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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불리는 작품들의 멋진 점은, 그 안에 들어가 감상할 때까지 어떤지, 얼마나 훌륭한지 가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교향곡을 연주에 필요한 악기 수로 판단할 수 없으며, 영화를 출연 배우의 개런티로 알 수 없고, 또한 소설을 그 길이로 파악할 수 없다. 책이 두꺼우면 읽기 어렵겠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런 추측은 종종 배신당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야기가 짧으면 여운도 길지 않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짧지만 깊고, 때로 복잡한 이야기들의 세계가 바로 단편집이다.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는 한 남자가 실연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글이다. 아니다. 실연은 주인공 유니오르의 삶 중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모든 사람의 삶이 그렇듯이 말이다. 2007년 발표한 첫 장편소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단박에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주노 디아스는 두 번째 책으로 9편의 단편을 엮은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를 발간했다. 이야기들은 연속적인 동시에 독립적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유니오르의 형 리파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두 형제의 여자들을 만날 수 있다. 리파는 만나는 모든 여자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잘생긴 남자였다. 하지만 병에는 이길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여자를 만났지만 결국 죽음이 그를 데려갔다. 동생인 유니오르는 또 어떤가. 책의 첫 문장은 이러하다. ‘난 나쁜 놈이 아니다.’ 여자와 헤어진 뒤 저런 말을 하는 남자라면 이미 보나마나다. 결별의 이유는 그의 외도였다. 두 형제의 여성 편력 덕분에 이 책에는 여자와 섹스를 암시하는 무수한 비속어가 등장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또 다른 단편 <겨울>은 두 형제의 어머니가 미국에서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던 시간을 담았다. ‘어머니는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고, 자식이나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이야기 하고 싶었다.’ 견딜 수 없어서 집밖으로 나서지만 갈 곳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던 어머니의 눈물과, 그 눈물을 못 본 척하는 두 아들. 짧은 이야기들이 모여 도미니카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가족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는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와 또 다른 미국을 보여준다. 이 연작소설은 사실 20세기 미국 문학 강의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수업에서 교재로 쓰이는 작품이다. 셔우드 앤더슨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작가로 성장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는 레이 브래드버리부터 윌리엄 포크너까지, 수많은 미국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소설이다. 그 이유는 이 연작들을 관통하는 현대적 외로움의 정서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이 연상되는 와인즈버그는 가상의 도시일지 모르지만 그 이름을 서울이라 바꾸어 불러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작가가 43세 때 발표한 이 소설집에서 가장 먼저 쓰인 작품은<손>. 윙 비들바움이라는 남자의 ‘손’이 주인공이다. 동네의 자랑이라고 할 이 표정 많은 손은, 딸기 수확에 큰 재능을 보였으며 젊을 때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을 성추행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앤더슨의 소설에서 희망은 작 게 부풀고 쉽게 꺼지며, 그 격렬한 심경의 변화를 아는 것은 오직 당사자뿐이다. ‘세계 어디에나 진실들이 널려 있었고 그 진실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하지만 작가는 진실을 독점하고자 하고, 그 진실에 의거해 살아가려고 하면 그 순간부터는 아름다움이 아닌 ‘그로테스크’가 생겨난다고 소설집 첫머리에서 주장한다. 이 책은 그렇게 절망한 사람들의 소외된 정서를 이야기한다.

이기호의 짧은 소설 40편이 실린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는 앞의 두 소설과 비교하면 한층 경쾌하다. 2백52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삽화도 꽤 있다. 여기에도 많은 이들이 등장하지만, 하나같이 일상 속 시트콤 같은 순간 속의 반전 유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타인 바이러스>는 메르스가 한창 기세를 떨치던 때 인터넷을 떠돌던 유머 글을 떠올리게 한다. 비행기를 탄 남자. 그는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연신 끙끙 신음하며 잔기침을 하는 게 못내 불안하다. 심지어 말하는 걸 들으니 중동에서 30년간 살았단다. 견디다 못해 남자는 승무원을 불러 자리를 옮겨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일은 남자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된다. <초간단 또띠아 토스트 레시피>는 TV에서 본대로 또띠아토스트를 해 먹으려고 한밤중에 밀가루 반죽을 한, 부모님 신세를 지며 살고 있는 실업자의 이야기다. 쿡, 웃음이 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다. 고시텔에서 밤마다 달그락거리며 뭘 닦고 또 닦던 남자의 사연이 알려지는 순간 역시 그렇다. 이기호는 책에서 노력한 대로 풀리는 법이 없는 팍팍한 세상살이의 편린을 모둠으로 보여준다.

이 세 단편집의 공통점은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의 한 구절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로 우리는 언제나 시작에 그치고 만다’.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은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고, 사랑 역시 그러하며, 생명은 말할 것도 없다. 그저, 실패한 적 없는 것처럼 또다시 시작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