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피렌체 도심에 있는 역사적 건물인 ‘팔라초 세티만니(Palazzo Settimanni)’에서 선보인 구찌 2026 크루즈 컬렉션.

그 흔한 화려한 수사 하나 없이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한 문 장. “구찌는 피렌체고 피렌체는 구찌다.(Gucci is Florence, and Florence is Gucci.)” 이 한마디로 함축되는 이탈리아의 유서 깊 은 도시 피렌체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패션 하우스 구찌의 긴 밀한 관계는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찌라는 브랜드가 탄생한 근원지이자 창립자인 구찌오 구찌의 고향, 오랜 시간 전 통적 가죽공예와 장인정신으로 알려진 도시 피렌체. 이 유서 깊은 장인의 도시에서 탄생한 구찌는 이탈리아 장인들의 신중 한 눈빛과 정교한 손놀림이 호응하는 마법 같은 순간에 패션의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영화화된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하이라이트 신에 깊이를 더한 두오모가 자리한 장소로도 잘 알 려진 도시이자 낭만과 영감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문화 예술의 도시는 이탈리아의 여러 패션 하우스에 강렬한 장인정신을 심 어왔다. 오늘날 여전히 피렌체에 본사를 두고 있는 구찌의 심 장과도 같은 이곳에서 2026년 구찌 크루즈 쇼가 펼쳐진다니, 묘한 설렘을 느끼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르네상스의 본고장, 구찌의 발상지이자 패션 유산의 허브, 영원한 장인의 고향으로 향하며 기내 좌석에 몸을 깊숙이 누이고 황홀한 꿈을 꾸었다. ‘꽃을 피우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영원한 봄의 도시, 피 렌체. 르네상스의 발상지로서 ‘인류의 눈이 다시 깨어난 곳’이라 일컬어지는 피렌체에 마침내 도착했다. 피렌체에서 열리는 쇼를 앞두고 도착한 호텔 룸엔 미리 구찌의 히스토리를 안내하듯 구 찌의 아카이브가 깃든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 유명한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를 거닐며 느낀 피렌체의 정 취와 숨결은 따스했다. 거리 곳곳에서 나의 눈길은 구찌의 옛 자취를 좇았다. 1953년은 구찌 하우스에 획기적 전환점이 된 해였다. 1921년 피렌체에 첫 부티크를 오픈한 이래 뉴욕에 첫 해외 매장을 열 며 해외 진출의 포문을 열었고, 1950년대 초부터 사용하던 승 마 모티프 장식으로 헤리티지를 부여한 홀스빗 1953 로퍼를 선보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구찌는 장인정신이 깃든 컬렉션을 위한 본거지로서 피렌체 도심에 있는 역사적 건물인 ‘팔라초 세 티만니(Palazzo Settimanni)’를 매입했다. 15세기 건축양식을 고 스란히 보여주는 이 유서 깊은 공간에 구찌의 히스토리를 총망 라한 아카이브를 구축한 것. 이곳은 오늘날까지 브랜드의 역사 와 디자인 철학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동시에 매혹적 유산을 기 념하는 공간으로 자리한다. 이곳에선 타임리스 아이콘이 된 뱀 부 핸들 백과 승마에서 영감을 얻은 클래식한 홀스빗 로퍼 등 1960년대에 탄생한 GG 로고 액세서리의 오리지널리티뿐 아 니라 동시대성을 함께 목도할 수 있다.

