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지속 가능한 패션을 포함해 각종 친환경 주제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인 듯하다. 특히 2020 S/S 패션위크가 열린 지난해 9월은 UN 기후행동 정상회의 기간이었던 만큼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이 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선두엔 디올과 스텔라 매카트니가 있었다. 페미니즘을 비롯해 다양한 사회문제에 긍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디자이너로서 선한 영향력을 펼치기 위해 애쓰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올봄 환경에 집중했다. 그 결과 파리의 드넓은 롱샴 경마장 내부를 로맨틱한 정원으로 탈바꿈했고, 무대 안에 심은 나무 곳곳엔 #planting for the future라고 쓴 태그를 부착했다. 이뿐 아니다. 10대 환경운동가로 유명한 그레타 툰베리를 연상시키는 브레이드 헤어를한 모델들은 크리스찬 디올의 동생 카트린느 디올이 생전 꽃이 만개한 정원 앞에서 찍은 사진에서 모티프를 얻은 플로럴 프린트 룩으로 차려입고 우아하게 등장했다. 일찍부터 지속 가능한 패션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한 스텔라 매카트니는 또 어떤가. 지난 2019 F/W 컬렉션에서 지구를 패턴화한 SOS 타투를 선보인 그녀는 새 시즌 전체 룩의 70% 이상을 오가닉 코튼, 재활용 폴리에스테르, 에코닐 등 친환경 소재로 제작했다. 게다가 지난해 6월 밀라노에서 선보인 프레젠테이션은 쓰레기를 줄이자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운동에 동참하는 데커레이션으로 호평을 받았다. ‘자연을 위한 힘(Force for Nature)’이란 테마를 구현한 프레젠테이션 장소는 브랜드 아카이브에서 발견한 자투리 천으로 장식했고, 그 중앙엔 ‘다르게 살 권리’, ‘희망’ 등의 슬로건이 적힌 팻말을 든 모델들과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가 떡하니 서 있었다. 브랜드 론칭 시점부터 ‘업사이클링’을 컨셉트로 내세운 마린 세레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기름 유출
을 뜻하는 ‘블랙 타이드’란, 다소 세기말적인 테마를 앞세운 쇼엔 임신부, 개, 미세먼지 마스크를 착용한 모델 등 ‘기후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 밖에도 윤리적 패션에 앞장서며 EFI(Ethical Fashion Initiative)와 협력해 아프리카 말리에서 수작업으로 제작한 패브릭을 주재료로 사용한 안드레아스 크론탈러 포 비비안 웨스트우드, 객석 의자부터 쇼 노트까지 100% 재활용 소재로 제작한 마르니, 탄소 발자국을 최소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컬렉션을 선보인 가브리엘라 허스트, 에티오피아, 세네갈, 짐바브웨 등 제3세계 국가에 기부하는 전구 퍼포먼스를 피날레에 선보인 미쏘니도 크게 주목받았다.

평화

“ 작은 움직임으로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어요.” 매 시즌 컬렉션에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기 위해 노력하는 프라발 구룽의 말이다. 그의 뜻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변화’를 추진하는 디자이너들이 속속 늘고 있다. 이번 시즌엔 도널드 트럼프의 강경한 반이민 정책에 대항하고 평화를 외치는 브랜드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우선, 멕시코 태생의 디자이너 릭 오웬스는 현 상황을 최대한 밝고 긍정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트럼프의 이민법에 반대하는 단체 중 하나인 미국농장노동자연맹(UFWA)을 상징하는 기호를 프린트한 티셔츠도 눈길을 끌었다. ‘누구나 미국인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이민자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 프라발 구룽 역시 호평받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누구나’를 표현하기 위해 디자이너는 동서양의 분위기를 고루 조합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룩을 선보였다. 조나단 코헨 역시 쇼 오프닝에서부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확고하게 표명했다. 멕시코 모델이 입은 셔츠 원피스엔 성조기를 상징하는 별무늬와 멕시코를 뜻하는 무지갯빛 줄무늬, 프린지 디테일이 뒤섞여 있
었으니까. 유독 멕시칸이 많이 사는 샌디에이고에서 태어난 코헨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보이지 않는 국경과 설움, 차별을 떠올리며 평화를 염원하기 위해 컬렉션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브렉시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한 매티 보반도 주목받기 충분했다.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의 정책에 반대하는 그는 병원에서 실제로 수술할 때 쓴다는 왜곡 직사각형 렌즈를 모델들의 머리에 부착시키거나 스포티한 아우터에 ‘구조(Rescue)’라는 낱말을 프린트하는 등 다채로운 방법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했다. 사카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치토세 아베도 컬렉션을 통해 ‘인류 대화합’을 기원했다. 그 결과 세계지도를 깨알같이 프린트한 오프닝 룩을 비롯해 지구를 형상화한 펜던트 목걸이와 클러치 백 등 자신의 신념을 매우 직접적으로(!) 표현한 아이템이 쏟아져 나왔다. “평화를 원해요. 그 뿐이에요.” 치토세 아베의 말처럼 디자이너들의 선한
영향력이 긍정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