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K의 시대다. 국토 면적 1004만1259.87ha로 세계 108번째*, 인구수 5155만8034명으로 세계 29번째**라는 애매한 지표가 전부이던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은 돌연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 됐다.
한국인이라면 사는 내내 지겹도록 들었을 표현 하나를 꺼내야겠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괴테의 명언을 비튼 문구다. 우리는 이 말을 잠언이라도 되는 양 모시고 살았다. 문화 찬탈에 분노했고, 외국인을 만나면 어김없이 김치를 아느냐고 물었다. 뿌리에 관한 논쟁이라면 감자, 고구마 할 것 없이 한데 뭉쳐 싸웠고, 한국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흐르는 사람의 업적이라면 달려가 내 일처럼 기뻐했다. 돌이켜보면 ‘가장 한국적인 것’은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복식도 음식도 아닌, 그저 서로를 견인하려는 그 정신 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곧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해외에서 싹트는 우리 것의 위상을 드높였고, 끝내 온 세상이 한반도라는 미지의 세계를 궁금해하도록 부추겼다. 그리하여 음악가 조성진, 영화인 봉준호와 박찬욱, 축구 선수 손흥민, BTS와 블랙핑크,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 얼마 전 전 세계 넷플릭스 시청 순위 1위를 기록한 드라마 <더 글로리>에 이르기까지, 재능과 실력을 가진 이 땅의 모든 고유명사가 세계에서 배양되도록 힘을 보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5155만 8034개의 단일민족 인큐베이터는 코리안의 등을 떠미는 중이다. 십시일반의 마음을 발판 삼아 더 높은 곳으로 가라고. 그렇게 등 떠밀린 한국인들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분투할 명분을 얻는다.
패션 월드에는 이 다정한 명분을 온 힘으로 지켜내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는 패션에 문외한이라도 그 이름을 알 수밖에 없는 톱 모델 최소라, 신현지, 정호연, 배윤영을 필두로 클로이 오, 선윤미, 윤보미 등 차세대 모델들이 매 시즌 세계 정상급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으며 런웨이와 캠페인 현장을 활보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유색인종 모델을 기용하지 않는 브랜드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격세지감이 들 수밖에 없다. 끈기, 프로다운 모습, 기량, 모델로서의 엄격한 자기 관리와 매력적인 페이스, 포즈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 올린 결과지만 ‘한국인 누가 어느 쇼에 섰다더라’, ‘세계 모델 랭킹 몇 위가 한국인이더라’, ‘아유, 장하네’로 이어지는 K-오지랖이 보이지 않는 응원이 됐으리라.
한국 디자이너들도 유럽 출신 디자이너 일색인 4대 패션 도시를 오가며 맹활약 중이다. 일례로 얼마 전 서울시가 디자이너 박춘무, 박종철, 윤석운의 작품을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에 기증하며 화제를 모았고, 디자이너 이혜미가 이끄는 잉크(EENK)와 황경록의 록(Rokh)도 규모를 키우고 완성도를 높이며 파리 패션위크 정규 스케줄에 단단히 뿌리내렸다. 한편 지난 시즌 돌체 앤 가바나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밀라노 패션위크 기간 쇼를 펼친 디자이너 박소희는 파리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도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하우스 브랜드의 자본으로도 이루기 어려운 일을 스물여덟 살 젊은 한국인 디자이너가 해낸 것이다. ‘국뽕’이 차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을 찾는 하우스 브랜드도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해 디올이 이례적으로 한국에서 패션쇼를 연 데 이어 구찌가 올해 5월 크루즈 패션쇼를 진행할 예정이며, 루이 비통도 브랜드 최초의 프리폴 패션쇼 개최지로 서울을 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루이 비통은 지난 2019년 인천에서 스핀오프 쇼를 연 바 있지만, 이번 행사는 정식 쇼라는 점과 브랜드 최초로 전개하는 시즌이라는 점에서 그에 비할 수 없이 큰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 낭만적 현상의 이면에는 한국의 명품 소비율 증가라는 자본주의적 요인이 존재한다(모건 스탠리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 1인당 명품 소비액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이벤트가 불러올 효과는 단순히 상업의 영역에 머물지 않으리라 단언한다. 하우스의 초대로 방문해 이 땅의 소박한 아름다움에 감명받은 이들이 확대 재생산할 이야기 하나하나가 어제와 다른 K-위상을 만들어낼 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문득 얼마 전 BTS의 리더 RM이 스페인의 한 일간지와 나눈 인터뷰***가 떠오른다. 기자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K-’로 명명되는 꼬리표가 지겹지 않나?”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스포티파이가 우리를 ‘K-Pop’이라는 카테고리로 묶는다는 사실이 지겨울 수는 있다. 그러나 이건 일종의 프리미엄 마크다. 우리의 선조들이 싸워 얻어낸, 우리의 퀄리티에 대한 일종의 인증 마크인 셈이지.” 한국의 이미지 제고에 누구보다 큰 몫을 한 RM의 이 발언은 대한민국 전체에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그리고 이 우주에 유일할 민족성이 빚어낸 이토록 영광스러운 수식을 때때로 가벼이 여기지는 않았는지 반추하게 만든다. 그 답으로 두 페이지에 걸친 사적인 단상을 내려놓는다. ‘월드’라는 주제의 4월호 안에서, 한 개인이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가장 한국적인 태도’로, K-패션의 진일보를 남들보다 조금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결심 끝에. 그러니 부디 이 모든 일에 장하다, 잘했다 칭찬해주시기를. 아무래도 세계화된 둥근 지구에서 우리 모두는 삶의 많은 순간을 K-패션에, K-컬처에, K-팝과 K-민족성에 바치거나 빚지고 있는 것 같으니.
*출처: 2020 국토교통부, FAO 기준 **출처: KOSIS(통계청, 장래인구추계) ***KBS 뉴스에서 제공한 인터뷰 전문 번역본의 일부를 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