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레트로 바이브 @인현시장

이관호(서울-털보)

인현시장은 선술집과 작은 식당들이 빽빽한 옛 풍경 그대로 60년째 충무로에서 한자리를 지킨 재래시장이지만, 젊은 사람들에겐 아직 낯선 곳이다. 좁은 시장 입구는 대로변에서 잘 보이지 않고 한번 들어서면 미로처럼 복잡한 길이 길게 이어져 탐험에 나서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노포마다 피어나는 연기를 뚫고 들어가면 시장길 중간쯤에 있는 식당 ‘서울-털보’를 찾을 수 있다. 서울털보는 낮에는 밥집, 밤에는 술집으로 운영되는 공간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이관호는 인스타그램에 #인현시장이라는 해시태그를 거의 처음으로 등장시킨 청년 사업가다.

“구청에서 재래시장에 가게를 내는 청년 사업가에게 지원을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시작했어요. 고민도 많이 했죠. 워낙 후미진 데 난 자리라 장사가 될까 싶었거든요. 한번 열심히 해보기로 마음먹고 뛰어들었는데 새로 문을 여는 가게들이 점점 생기더라고요. 지금은 독립 잡지 만드는 작업실, 드라이플라워 가게, 닭강정집처럼 젊은 주인장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 꽤 있어요. 젊고 세련된 감성의 가게들이 시장 속으로 좀 더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재래시장에 활기도 불어넣고 유동인구도 늘어나면 모두 좋잖아요.”

5~6년간 비어 있던 서울-털보의 공간은 수도와 전기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관호는 주방 시설과 화장실, 전기 공사까지 직접 하면서 많은 공을 들였고, 서울 곳곳에 버려진 오래되고 낡은 가구들을 수집해 실내에 배치했다. 그렇게 완성된 지금의 서울-털보의 레트로 컨셉트는 인현시장 특유의 분위기와 근사하게 어우러지지만, 공사 당시에는 갖은 고생을 겪었다고. 길이 워낙 좁아 짐을 옮기기 쉽지 않았고 가게가 닿아 있는 이웃 상인들과 갈등도 있었다. “에폭시를 칠할 때는 시장 어르신들이 냄새가 난다고 무척 싫어 하셨어요. 그래서 한여름이었는데도 창문을 꼭꼭 닫아놓고 에폭시 공사를 했죠. 오픈 날짜를 미루더라도 시장 사람들에게 공사로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이곳에서 잘 지내려면 원래 계시던 상인들과 갈등 없이 어울리는 것도 아주 중요해요.”

 

 

재즈가 흐르는 시장 @후암시장

김성(사운드독)

보수를 마치고 빛이 잘 드는 현대식 시장으로 탈바꿈한 후암시장. 큰길에서 한 골목 더 들어가면 참기름 냄새가 풍기는 방앗간,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킨 정육점, 매일같이 북적거리는 국숫집이 보인다. 시끌시끌한 시장 소리만 들리던 이곳에 몇 달 전부터 재즈 음악이 잔잔히 흐르기 시작했다. 방앗간과 고깃집 사이에 자리한 ‘사운드독’은 시장 한가운데에 자리를 펴고 음악을 듣는 재즈 바다. “재즈 바를 여는 것이 평생 꿈이었어요.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해보자 싶어 자리를 보러 다녔는데, 시장 안으로 들어오니 월세가 아주 저렴하더라고요. 재즈는 원래 이렇게 깊숙한 곳에 찾아와 들어야 제맛이죠. 방앗간 기계가 쿵쿵대고, 고춧가루 냄새도 좀 나고. 그런 곳에 재즈가 흐르는 거예요. 고급 재즈 바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듣는 것보다 이 편이 더 재미있지 않아요?”

저녁 6시가 되면 후암시장 상인들은 가게를 정리하며 하루를 마치고, 사운드독은 그때부터 재즈의 볼륨을 높인다. 해가 지는 순간부터 온전한 재즈의 시간이 시작되는 셈이다. 라이브 공연이라도 열리면 뮤지션들이 방앗간 앞에 자리를 펴고 악기를 연주하는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전에 후암시장은 가게들이 문을 닫으면 하도 어두워서 인적이 드물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불을 켜두고 음악을 트니까 밤에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죠. 어린 손자와 할아버지가 손을 잡고 찾아오기도 하고, 젊은 사람들이 산책하다 들러 맥주 마시면서 재즈를 듣다 가기도 해요.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아요.”

김성의 플레이리스트는 주로 1960년대 이전의 올드 재즈로 채워져 있다. 비 내리는 날과 해가 좋은 날의 시장 분위기가 다르듯 그의 플레이리스트도 날씨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는 장고 라인하르트(Django Reinhardt)의 기타 연주곡 ‘뉘아주(Nuages)’예요. 이 가게를 열고 나서는 젊었을 때 좋아했던 비가 다시 기다려지더라고요.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곳이 어떻게 달라져갈지 알 수 없지만, 재즈가 흐르기 시작한 뒤로 이 시장이 더 재미있는 장소가 됐다는 것만은 확신해요.”

 

 

지하 시장 아틀리에 @서울중앙시장 신당창작아케이드

이재훈(Bloc)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신당창작아케이드는 서울중앙시장의 지하보도로 내려가면 연결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다. 1971년에 지어진 지하 쇼핑 아케이드에 있는 57개의 빈 점포를 리모델링해 작업실로 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고, 공예와 디자인 분야의 아티스트들에게 지원하는 입주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1층은 대형 재래시장으로, 지하는 작가들과 상인들이 공존하는 아케이드로 쓰이는 독특한 구조인 이곳에서 이재훈은 4년째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조명과 테이블 오브제 등 금속 소재를 활용한 디자인 소품을 만든다.

“1년마다 심사를 받아 입주 기간을 연장해요. 우선 이곳에서 지내면 경제적인 부담이 많이 줄고, 문화재단의 지원을 가까이서 받을 수 있어서 좋아요. 전시나 페어에 참여할 기회도 많고요. 금속 작업에 필요한 재료를 파는 을지로나 공구상가가 가깝다는 것도 장점이죠. 제가 있는 곳 바로 옆이 공동 작업실이에요. 금속이나 도자기 공예에 쓰이는 덩치가 큰 장비들이 놓여 있죠. 소음이 많이 생기는 기계 작업은 상인들이 가게를 닫고 나갈 때쯤 진행하는 편이에요. 여긴 그렇게 서로 맞춰가면서 생활하는 곳이죠.”

저마다 다른 예술 장르를 다루는 아티스트들과 나란히 입주해 생활하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이점은 다른 작가들과 영감을 주고받으며 편하게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다른 소재를 섞거나 아이디어를 결합하는 협업 프로젝트도 종종 진행한다. “섬유를 다루는 작가, 가죽 디자이너를 이곳에서 만나 조명 작품을 함께 만든 적이 있어요. 가끔은 작업에 금속 구조물이 필요한 작가를 돕기도 하고요.” 시장 특유의 냄새와 어수선한 분위기가 생소하기만 하던 때도 있었다. 여러 장단점 사이에서 이재훈은 공간의 매력을 점차 알아갔고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시장 미화 프로그램에도 참가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시장인 만큼 외부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질 때도 있지만 상인과 작가들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곳만의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