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퍼블릴리어스 사이러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죽음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As men, we are all equal in the presence of death).” 그의 말처럼 모두가 언젠가는 공평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인간과 죽음 사이에는 하나의 평등이 더 주어진다. 대부분의 죽음에 필연적으로 슬픔이 따른다는 귀납이다. 오랜 눈물로, 고인의 뜻을 기린 웃음으로, 때로는 글과 그림으로 형식이 바뀌거나 농도와 지속성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존재했던 누군가는 존재하는 누군가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하이패션 월드는 지난 1년간 많은 이별을 겪었다. 오프화이트의 수장이자 루이 비통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재임하며 혁신을 거듭한 버질 아블로의 사망 소식은 전세계 팬들을 울렸고, 일본의 전설적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를 비롯해 파격적 스타일로 뮈글러를 세계 최정상 하우스의 자리에 앉힌 티에리 뮈글러, 현세대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초대에는 유럽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던 세루티1881(Cerruti 1881)의 니노 세루티가 지병으로 잇따라 영면에 들었다. 이어 지난달에는 한 나라의 문화적 영감 그 자체였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하며 패션계에도 충격을 안겼다.
각각의 인물이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고, 또 패션계에 어떠한 업적을 남겼는지 일일이 서술하자면 백과사전 두께의 페이지를 할애해야 할 터다. 그 대신 이 지면을 빌려 주목하고 싶은 건 패션계의 더없이 예술적이고 절대 보편적이지 않은 수십 가지 애도 방식이다.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이 패션이라는 공통된 이름으로 쓴 추모곡 말이다.
대표적으로 지난달 열린 2023 S/S 런던 패션위크는 침울한 분위기 속에 추도식처럼 진행됐다. 버버리를 포함한 여러 브랜드가 국가의 애도 기간을 존중하기 위해 선뜻 일정을 변경했고, 예정되어 있던 애프터 파티와 행사는 전면 취소됐다. ‘영국 디자인업계를 위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상(Queen Elizabeth II Award for British Design)’의 첫 번째 수상자이자, 2018년 ‘사상 최초로 프런트 로에 여왕을 초대한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여왕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던 디자이너 리처드 퀸은 스크린에 여왕의 영상을 띄우고 검은 왕관과 드레스로 구성한 오프닝 룩을 선보였고, 조나단 앤더슨은 ‘The Queen, 1926~2022, Thank you’라는 문구를 새긴 드레스로 클로징을 장식했으며, 해리스 리드의 쇼에서는 그룹 퀸의 보컬 애덤 램버트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사람(Who Wants to Live Forever)’을 열창하며 애도했다. 이어 마이클 할펀, 에르뎀, 넨시 도자카, 크리스토퍼 케인 등 사실상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거의 모든 디자이너가 쇼 노트를 통해 컬렉션 자체를 헌정하거나 여왕이 좋아하던 요소를 옷에 녹임으로써 슬픔을 표했다.
런웨이의 작별 인사가 여왕만을 향한 것은 아니다. 파리 패션위크에서는 이세이 미야케의 디자이너 곤도 사토시가 바로 몇 달 전 사망한 창립자 이세이 미야케를 향한 존경의 의미로 쇼 시작 전 그의 사진과 그가 남긴 명언 “나는 디자인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디자인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불러온다(I believe there is hope in design. Design evokes surprise and joy in people)”를 스크린에 띄우고 짧은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뒤이어 펼쳐진 런웨이는 예술과 퍼포먼스, 패션의 결합체로 관객에게 거장의 유산을 복기하는 동시에 애도의 뜻을 완벽히 전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책과 전시 형태로 고인이 생전 쌓은 업적을 기리는 경우도 있다. 최근 루이 비통은 아트 북 출판사인 애술린과 협업해 <루이 비통: 버질 아블로(LOUIS VUITTON: VIRGIL ABLOH)>를 출간했다. 총 8개의 장으로 구성한 이 책에는 버질 아블로가 런웨이를 통해 말하고자 한 이야기와 숨은 서사, 그리고 디자이너 니고와 모델 켄달 제너 등 그와 친분을 쌓은 인물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루이 비통은 지난 2022 S/S 남성 컬렉션에서도 ‘버질이 여기에 있었다(Virgil was here)’라는 문구를 밤하늘에 쏘아 올리며 그를 향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홀론 디자인 박물관에서는 지난해 코로나19로 생을 마감한 전설적 디자이너 알버 엘바즈를 회고하며 <알버 엘바즈: 꿈의 팩토리> 전시를 개최한다. 홀론(Holon)은 알버가 유년 시절을 보낸 도시로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하며, 전시에서는 그의 다양한 작품을 포함해 스케치 도구, 일러스트, 추모 패션쇼를 재해석한 영상 등이 공개된다.
일면식이 없다 할지라도 한때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존재 자체로 영감이 되던 이들과 이별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때 패션계가 제시하는 헤어짐과 회고의 방식은 남은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에피소드나 책, 전시라는 기록은 추억이라는 추상에 물리적 형태를 부여하고, 나아가 필요한 순간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불멸의 연결 고리를 선물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모티프가 된 시인 존 던의 기도문 일부를 인용한다. 공식 번역본이 없어 의역이나 오역이 있을 수 있는 점 양해해주시길. “모든 인류는 한 권의 책이다. 한 사람이 죽으면, 책에서 한 챕터가 찢겨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언어로 번역된다. 신은 나이, 질병, 전쟁, 정의와 같은 언어로 역사하신다. 그리고 흩어진 낱장을 한 데 묶어 모든 책이 서로에게 열려 있는 도서관을 만드신다(When she buries a man, that action concerns me: all mankind is of one author and is one volume; when one man dies, one chapter is not torn out of the book, but translated into a better language; and every chapter must be so translated. God employs several translators; some pieces are translated by age, some by sickness, some by war, some by justice; but God’s hand is in every translation, and his hand shall bind up all our scattered leaves again for
that library where every book shall lie open to one another).” 패션계의 상실에 상서(傷逝)하는 모두에게 사적인 위문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