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마켓에 일어난 ‘하이 주얼리 르네상스’를 바라보는 윤성원 주얼리 스페셜리스트의 시선.
그 뜨거운 빛의 향연을 쫓아서.

돌체앤가바나의 하이 주얼리 ‘오체아니나’ 목걸이를 착용한 김혜수.
74.46캐럿의 파라이바 투르말린과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돌체앤가바나 알타 조엘레리아 ‘오체아니나’ 목걸이.

지난해 12월 청담동에서 열린 돌체앤가바나 하이 주얼리 이벤트에 ‘역대급’ 목걸이 한 점이 등장했다. 무려 74.46캐럿의 파라이바 투르말린을 세팅한 ‘오체아니나’ 목걸이였다(바다의 신 오케아노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 오케아니데스에서 영감을 받아 붙인 명칭). 파라이바 투르말린은 글로벌 하이 주얼리 업계에서 가장 핫한 보석 중 하나로, 다이아몬드 1만 개당 한 개꼴로 산출될 정도로 희귀하다. 게다가 강남의 건물 한 채와 맞먹는 천문학적인 가격이라 그간 유럽 밖으로 나온 적이 없을 정도로 까다롭게 관리하던 이른바 ‘뮤지엄 피스’다. 이런 목걸이가 처음으로 유럽을 떠나서 한국행을 택한 것이다. 특히 새하얀 케이프 드레스에 푸른 네온빛의 파라이바 목걸이를 착용한 배우 김혜수를 본 순간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해외 셀럽들도 착용하지 못한 이 목걸이가 한국 여배우의 목에서 빛나다니,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 아닌가! 이뿐만이 아니다. 2021년에 불가리를 시작으로 2023년에는 반클리프 아펠과 프레드의 아카이브 전시가 서울에서 개최되었고(심지어 프레드의 전시는 아시아 최초다), 부쉐론은 VIP 고객만을 대상으로 하던 관행을 깨고 국내 대중을 위해 따끈따끈한 하이 주얼리 컬렉션을 공개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하이 주얼리를 감상하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시장 규모나 매출과 상관없이, 한국 시장에 앞다퉈 소개하는 것이 트렌드로 자리 잡은 양상이랄까.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국내에서 하이 주얼리 행사를 개최한 브랜드를 나열해보니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다. 주얼리와 보석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직업상, 나는 국내 하이 주얼리 신을 고객과의 접점에서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다. 지난 8년 동안 럭셔리 브랜드의 판매 직원과 VIP 고객, 즉 ‘창과 방패’ 둘 다에게 강의하고 있으니, 국내 하이 주얼리 시장에서 양쪽의 니즈가 치열하게 부딪치는 현장을 생생하게 경험한 셈이다. 모 브랜드와 정기적인 VIP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있기도 한데, 이토록 아카데믹한 환경에 대해 해외 관계자들이 부러워한 적이 있다. 어쨌든 브랜드에서 나를 찾는 빈도가 높아질수록 하이 주얼리의 매출 또한 상승하는 현상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하이 주얼리의 자산 가치뿐 아니라 스토리텔링에도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VIP 고객 강의는 원래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영 앤 리치’와 남성까지 합세해 더욱 폭이 넓어지고 있다. 일명 보복 소비의 여파도 있지만, 사교 활동이 제한되면서 투자가치에 대한 호기심과 진지한 학습 열기가 높아진 것이 주된 이유로 꼽힌다.

루벨라이트, 루비, 핑크 사파이어 등이 세팅된 디올 하이 주얼리 ‘르 자댕 드 라’ 쿠튀르 목걸이.
4 탄자나이트, 사파이어, 파라이바 투르말린 등이 세팅된 디올 하이 주얼리의 ‘르 자댕 드 라’ 쿠튀르 반지.

