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 약간 넓히면 예상보다 많은 새로움과 만날 수 있다. 지난 1년간 한국에 생긴 전시 공간은 몇이나 될까? <서울아트가이드>를 발행하는 김달진미술연구소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전국에 총 1백28개, 서울에만 64개가 개관했다. 박물관, 국·공립 혹은 사립 미술관, 갤러리, 복합 문화공간, 갤러리 카페 등 종류도 다양하다. 범위를 서울로 좁히면 이러한 추세는 더욱 선명해진다. 소셜미디어의 해시태그나 지도 앱의 즐겨찾기 수치로 변화를 계량화할 수는 없다 해도, 각양각색의 이들이 서울의 아트 지형도를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작년 2월 성수동에 둥지를 튼 ‘갤러리 R’도 그중 한 곳이다. 갤러리 R의 황영배 대표는 “우리는 일명 ‘K-Art’를 지향한다”고 말하며 저평가된 국내 작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해 국제 미술계로 진출시키는 길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지난 8월에 막을 내린 김남훈, 홍명섭 작가의 2인전을 비롯해 박기원, 안시형, 장지아 등을 소개하는 전시 기획 말고도 갤러리 R의 역점 사업은 또 있다. 바로 ‘전자 도록’ 출판이다. 황 대표는 “미술은 각 지역의 특수성을지닌 분야이기 때문에 작가론은 ‘글로컬’을 바탕으로 써야 한다. 우리는 40년간 미술계에서 활동해온 독립 큐레이터 겸 미술 평론가 류병학에게 전시 기획과 작가론 집필을 의뢰한다”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갤러리 R을 운영하는 (주)KAR(Korea Art Revelation Co., Ltd) 의 출판사 ‘KAR’에서 지난 1년간 한글 전자 도록 32 권과 영문 전자 도록 11권을 발행했다. 국내 온라인 서점과 아마존에서 구입 가능한 전자 도록을 통해 갤 러리 R이 홍보하는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보다 널리, 깊이 있게 알리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
유서 깊은 북촌 아트 벨트에 입지한 ‘WWNN’은 오래전 큐레이터와 작가로 만난 오주현 대표와 이정우 대표가 공동 운영하는 갤러리로, 지난 7월 개관전 <Humanism Reimagined>를 선보이며 아트 신에 등장했다. 오 대표는 “다른 곳에서 갤러리 운영을 시작할 만한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동시대 한국 작가들은 늘 잘해왔다. 단지 최근 음악, 영화 등 다양한 문화예술 방면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에 이미 잘하던 것들이 노출되며 주목받고 있다고 생 각한다. 재능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으니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당위와 경험이 자연스럽게 맞물려 생겨난 WWNN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이름의 속뜻답게 “미술 시장과 대중이 현시대에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보여주는 공간”을 선보일 것이다.
반포동에 문을 연 ‘스페이스 21’은 개관전 <비평가 이일과 1970년대 AG그룹>으로 김구림, 박석원, 서승원, 심문섭, 이강소, 이승조, 이승택, 최명영, 하종현까지 9인의 거장을 한자리에 모아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 한국의 1세대 미술 평론가 이일의 장녀인 이유진 대표가 운영하는데 AG그룹의 출판물과 도록, 이일의 육필 원고를 비롯한 아카이브를 전시의 중심 에 배치해 미술 비평의 역할을 재조명했다.
예술가 중심의 유연한 운영 방식과 독특한 정체성으로 섣불리 정체를 규정하지 않는 전시 공간의 명맥을 이어받는 곳도 있다. 화이트 큐브, 대안 공간, 아티스트 스페이스 등 그 어떤 라벨로부터도 자유로운 장소들 말이다. 후암동에 위치한 ‘샤워’는 전시 공간 설계 및 설치에 주력하는 ‘샴푸’를 운영하는 신관수 대표가 올해 6월 설립한 공간이다. 김대환, 류성실, 조이솝, 황수연 등 여러 작가가 참여한 개관전 도 공간의 특성을 한정 짓지 않으며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담아냈다. 신 대표는 “사전 프로그램과 개관 전을 진행하며 샤워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 샤워는 기본적으로 전시 공간이고, 가능하다면 작품을 판매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력 때문인지 누군가는 이곳을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는 사람에 따라, 무엇을 중심으로 이 공간을 읽을 것이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듯하다. 따라서 샤워는 각자의 해석과 경험에 따라 의미와 역할을 지닌 공간으로써 문화예술을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고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세계적인 대형 갤러리의 서울행 역시 올해에도 계속 된다. 9월 2일, 일본 갤러리 중 최초로 화이트스톤 갤러리가 후암동에 상륙한다. 1967년 도쿄 긴자에서 시작한 화이트스톤 갤러리는 홍콩, 타이베이, 싱가포르 등 아시아 전역에 지점을 운영 중이며 서울 지점 은 일곱 번째 공간이다. 스타 건축가 쿠마 켄고가 리노베이션을 맡아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에 이르는 규모에 옥상 정원까지 마련했다. 개관전 제목은 무려 <We Love Korea>로, 동아시아의 전후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차세대 작가들이 참여해 여러 테마를 보여줄 예정이다. 9월 5일에는 영국 기반의 메가 갤러리인 화이트 큐브가 강남구의 호림아트센터 1층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첫 전시는 <영혼의 형상>으로 이진주, 루이스 지오바넬리(Louise Giovanelli), 트 레이시 에민(Tracey Emin) 등 7인의 작가가 참여해 철학과 형이상학, 인간 행동의 동기를 탐구한다.
글로벌 갤러리들이 서울에 관심을 보이는 배경에는 단연 확대된 한국 미술 시장이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화랑협회 국제이사를 맡고 있는 갤러리 BHAK의 박종혁 대표는 “해외 갤러리가 한국에 들어오는 건 긍정적인 지표다. 좋은 갤러리가 좋은 전시를 선보이 면 미술 향유층이 넓어진다. 한국 갤러리와의 교류를 통해 작가들에게도 수혜가 돌아갈 수 있다”라며 “근래 들어 한국 미술 시장 자체에 대한 관심도가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의 양적, 질적 향상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4월 서울 신라 호텔에 첫 서울 지점을 연 후 1년 만에 삼청동으로 확장 이전한 페레스 프로젝트에 서울에서 보낸 1년이 어땠는지 물었다. 하비에르 페레스 대표는 “멋진 한 해를 보냈다. 서울에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서울 지역의 인맥과 더욱 가까워졌고, 갤러리 작가들의 개인전도 성공적으로 치렀다. 나아가 한국 미술 기관과의 관계를 넓히고 심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라는 소회를 밝혔다. “서울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다양한 층위의 강력한 미술 시장과 현대미술에 대한 개방성을 갖추고 있어 우리 프로그램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한 이상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저마다의 방향과 의도를 지닌 새 공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동시대의 문화적 아카이브가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목도하는 변화와 시도들이 그려낼 풍경이 궁금하다면 부지런히 길을 나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