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지난 시즌부터다. 허리가 잘록한 여성스러운 수트가 눈에 들어온 건. 오버사이즈 실루엣에 열광하던 에디터로선 갑작스러운 변심이었는데 발렌시아가의 아방가르드한 수트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정갈하고 세련된 이 옷에 마음을 뺏긴 사람은 에디터만이 아니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된 수트는 빠르게 스트리트를 채워갔다.
수트를 향하는 스포트라이트는 이번 S/S 시즌에도 계속된다. 첫 번째 키워드는 역시 실루엣인데 셀린느의 리조트 컬렉션 캠페인에 등장한 파스텔 핑크와 블루 수트처럼 과장된 어깨, 늘씬한 허리 라인을 살린 우아한 스타일이 인상적이다. 이와 비슷한 수트를 선보인 디자이너는 파리의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 옷을 자르고 덧붙이는 해체주의를 지향하던 그는 이번 컬렉션에서 매끈하고 클린한 수트를 제안했고 넉넉한 핏의 팬츠를 매치해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미니멀리즘을 완성했다.
루이 비통 쇼에 등장한 수트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날렵한 테일러링이 돋보이는 도회적인 재킷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여기에 슬릿을 가미한 플레어 팬츠, 비대칭 스커트, 나풀거리는 크롭트 팬츠를 매치해 오직 여자만 입을 수 있는 수트를 보여준 것. 사이먼 로샤 역시 퍼프 소매 재킷과 러플을 장식한 팬츠를 활용해 귀여움으로 무장한 체크 수트를 선보였다.
여러 브랜드에서 시도한 팬츠의 변신도 주목할 만하다. 무릎 언저리에 닿는 길이의 페미닌한 버뮤다팬츠, 드라마틱한 벨보텀 팬츠, 과감한 슬릿을 가미한 팬츠, 발목 길이의 크롭트 팬츠 등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스타일이 공존한다. 수트의 아웃핏이 바뀌었으니 안에 받쳐 입는 옷 또한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 폴 스미스는 칼라와 소매에 레이스를 덧댄 레트로풍의 셔츠를 레이어드했고 질샌더와 록산다는 하늘거리는 새틴 블라우스로, Y프로젝트는 화려한 프린트 셔츠로 여성미를 강조했다.
한껏 고와진 수트의 인기는 스트리트 패션에서 실감할 수 있다. 특히 발렌시아가와 구찌의 런웨이를 옮겨놓은 듯한 과감한 컬러 매치, 소재의 변주, 패턴의 레이어드가 도드라진다. 이러한 스타일을 즐기는 대표적인 셀러브리티는 패션 블로거 린드라 메딘. 지난해 말, 뉴욕에서 찍힌 파파라치 사진 속 그녀는 선명한 바이올렛 수트와 오렌지색 셔츠를 입고 가방과 주얼리를 배제해 군더더기 없이 세련된 스타일을 연출했다. 이그지빗(Exhibit)의 디자이너이자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 요요 카오의 옷차림도 기억에 남는데 핫핑크 수트에 블루 체크 셔츠를 입어 탁월한 컬러 감각을 뽐냈다. 크롭트 톱이나 코르셋처럼 볼륨감 넘치는 스타일을 연출한 패션 피플도 가득하니 더 이상 수트를 입을 때 여성성을 숨겨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렇듯 이번 시즌 수트는 여자이기에 선택 가능한 컬러와 패턴, 실루엣을 마음껏 누리는 데서 시작된다. 올봄은 여자를 위한 수트가 가득한, 여자라서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일 듯한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