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출신의 소설가이자 언론인 아서 케스틀러(Arthur Koestler)는 자신이 발표한 논문에서 ‘창조성’에 대해 “독창적인 속성보다는 배치 작업의 속성이 더 강하다”라고 기술했다. 그는 창조의 개념에 대해 기존의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관찰하고 통합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배치와 분류, 통합하는 과정, 즉 글 전반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큐레이션(curation)을 통해 ‘창조’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완전한 새로움을 만드는 행위가 순도 100% 창조라고 믿어온 이들이라면 다소 불편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이패션 신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창조’의 모범 답안으로 통용된다. 하우스의 과거에서 미래를 잇는 무형 혹은 실존하는 모티프나 키워드를 찾아 선별, 분류, 통합하는 일련의 행위를 영위하는 숙명을 타고난 하우스의 수장들. 다시 말하자면 그들에게 ‘큐레이션’은 가장 필수 덕목이며, 여기서 자신만의 ‘크리에이티비티’를 발전시켜갈 때 진정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인정받는 것이다.
첫 컬렉션으로 기대감을 증폭시킨 디자이너
다니엘 리
2023 F/W 시즌, 새로운 패션 하우스로 이적 후 첫 컬렉션으로 기대감을 증폭시킨 디자이너가 있다. 보테가 베네타를 ‘쿨’의 정점에 올려놓고 홀연히 버버리로 무대를 옮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니엘 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가 브랜드에 입성 후 아카이브 창고에서 꺼내 든 비장의 카드는 과거 전성기에 등장했던 버버리 프로섬의 중세 기사 로고. 순백의 아방가르드한 드레스에서 강렬한 자태로 펄럭이는 푸른 로고를 마주한 순간 마치 역동적으로 변모할 브랜드의 청사진을 보는 듯 감격스러웠다. 다니엘 리는 이 외에도 다채로운 트렌치코트와 타탄체크의 변주를 통해 1백60년이 넘는 브랜드 헤리티지에 경외심을 표하는 동시에 슬로건 티셔츠에 ‘변화의 바람(The Winds of Change)’이라는 메시지를 담아 자신의 속내와 야심을 내비쳤다. 비록 한 시즌 천하로 이별을 고했지만 앤 드뮐미스터를 맡았던 루드빅 드 생 세르넹의 처음이자 마지막 컬렉션도 인상적이었다. 하우스의 대표 모티프인 깃털을 가슴에 소중히 얹고 다채로운 방식으로 날갯짓을 표현한 세르넹의 은유적인 표현과 비상. 그는 짧은 모험을 뒤로하고 자신의 컬렉션에 집중할 계획이다.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
수 없이 방대한 아카이브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현재와 미래를 위한 옥석을 가리는 데 능숙한 디자이너들. 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고상한 취향과 예술적 취미 생활로 영역을 넓히며 큐레이션에 집중하기도 한다. “케이트 모스를 통해 사진가, 디자이너, 패션을 발견했죠.”자신이 10대 때 직접 ‘덕심’을 불태우며 만든 케이트 모스의 스크랩북을 독창적인 팬진(Fanzine, ‘팬’과 ‘매거진’의 합성어) 형태로 재구성했던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 그가 최근에는 <매그넘> <인터뷰> 같은 전설적인 아트 매거진을 표방하는 프랑스 아트 매거진 <마그마>, 아프리카 예술의 헤리티지를 전달하는 <에어 아프리카> 매거진 제작에 힘을 싣겠다고 발표했다. 무한 확장 중인 디지털이라는 시류를 좇지 않고 브랜드 정체성과 결이 맞는 프린트 매거진을 큐레이션해 지원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터. 하지만 장인정신과 공예적 DNA를 기반으로 성장한 보테가 베네타다운 행보를 지켜보며 마티유 블라지와 브랜드의 진정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