1백 년 넘는 역사를 이어온 구찌 하우스의 연대기엔 그 특별한 순간을 수놓으며 지속적 혁신을 이룬 이름들이 등장한 순간이 있다. 오늘날 젠지들이 흔히 일컫는 세기말 패션, 그 뉴트로 패션의 황금기이던 20세기 말부터 구찌 하우스는 고유한 시선으로 브랜드를 새롭게 해석할 디자이너들을 하나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했다. 관능의 전성시대를 선도한 톰 포드가 1994년 구찌를 이끄는 디자이너가 되었고, 뒤를이어 2006년 프리다 지아니니, 2015년 알레산드로 미켈레, 2023년 사바토 데 사르노가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 패션계 중심에서 그들이 선보인 패션의 새로운 뉘앙스는 매번 시대를 흔들었고, 열렬한 환호 속에 팬덤을 낳았다. 시대마다 재능 넘치는 이들과 동행하며 기념비적 패션 여정을 형성해온 구찌. 그리고 다가오는 시즌, 2025년 9월에 또다시 패션사의 한 장을 빼곡히 채울 얼굴이 등장한다. 발렌시아가의 수장으로 새로운 패션 패러다임을 이끈 뎀나의 정신이 앞으로 구찌 하우스와 어떤 강렬한 스파크를 만들어낼까. 생각만 해도 짜릿한 전류가 온몸을 일깨우는 듯하다. 이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이 그러했듯, 구찌 하우스의 고유성과 욕망을 어떠한 방식으로 흥미롭게 재편할지 두고 볼 일이다. 5월 15일, 구찌 2026 크루즈(GUCCI CRUISE 26) 쇼를 위해 팔라초 세티만니를 찾았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지점에서 구찌의 히스토리를 품은 피렌체의 팔라초 세티만니는 더없이 근사한 쇼 베뉴로 변모했다. 구찌 아카이브 룸을 둘러보는 매력적인 구찌의 앰배서더와 프렌즈, 전 세계에서 모인 프레스를 비롯한 게스트로 그 공간이 들뜬 웃음과 플래시 세례로 채워질 무렵, 드디어 첫 번째 룩이 등장하며 아카이브 재탄생의 신호탄을 쏘았다. 패션의 역사가 종횡하던 시간의 흐름을 되새기듯 줄무늬 프린트, 층층의 레이스, 탐미적 자수 장식이 등장했고, 직물 생산으로도 유명한 피렌체답게 브 로케이드, 자카드, 실크, 벨벳 등 다채로운 소재가 어우러져 보는 이들의 두 눈을 미혹했다. 벨트 버클, 인레이, 신발 뒤꿈치 등에 GG 모노그램뿐만 아니라 그래픽적 싱글 G 패턴이 마치 구찌 가문의 인장처럼 곳곳에 흥미로운 자취를 드러냈다. 구조적으로 과장된 어깨 라인이 안기는 레트로 무드의 시대정신, 오버사이즈 실루엣이 보여주는 파워풀한 이미지, 매혹적인 낮과 밤을 위한 데이 룩과 나이트 룩이 혼재된 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까지… 한편 부드러운 실루엣으로 등장한 하프 홀스빗 디자인과 베니티 스타일 백 등으로 구성된 아이코닉한 가죽 아이템에선 장인들의 정교한 손길이 느껴졌다.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새롭게 선보인 ‘구찌 질리오(Gucci Giglio) 백’. 이탈리아어로 백합을 의미하는 질리오라는 이름에 걸맞게 중세부터 피렌체를 상징한 스타일리시한 엠블럼인 백합을 오마주한 우아한 실루엣이 특징이다. 나아가 구찌의 가죽공예 유산은 이탈리아 주얼리 브랜드 포멜라토와 협업한 새로운 하이엔드 주얼리 컬렉션인 ‘모닐리(Monili)’를 통해 장인정신을 한껏 꽃피웠다. 포멜라토의 1984년 아카이브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가죽, 금, 파베 다이아몬드가 목걸이와 클러치 백에 함께 세팅되어 섬세한 예술적 감각과 장인정신을 불어넣었다.

어제를 바탕으로 오늘을 살피고 내일을 기약한 순간, 피렌체를 향한 애정과 경의가 담긴 크루즈 쇼는 피날레 모델들이 피렌체 거리로 나아가 광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으로 진정한 피날레를 완성했다. 단순히 백스테이지로 퇴장하는 것이 아니라 ‘피렌체 거리로 걸어 들어가며’ 쇼가 마무리된 것. 아니, 어떻게 보면 이러한 모험은 하우스가 걸어갈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서정적인 서사였다. 마침표가 아닌, 그렇다고 도돌이표도 아닌 시작점. 하우스에 수많은 영감을 안긴 피렌체에 바치는 우아한 헌사이자, 하우스가 다시 피렌체의 품 안으로 스며들며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임을 암시하는 시적인 연출 말이다. 그리고 여운을 남기는 피날레에 수줍게 등장한 구찌 스튜디오의 팀원들, 다름 아닌 크루즈 쇼를 함께 일군 이들이 있기에! 뜻밖의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 그 인사가 장인정신의 기본을 되새기게 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다채롭게 축적된 패션의 역사적 층위에서 새롭게 쌓아 올린 그 토대는 과거의 비옥한 토양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법! 이처럼 팔라초 세티만니에서 공개된 크루즈 컬렉션은 구찌라는 ‘타임머신’을 탄 시간 여행을 선사했다. 15세기에 지어진 팔라초 세티만니라는 공간을 통해 피렌체 거리에서 구찌가 탄생한 1921년을 거쳐 2025년에 당도한다. 다음 수장의 행보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와중에 치러진 구찌 2026 크루즈 쇼는 구찌의 오리지널리티가 담긴 아카이브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구찌의 새로운 시간 여행에서 다가올 세대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닐지 그 전초전으로서만 이번 쇼를 평가하기엔 아쉬운 듯하다. 단순한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고 정의하는 문화적 아이콘이라는 면모를 강조하듯, 1921년 피렌체의 골목길에서 탄생한 구찌의 시작을 상기시킨 쇼. 나아가 이탈리아의 장인정신을 기반으로 매번 패션계를 리드하는 감각적이고 독창적인 캐릭터와 혁신적인 룩을 과감하게 선보여온 구찌의 감각적인 발자취, 그 비전을 이어나가겠다는 견고한 의지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단순한 출발점을 의미하는 이정표를 넘어 오늘날 브랜드의 정체성과 디자인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며 변모하고 진화할 것이기에. 그렇기에 단언하건대, 구찌와 피렌체는 서로를 포용하며 더욱 강렬하고 새롭게 그들의 르네상스를 꽃피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