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여자의 애인이었던 남자랑 사귀긴 싫다. 친구든, 선배든, 후배든, 누구든, 아는 여자의 남자와 사귄다는 건 아무튼 별로다. 그건 사랑과 우정 중에 어느 쪽이 중요한가 결론 안 나는 토론을 벌일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이다. 여러 남자의 적이 되는 것보다 훨씬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일은 역시 한 여자의 적이 되는 일인 것이다.

현재 진행형의 관계가 아니라 이미 종료된 사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까먹기 쉬운데, 정말이지 그렇지 않다. 24개월 할부로 사서 애지중지하던 백, 어떤 구두를 신어도 애매한 내 다리를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주던 하이힐,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갔던 유럽 여행에서 산 스카프와 헤어져야 한다고 치자. 이사하면서 잃어버렸다면 그럭저럭 견딜 수 있지만, 아는 여자에게 내줘야 하는 건 용서할 수가 없다. 지난 3년간 처박아놓고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던 물건이라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한때나마 물고 빨고 하던 남자친구다. 전남편과 그의 새 아내인 내 친구가 애정 가득한 입맞춤을 나누는 걸 보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여자는 영화에나 나오는 존재다. 출장 다녀올 때는 비행기에서 산 립스틱이 전부이던 인간이 사줬다는 티파니 목걸이, 그 지겹던 감자탕집이 아닌 도산공원 근처 스타 셰프 맛집에서의 커플 인증샷, 수족냉증이 있는 내가 저주해 마지않던 캠핑장 대신 동남아 리조트에서 보냈다는 그들의 휴가 후기에 분노하지 않는 여자는 여자도 아니다. 아무래도 내 남자였던 남자와 내 여자였던 여자의 연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 무리다.

간통법도 폐지되는 마당에 이미 끝난 연애에 끼어든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할 일은 아니다, 라는 생각도 착각이다. 아는 여자와 그녀의 아는 여자들은 나를 마음속 재판정에 세우고, 심판하고, 척결한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그 언니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나라면 찜찜해서라도 싫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난은 말하지 않고도 불만을 전달하는 여자들의 초능력 덕분에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나 때문에 그 연애가 끝난 것도 아닌데, 나는 은연중에 그 여자의 꽃밭에 불을 지른 인간으로 전락한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와 연애를 시작해서 보잘것없는 전 남친의 존재쯤 아무렇지도 않게 될 때까지, 아니 지나간 연애가 하도 하찮아서 기억도 나지 않게 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고행이 바로 아는 여자의 남자였던 남자와의 연애다. 문제는 지옥 불구덩이를 헤매게 될 것이라는 적중률 90% 이상의 예상에도 뿌리칠 수 없는 남자란 늘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일단 착시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남들 앞에서의 연애란 대체로 포장되는 탓에 가장 후질 때의 그 남자보다는 썩 괜찮은 상태인 그의 모습을 주로 보게 된다는 게 함정이다. 여자친구만 앞에 있을 때의 지질하고 비겁한 모습 대신 다정하고, 매너 좋은 남자로 빙의한 그에게 호감이 생기기 시작하면 그다음엔 저 여자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 사실은 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들의 연애나 결혼이 지속되는 내내 둘을 지켜보면서 유머 코드, 문화 취향, 식성까지 아무래도 그 여자보다는 내가 그와 더 잘 맞는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그에 대한 감정은 점점 더 치장되고 윤색된다. 때로는 그녀의 약점을 안다는 것도 이유가 되곤 한다. 연애하는 동안 심심하면 한 번씩 양다리를 걸치곤 했던 그녀는 내 친구지만 나쁜 여자고, 그 남자는 내 친구의 남자지만 동시에 딱하고 착한 남자가 되는 식이다. 엄청나게 내숭을 부리는 후배, 남친에게 잔소리는 기본 장착, 화낼 일도 아닌데 늘 짜증 부리고 화내는 그녀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 남자를 연민하고 동정하는 동안에도 사랑은 싹틀 수 있다. 게다가 내가 아는 그녀와의 연애가 끝난 뒤 그 남자가 갑작스레 내 마음속으로 훅 밀고 들어올 때는 밀어내기가 영 쉽질 않다. 짧든 길든 아는 여자와의 연애가 지속되는 동안 지켜보면서 이래저래 정도 들고, 생판 모르는 남녀에 비하면 제법 상대를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끝났어도 서로 만나면 안 되는 사이였다는 금기는 왠지 여전히 유효해서 꽤 자극적이다.

그래서 시작된 이 연애가 괜찮을지 망할지는 알 수 없다. 남들의 이목을 무시하고 만나길 잘한 내 소울메이트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 내 친구 만날 때도 그러더니 여전히 너는 한심한 놈이구나 싶은 남자인 게 밝혀지면서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확인하는 방법은 사귀는 것밖에는 없다. 도박인 줄 알지만,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다면 그 남자를 만나는 수밖에는 없다. 대체로 이런 모든 위험부담을 안고 만날 가치가 있는 남자는 별로 없다. 그렇지만 연애가 우리를 미치게 하는 건 항상 만에 하나라는 미지의 가능성이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