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패션위크 무대에서 어느새 네 번째 쇼를 마친 브랜드 잉크(EENK)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혜미. 10여 년의 시간 동안 그만의 언어와 색으로 물들여온 잉크라는 무한한 세계.

예전의 목표는 한국 최초의 하우스 브랜드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저 좋아하는 사람들과 계속 행복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밸런스를 지키며 즐겁게 일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만나서 반갑다. 상하이 스토어 오픈 행사를 다녀와서 어제 막 입국했다고 들었다. 파리에서 컬렉션을 마치고 인천에 들렀다가 곧바로 상하이로 향했다. 파리에서 상하이까지는 직항이 없더라.(웃음)

두 번째 스토어를 상하이에 오픈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좋은 기회를 얻어 젠틀몬스터가 운영하는 하우스에 들어갔다. 건물 3층에 오픈 YY, 아모멘토, 디스이즈네버댓 등 여러 국내 브랜드가 단독 매장 형태로 입점해 있으니 상하이에 간다면 들러보길 바란다.

최근 잉크의 첫 아이웨어 컬렉션도 선보였다. 잉크의 아이웨어에는 하우스의 어떤 DNA를 담았나? 쇼를 진행하며 스타일링에 무게감을 더하기 위해 선글라스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때마침 S/S 시즌이기도 해서 컬렉션에서 아이웨어를 함께 선보였다. 나도 모던한 룩에 선글라스로 포인트를 주는 것을 좋아해서 디자인하고 보니 전부 내가 즐겨 착용하는 스타일이더라.(웃음)

컬렉션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매 시즌 알파벳을 활용한 주제로 컬렉션을 전개하고 있다. 2024F/W 시즌 컬렉션의 주제인 ‘Z forZero to One’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나? 브랜드를 시작할 때는 알파벳 B부터 시작해서 Z까지 선보인 후, A로 돌아와서 ‘AforAll’ 컬렉션을 발표하고, 마지막은 ‘AforArchive’라는 주제로 A부터 Z까지 모든 컬렉션을 아카이빙해 전시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원래 계획보다 빠르게 Z 순서가 다가왔다.(웃음) 본격적인 레디투웨어는 K부터 시작하기도 했고, 타 브랜드와 협업한 컬렉션도 있다. 그래서 잉크만의 스토리를 더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양과 서양에서 ‘zero(제로)’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 서양에서 제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반대로 동양에서는 제로를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여백이 있는 상태’라 여긴다. 우리는 동양의 개념에 영감 받아 Z를 새로운 시작점으로 놓고 ‘Zero to One’이라는 타이틀을 정했다. ‘zero(0)’에서 ‘one(1)’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주제를 디자인으로 풀어낸 방식은 매우 심플하다. 숫자에 착안해 제로는 구의 형태, 원은 슬림한 형태로 구현했다. 둥근 실루엣, 프린지 디테일 등이 그 예다.

그렇다면 다음 컬렉션의 주제는 ‘A’로 시작할까? 다시 시작하는 의미의 ‘A’가 되지 않을까. 예를 들면 ‘Again’?

앞으로는 알파벳에 제한받지 않고 컬렉션을 무한히 만들 수 있겠다.(웃음) 돌연 E로 정하고 ‘Ending’으로 끝낼 수도 있다.(웃음) 혹은 N으로 시작하는 ‘Nothing’이라든지. 만들기 나름이다.(웃음)

어느새 네 번째로 파리에서 컬렉션을 공개했다. 잉크라는 브랜드는 한국 디자이너가 해외에서 활약하는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발점에 선 인물로서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있나? 파리에서 쇼를 진행하는 것은 굉장한 에너지를 얻는 작업이다. 패션 산업이 워낙 활발한 곳이고, 아티스트들이 쇼를 위해 몰두하는 에너지를 몸소 느끼며 원동력을 얻는다. 해외의 톱 아티스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자신감이 생긴다. ‘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구나’ 하고 인정받는 자기 검증의 시간이랄까. 해외로 나간 것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 확립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비즈니스를 위한 선택이었다. 어느 날 뜻밖에 안담(ANDAM) 패션 어워즈 심사위원에게 인터뷰 요청이 왔고, 그 일을 계기로 파리에서 쇼를 진행하게 된 케이스이니 말이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이 자리까지 와 있게 됐다. 쇼를 마친 후 국내 패션 매체와 바이어들이 상상 이상의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었다. 내 사명감은 스스로 품었다기보다 주변의 응원과 지지에서 시작됐다.

파리에서 자주 방문하는 스팟이 있는지 궁금하다. 파리 패션 박물관 팔레 갈리에라(Palais Galliera)와 피노 콜렉시옹(Pinault Collection). 특히 팔레 갈리에라에 가면 파리가 패션을 무척 사랑하는 도시임이 느껴진다. 전시 내용도 물론 좋지만 남녀노소 모두 진중한 태도로 작품을 감상한다. 패션을 소비재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문화로 인식하는 모습이 감명 깊었다. 아카이브 전시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중 인상 깊게 본 전시가 있다면? 팔레 갈리에라에서 열린 메종 마르지엘라 전시와 알라이아 전시.

동경하는 디자이너나 브랜드가 있나?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던 시절의 발렌시아가를 좋아한다. 조형적이면서 미래적인 동시에 복식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

쇼 크레디트를 보면 어마어마한 스태프진이 잉크를 위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스타일리스트 말리나 조셉 길크리스트(MalinaJosephGilchrist)의 이름이 눈에 띄는데, 어떻게 그와 협업하게 되었나? 잉크의 아이덴티티를 잘 녹여낼 수 있는 스타일리스트를 찾던 중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화보를 모아놓고 보니 전부 말리나의 작업물이었다. 불쑥 연락했는데, 그가 우리 브랜드를 이미 알고 있다더라.(웃음) 그렇게 성사된 2022 F/W 캠페인 촬영으로 인연이 시작됐다. 워낙 저명한 스타일리스트라 말리나가 참여한 브랜드라고 하면 파리에서 쇼를 시작하는 과정도 수월하다. 그와 나는 동년배여서 좋은 조력자로, 또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고마운 인연이다.

현재 인터뷰하고 있는 공간 메종 잉크에서는 디자이너 이혜미의 남다른 취향이 온전히 느껴진다. 평소 취미나 좋아하는 것을 귀띔해줄 수 있나? 예술영화를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은 감각적인 영화를 보며 깊은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웃음) 요즘은 자극적인 킬링 타임용 영화를 즐겨 본다.

공감한다.(웃음) 감명받은 영화를 공유한다면? 지금 문득 생각나는 작품은 <작은 아씨들>과 <위대한 유산>이다.

디자이너로서 이루고 싶은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예전의 목표는 한국 최초의 하우스 브랜드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저 좋아하는 사람들과 계속 행복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밸런스를 지키며 즐겁게 일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당신은 수많은 패션학도의 목표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제2의 이혜미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패션 시장은 여러 갈래의 맵(map)이 존재한다. 브랜드의 특성을 구분 짓는 카테고리라고 할 수 있다. 수 갈래의 맵 안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강점을 찾아야 한다. 가격, 제품력, 디자인 등 무엇이든 좋다. 다만 디자이너와 CEO의 역할을 동일시하면 안 된다. 브랜드 운영은 아이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 끝까지 이끌어갈 끈기와 열정이 필요하다. “브랜드는 폭주 기관차다”라는 말이 있는데, 기차가 폭주해 모두 뛰어내리는 상황에서도 기관사만은 남아 핸들을 잡아야 한다. 모두가 떠나도 그만두지 못하는 한 사람이 CEO라는 말이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