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가 처음 선보인 펜디 컬렉션. ‘Less I, More Us(나보다 우리를).’ 런웨이 바닥에는 이 짧은 문장이 보였다. 데뷔 무대인 만큼 펜디 하우스와 새로운 팀이 함께 만드는 옷이라는 연대의 의미를 담고 있을 테다. 동시에 문구로 컬렉션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우 키우리다운 방식이기도 했다.
쇼의 시작은 블랙이었다. 구조적이지만 유연하게 흐르는 테일러링 재킷, 은은하게 빛을 반사하는 실크 자카드 셔츠와 스커트의 첫 번째 룩을 시작으로 17번째 룩까지 검정색과 테일러링이 이어졌다. ‘구조와 절제’로 펜디를 새롭게 읽어내리겠다는 키우리의 결의를 담은 듯 장식을 걷어낸 실루엣의 탐구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다. 더블 브레스티드 노치 칼라 재킷, 크로스 스트랩 재킷 수트 등 남녀 모델이 동일한 옷을 입고 연이어 나오는 장면이 반복됐다.





색이 사라진 런웨이에는 질감이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이 지점에서 두 가지 의미의 ‘현실’이 보였다. 하나는 실용으로서의 현실이다. 과도한 장식이나 이탈리아식 과장은 없었다. 테일러링과 럭셔리 사이에는 키우리가 추구해온 일상의 여유가 녹아 있었고, 그것은 매우 입고 싶은 옷이었다.
다른 하나는 감각의 현실이다. 옷은 입을 때, 만질 때만 알 수 있는 촉감이 상상되었다. 레이저 컷 가죽의 매끈함과 단단함 사이로 드러난 살에 닿는 공기의 결, 보드라운 시어링의 몽글거림, 살을 감싸는 실크의 차가운 부드러움, 작은 시퀸 조각들의 반짝임과 튤의 기분 좋은 까슬거림, 레이스의 간질거리는 투명함. 다양한 소재가 뒤섞여 밀도 높은 질감의 레이어링을 만들었다.




이번 시즌 키우리는 펜디의 하우스 코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퍼를 꽤 과감하게 사용했다. 과시보다는 해체와 재구성에 가까웠다. 오래된 퍼를 분해해 다시 만드는 리스타일링 방식은 펜디의 아카이브를 현재의 감각으로 불러오는 방법이다. 누군가의 옷장에 잠들어 있던 모피를 다시 다른 세대에게 입히는 방식. 물건이 아니라 기억을 이어 입는다는 생각은 또 다른 연대였다.
이 연대의 흐름은 협업으로 이어졌다. 키우리는 늘 여성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메시지를 덧붙여 왔는데 이번에는 현대미술가이자 프로 궁수인 SAGG 나폴리의 “Rooted but not stuck.” “Loyal but not obedient.” 등이 모피 풋볼 스카프와 티셔츠 위에 적혀 있었다. 뿌리를 두되 거기에 갇히지는 않는 상태. 어딘가에 속하지만 완전히 흡수되지는 않는 관계. 전통을 인정하지만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는 태도다. 펜디의 아카이브를 자신의 감각으로 다시 해석하겠다는 키우리의 뜻이 읽혔다.




칼 라거펠트를 떠올리게 하는 턱시도 칼라 초커, 킴 존스 시기의 크로스 스트랩 재킷의 오마주도 있었다. 이전 디렉터들에게 보내는 인사와 함께 이어진 레이스 이브닝 드레스의 행렬은 절제되어 있었지만 분명 키우리의 언어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웠던 것은 바게트 백이었다. 매 시즌 장식과 변주로 등장하던 바게트는 키우리가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펜디에 있었을 때 만들었던, 말 그대로 바게트처럼 끼고 다니는 작은 가방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키우리와 함께! 더불어 이번 시즌에는 어깨에 걸칠 수 있는 스트랩이 더해져 두 손이 자유로워졌다. 키우리는 그렇게 펜디의 DNA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것들을 지금의 현실 속으로 다시 옮겨 놓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