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가 아니었다면 아사히신문 본사에 들어가 볼 일은 없었을 거다. 도쿄 패션위크의 많은 쇼는 시부야 히카리에를 중심으로 열리지만, 몇몇 디자이너는 컬렉션에 맞춰 전혀 다른 장소를 택했다. 쇼를 따라간 끝에는 미처 몰랐던 도쿄가 있었다.

pillings

그 아사히신문 본사에서 쇼를 연 주인공은 필링스(pillings). 이번 도쿄에서 가장 내 취향이었던 브랜드이기도 하다. 2025년 LVMH 프라이즈 세미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무라카미 료타의 브랜드로, 손뜨개를 중심으로 섬세하고 조금은 엉뚱한 옷을 만든다. 평소 아사히신문의 독자 투고란을 즐겨 읽는 무라카미는 그곳에 실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이번 컬렉션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독자의 사연은 니트와 자수, 프린트 곳곳으로 옮겨졌다. 독자들의 이야기가 옷이 되고, 그 옷이 다시 신문사로 돌아온 셈이다.

ORIMI

신문사에 이어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이어진 쇼. 오리미(ORIMI)는 도쿄 FM 홀(TOKYO FM Hall)을 이번 시즌의 무대로 골랐다. 디자이너 오리미 켄타가 10대 시절 처음 마주한 하라주쿠에는 저마다 제멋대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 모습에서 해방감을 느꼈던 그는 요즘 거리에 ‘정답’ 같은 옷차림이 늘었다고 말한다. 이번 시즌 테마는 ‘갖춰 입은 옷(Properly Dressed)’. 이름과 달리 옷에는 곳곳에 삐딱한 구석이 있었다. 반듯하던 재킷은 앞자락에서 느닷없이 흐트러지고, 카시라(CA4LA)와 협업한 모자에는 점잖은 리본 대신 신발끈이 달렸다. 오리미에게 제대로 입는다는 건, 꼭 얌전히 입는다는 뜻은 아닌 모양이다.

Soduk

시부야의 파르코가 잠시 누군가의 집으로 변모했다. 쿠도 츠카사가 이끄는 스도크(soduk)의 대표작 ‘LOVE’ 티셔츠도 원래 파르코 광고를 위해 만든 옷이었으니, 둘의 인연은 제법 오래됐다. 이번 시즌에는 고향 오키나와와 주변 사람들에게서 ‘LOVE’를 수집했다. 파르코 10층에는 여러 개의 방이 생겼고, 모델들은 그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다. 오키나와의 오리온 맥주와 협업한 티셔츠와 모자도 등장했다. 음악 라인업도 꽤 근사했다. 키드 프레시노가 쇼 음악을 맡았고, 피날레에는 카네코 아야노가 라이브로 노래했다. 옷과 음악, 사람까지, 좋아하는 것들을 한자리에 모은 스도크식 집들이!

KHOKI

거대한 창고 안에 집 한 채가 들어섰다. 코키(KHOKI)는 데라다 창고(Warehouse TERRADA)에 디자이너 아베 코키가 자란 야마나시의 집을 재현했다. 현관과 거실, 주방, 침실을 차례로 만들고 공간을 채운 소품의 절반가량은 디자인팀 멤버들이 각자의 본가에서 직접 가져왔다. 옷에도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묻어났다. 어머니의 옷장에서 꺼낸 듯한 레이스와 자수, 오래된 집에서 봤을 법한 색과 무늬가 코키 특유의 패치워크와 뒤섞였다. 누군가의 가족 앨범을 들여다보는 듯 꽤 사적인 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