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친
수컷끼리 예의 좀 지킵시다

B는 내 여자친구 L의 대학 동기다. 여자친구의 말에 따르면 스무 살 때부터 서로 볼꼴 못 볼꼴 다 보며 지내온 십년 지기라 한다. 한창 바쁜 시기의 어느 날, 미치도록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시간을 겨우 만들어 여자친구를 데리러 갔다. 그런데 조수석에 앉은 L이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웃는 것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B였다. B와 내 여친은 유머 코드가 잘 통한다. 그래서인지 여친은 B와 카톡을 하거나 통화를 하다가 유난히 자주 웃는다. 그것도 아주 크고 밝고 행복하게. 내가 아무리 웃긴 얘기를 해도 그런 모습으로 웃은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날 따라 여자친구의 몸은 내 옆에 있으나 영혼은 B에게 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택시 기사가 아니라 L의 애인이다. 조수석에 앉은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 때문에 웃으면 불쾌해지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불만을 토로했다. B와 카톡 좀 그만하라고. 그랬더니 순식간에 속 좁은 이상한 남자가 됐다. “어머, 친구끼린데 말도 안돼! 설마 B를 질투해? 그건 아니지! B는 남자가 아니야. 오랜 친구라고. 뭐 이런 걸 갖고 그래.” 내 여자친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남자라는 동물들 사이에서는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친한 이성 친구는 누이와 같은 존재로 대해야 한다. 연애 중인 여사친에게는 전보다 카톡을 덜 보내고, 더군다나 한밤중이라면 메시지나 전화를 더 자제해야 한다. 이건 일종의 배려고 예의다. 서로의 연인이 오해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싱글일 때 매일 만났더라도 각자 연애를 시작하면 연락을 줄여야 한다. 애초부터 싸움의 단초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당연히 서로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쪼잔한 놈 되기 싫어 여자친구 앞에서는 B를 의식하지 않는 척하려 애쓰고 있지만, 이렇게 화가 계속 쌓이다 보면 분명 조만간 한바탕 싸울 일이 생길 것 같다. – M, 남(30세)

 

내 눈에만 보이는 흑심

C는 내 여자친구 Y의 직장 동료다. Y는 친한 동료들과 가끔 술을 마신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다. 대여섯 명에서 시작된 술자리가 2차와 3차를 거치고 나면 결국 주량이 가장 센 C와 내 여자친구, 이렇게 단둘이 남는다. 그리고 나는 그 둘이서 오붓하게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 게 정말 싫다. 자꾸 짜증 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아무 일 없이 술만 마셨고, 건전한 대화만 나눴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알코올은 인간의 자제력을 흐트러뜨리는 성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두고 싶다. 그리고 남자는 술을 마시면 앞에 앉은 여자를 평소보다 더 예쁘다고 느낀다. 이건 어느 정도 검증된 사실이다. 내 주변 친구들이 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남자는 관심 없는 여자와 단둘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관심이 있다는 것은 성적인 매력을 느낀다는 것에 가깝다. C가 Y에게서 성적인 매력을 조금이라도 느꼈기에 끈질기게 남아 단둘이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렇게 제멋대로 펼쳐지는 머릿속 상상은 C가 내 여자친구와 자고 싶어 한다는 확신에 도달한다. C의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는 내 여친과 밤을 보내고 싶다는 욕망이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타오르고 있을 것이고, 그 불에 알코올을 들이부으니 온몸으로 욕망이 표출되고 말 것이 분명하다. 여자친구 또한 C의 속내를 전혀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둘은 이미 감정의 줄타기를 하며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Y는 C가 단순한 직장 동료라고 했지만, 내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하루는 둘이 술을 마시는 자리에 Y를 데리러 갔다. 술 집에 들어가자 여자친구 옆에 딱 붙어 있던 C가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며 합석을 제안했다. 그 뻔뻔한 얼굴을 보니 기분이 나빴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굳은 표정으로 술자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집에 가는 길에 Y는 불같이 화를 냈다.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할 거면 왜 굳이 찾아왔느냐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 O, 남(26세)

 

소꿉친구 같은 소리 하네

H는 내 여친의 동네 친구다. 정확히 말하면 유치원 동창으로 부모님끼리도 잘 아는 사이다. 어려서는 목욕도 함께 했다면서 자신들의 우애(?)를 여러 번 내게 강조한 바 있다. 내 여자친구 J는 H와 집 앞 놀이터 그네에서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진로 문제를 상담하고, 연애 스토리도 모두 공유했다고 한다. J에게 H는 인생의 카운슬러인 셈이다. J의 남자 문제도 H가 꾸준히 관할해왔다고 한다. J는 사춘기 때부터 썸 타는 남자가 생기면 사귀어도 될 만한 남자인지 H에게 묻곤 했다. 그래서 나와의 관계 또한 H의 판단으로 이루어졌음을 100% 확신한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J와 사귄 지 세 달쯤 됐을 무렵 그녀는 내가 H와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며 셋이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한 카페에서 마주한 H는 자신이 판결을 내렸다고 생각해서인지 나를 가볍게 취급하는 듯했다. ‘넌 내가 J에게 허락해준 남자니라. 감사히 여기거라’ 하는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달까? 어쩌면 내가 지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H는 J에게 좋은 짝을 지어주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착각하는 듯했다. 한 시간 내내 두 사람은 내가 끼어들 수 없고 공감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대화를 했고,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셔댈 뿐이었다. 이후 H는 내게 얼굴만 떠올려도 불쾌한 기분이 드는 사람이 됐다. 그렇게 연애를 하다 1년이 되는 기념일을 맞은 어느 날, J와 둘이 있다가 한 술집에서 H를 마주쳤다. 이때다 싶었다. 이 여자는 내 여자라는 것을 보여주겠다 마음먹은 나는 여자친구의 어깨를 팔로 감싸고, H와 눈을 맞췄다. 일부러 좀 거만하게 웃기도 했다. 두 사람이 서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따금씩 J의 뺨에 입을 맞췄다. H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J와 키스하고 자고, 그녀를 만지고,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볼 수 있는 남자는 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유치원 때 네가 본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 K, 남(3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