또, 젠더 뉴트럴 룩이 부상하고, 성별이나 나이보다 ‘태도’가 중요한 시대로 전환되면서 남성들이 실제로 하이 주얼리를 구매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아내의 손에 이끌려 강의를 들으러 왔다가 본인을 위해 고가의 탄자나이트 반지를 구입한 60대 남성과 실물을 보지도 않고 사진과 감별서(보석 정보를 적은 감정원의 리포트)만으로 판단해 최상급 콜롬비아산 에메랄드 반지를 주문한 30대 남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강의나 행사에 커플이나 가족 단위로 참석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엄마와 딸, 엄마와 아들이 오는 경우는 흔하고, 온 가족이 총출동하는 일도 다반사다. 아들과 함께 ‘4대 보석’ 강의에 참석했다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메모와 금일봉을 남기고 간 50대 고객은 좀처럼 잊을 수 없다. 또 요즘 세대는 컬러에 대한 욕구와 개성 표현에도 적극적이다. 딸에게 물려줄 생각으로 보석을 구입하려다가 딸과 취향이 달라 토닥거리는 모녀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10억원이 넘는 로열 블루 사파이어 반지를 청바지와 스니커즈 차림에 착용한 50대 여성과 눈부신 다이아몬드 태슬 목걸이를 니트 스웨터 위에 아무렇지 않게 걸치고 온 30대 여성을 보면서 착용 가치 또한 투자가치만큼 중요해졌음을 체감한다. 또 갈라 디너 같은 격식을 차린 행사가 늘어나면서 칵테일 드레스나 이브닝드레스에 어울리는 하이 주얼리 목걸이와 귀고리의 수요도 증가하는 추세다. 언제부터인가 전통 주얼리 하우스들의 리그에 패션 하우스 라는 만만찮은 플레이어들이 가세했다. 샤넬, 루이 비통, 디 올, 구찌 등에서도 하이 주얼리 업계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기존 고객에게 하이 주얼리까지 팔겠다는 패션 공룡들 의 공격적 행보는 이 시장의 성장세를 방증한다. 막강한 자 본력으로 무장한 이들은 ‘럭셔리의 끝판왕’인 하이 주얼리 를 통해 토털 패션을 완성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불태운다. 의도야 어떻든, 아름다움과 예술성을 오감으로 느끼고 즐기며 이해할 수 있는 시장이 확대되었다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브랜드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신선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독특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는 것 또한 최신 동향이다. 충성 고객을 확보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확실하게 각인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부쉐론이 지난 해 11월 도산대로의 페로탕 갤러리에서 선보인 <모어 이즈 모어(More is More)> 하이 주얼리 컬렉션은 사각 링 위에서 모델들이 경쾌한 춤을 추는 역동적인 프레젠테이션으로 호 평을 받았다. 전통적인 하이 주얼리의 관습에서 벗어난 소 재와 디자인도 파격적이지만,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는 클 래식 컬렉션과 별개로 기술력과 창의력을 강조한 컬렉션만 큼은 편견을 깨는 방식으로 독보적인 정체성을 구축하겠다 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페로탕 갤러리에서 개최된 부쉐론의 <모어 이즈 모어> 하이 주얼리 컬렉션 전시 현장.

한편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국적인 장소에서 새로운 컬렉션을 발표하는 ‘목적지 쇼’가 대세로 떠올랐다. 그 결과 한국 VIP 고객을 유럽으로 모셔 가기 붐이 일고 있 다. 지난 시즌, 까르띠에는 피렌체의 17세기 저택인 빌라 코 르시니의 정원을 화려한 하이 주얼리 런웨이로 변신시켰다. 디올은 이탈리아 북부 코모 호수 근처의 작은 마을에 위치 한 빌라 에르바에서, 루이 비통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산기슭에 위치한 고대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에서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였다. 돌체앤가바나는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의 페톨레키아에서 일몰의 황금빛이 광활한 올리브나무 숲 을 감싸는 그림 같은 분위기에서 신제품을 발표했다. 행사에 초청받은 국내 고객들은 웅장하고 로맨틱한 풍광 속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누리며 하이 주얼리를 감상했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프라이빗 와이너리 투어, 유명 뮤지엄 에서의 만찬, 헬기 체험, 해변가의 뮤지컬 쇼 등 특별한 프로 그램을 통해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다. 예술적 가치와 비즈 니스 목표를 결합한 이벤트를 통해 고객은 제품을 단순히 ‘결제’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와 끈끈한 ‘관계’를 만들어갔 다. 당시의 아름다운 순간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행복한 소 수의 SNS 스토리를 지켜보며 다수의 대중은 질투 어린 갈망 의 시선을 보내야 했다. 이처럼 하이 주얼리는 높은 수익만 큼이나 브랜드의 자산을 불리는 주요 부문이므로 앞으로도 계속 마케팅에 높은 비용을 집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2021년 봄, 사회적 거리 두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모 패션 브랜드의 하이 주얼리 디렉터가 한국을 찾았다. 2주 동안의 격리 기간을 감수하면서까지 입국한 이유를 물으니 기다렸 다는 듯 K-컬처에 매료된 사연을 풀어놓았다. 바로 K-드라 마와 아티스트! 우리는 이를 주제로 한 시간 동안 수다를 떨 었고, 다음 날 나는 넷플릭스에 올라온 한국 드라마와 영화 20편을 추려서 이메일로 보냈다. 그리고 3년이 흐른 지금, 그토록 ‘한국에 진심’이던 그 브랜드는 국내에서 매년 하이 주얼리 매출이 상승하는 추세다. 이쯤 되면 K-파워의 종점 은 하이 주얼리가 아닐까? 그 이유가 투자가치든, 사회적 지 위의 상징이든, 예술적 가치든, 마침내 주목받을 순서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