 따르느니, 이상해지기를 택하겠다(Same old rules? We choose freaky)’라는 뮤직 비디오 소개 문구처럼 네온 컬러가 주를 이루는 뮤직 비디오는 경쾌하고 ‘이상한’ 장면들로 가득한데요. 교복 치마 아래 받쳐 입은 체육복과 교실 벽에 걸린 태극기, 수업이 끝나자마자 점심 시간에 튀어나가려고 준비하는 학생들, 현란한 조명 뒤 걸린 플랜카드에 쓰여진 ‘제 1회 급식실 댄스파티’ 문구 같은 한국적인 디테일이 위트를 더합니다.

‘We Are Unchild’라는 선언과 함께 시작되는 개러지한 기타 리프, 고조되는 후렴구에서 오히려 힘을 빼고 펼쳐지는 일렉트릭팝 사운드는 팀의 정체성을 알리는 데뷔곡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퍼포먼스와 함께 봤을 때 한층 고조된 매력을 느낄 수 있음은 물론이고요. 때로 데뷔곡의 에너지가 너무 강렬할 경우 음악방송 같은 실제 무대가 힘 빠져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요. 데뷔 후 첫 번째 주 음악방송에서 멤버들은 탄탄한 라이브 실력과 무대 장악력을 보여줬습니다. 데뷔 싱글에 함께 수록된 ‘ENERGY’를 포함한 언차일드의 곡들은 모두 RADO를 필두로 FLYT, Z4 등 에이핑크, 하이라이트와 함께해온 하이업 사단이 썼습니다. 이렇게 활기찬 소녀들과 함께라면, 두려움이라는 방지턱을 정말 넘을 수 있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