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호명하지 않을 이름에게

어제는 비가 오더니 오늘은 맑다. 사랑할 때나 썼지 사랑했던 이들에게 쓰는 편지는 처음이네. ‘안녕’이라거나 ‘잘 지내니’ 같은 인사는 생략할게. 이 말은 진심으로 안부가 궁금할 때만 쓰고 싶거든. 연애 관계가 끝나고 더 이상 교류가 없다면 그건 아는 사이라기보다는 알던 사이라고 해야 맞겠지? 지금의 우리처럼 말이야. 추억이라는 말은 좀 거창한 것 같고, 그냥 함께 나눈 시간은 사라지지 않은 채 과거 어딘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해. 시간에서 떨어져 나온 현재진행형의 삶만이 각자 앞을 향해 달려간다는 생각. 그래서 네 삶은 좀 살 만한지 모르겠다. 나? 나는 살 만해. 요즘은 그거면 족하다 싶어.

사랑이란 감정은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늘 충만하게 알아챘는데, 상처 주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영 어렵더라. 독학이 잘 안 되는 분야야. 그럴 때면 옛 이름들은 자주 나보다 더 너른 품이 되어 내 모난 부분을 둥글게 안아주곤 했지. 존중 속에 성장한다는 기분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 것 같아. 고마워. 하지만 그 극진했던 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을 여태 만나지 못한 것 같아. 내가 이토록 삶에 애착이 강한 사람이었나 싶던 때도 언제나 헤어진 후의 시간을 감내하면서 맞았거든.

싫다는 나를 억지로 데려가려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다면 쌍욕을 날리는 대신 정강이를 차줄까 봐. 그래도 길바닥에서 싸우는 짓만큼은 안 하고 싶어. 누구랑 연애해도 그건 제일 싫더라고. 늦은 밤 수화기 너머로, 멀리서 메신저로 내게 보내준 사랑과 걱정은 지난 시간 속에 잘 간직할게. 그러니 괜히 ‘쿨병’ 걸린 척 내 인스타그램 팔로하고 그러지 마. 보는 거야 어쩌겠냐마는 팔로 삭제하는 입장에선 매번 불필요하게 수고스럽다. 이젠 말 안 해도 그 정도 매너는 갖췄을 줄 알았는데. 안타깝네.

진짜 이별은 헤어짐이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때 비로소 완전해지더라. 너와 갔던 장소에 다시 가도 생각은 나지만 슬프지 않은 지 꽤 오래됐어. 어디서든 네 이름의 잔상을 발견해도 기억과 감상이 분리된 후의 내 삶은 새로운 기억을 덧씌울 거야.

끝내 이름은 부르지 않으려고 해. 혹시 내 얘기인가 싶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사실만 밝힐게. 다만 너도 어디선가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어. 범인류적 차원에서의 잘 살라는 얘기야. 그럼 다신 부를 일 없을 이름들, 이만 안녕. writer 함수린(<삶이 고이는 방, 호수> 저자)

 

내 연애를 망친 8할은 술

2014년 8월 19일 나는 생일날 만취해서 이런 일기를 썼어. ‘헤어진 애인들을 다 보고 싶다. 나란히 앉혀두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싶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질 때까지 동공을 마주 보고 싶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아마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테고, 일어난다 해도 너희는 ‘쟤는 여전하구나. 개 버릇 남 못 주지’ 하며 콧방귀나 뀔 테니. 우리 상황을 설정해보자. 중학교 때부터 7년간 만난 첫사랑, 그 첫사랑을 두고 바람을 피운 치기 어린 동창, 대학교 때 CC, 일은 안 하고 연애만 했던 신입 아르바이트생 등 사랑스러웠던 사람들을 나란히 앉혀두고 함께 술을 마시는 상황이야. 그곳은 밤새 불 켜진 심야 식당이고, 나는 재야의 고수처럼 중앙에서 안주를 만들 거야. 주인이니까 가끔씩 너희에게 말도 걸 거야. 참고로 너희는 이미 집에 가는 걸 잊을 만큼 취했다고 치자. 몇 자 안 되는 편지에서조차 술이 등장하니 이쯤 되면 내가 여전히 술독에 빠져 산다는 것쯤은 눈치챘겠지.

예전부터 나는 애정을 품은 누군가를 앞에 두고 술 마시는 게 좋았어. 소란스러운 술집에서 빈 병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봉인이 해제되는 매력이란 것이 너희에게 있었거든. 웃을 때마다 귀엽게 사라지는 눈이나 가까이에서 듣고 싶은 목소리나 안주 삼기 좋은 잔잔한 유머나 그런 것 말이야. 반대로 나는 빈 병이 늘어갈수록 추태를 부렸지. 갑자기 화를 내며 폭언하고, 혼자 한껏 즐거워서 밤새워 마시자고 조르고, 친구들과 클럽 간다고 외박을 밥 먹듯 했어. 나도 알아, 내 연애를 망친 원인의 8할은 술이라는 거.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나니까 이제는 아무리 신나도 집에 잘 들어간다. 흥을 주체할 수 없을 때 나는 방에서 혼자 춤을 춰.

하지만 기억하니? 혜화 로타리 골목, 어느 가로등 밑에서 많은 인파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투적인 키스를 했었지. 스무 살이 된 그해 겨울, 을왕리 해변에서 강소주를 마시며 널 위해 아이유의 ‘마시멜로우’를 불렀고, 종로 치킨집에서 너는 홍상수 영화 속 누군가처럼 그렇게 내가 좋다고도 했잖아. 한바탕 싸우고 만취해서 찾아간 너희 집 앞에서 드라마처럼 화해했던 일도 잊을 수 없지. 그날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큰해진다. 지금보다 좀 더 낭만적인 순간이 술처럼 흘러넘쳤던 것 같아. 내 연애에서 술을 떼려야 뗄 수 없던 건 내가 소심하기 때문이었어. 적당히 취한 내가 평상시 모습보다 좋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거든. 좀 더 용기 있고 쿨하며 재밌는 인간이 되는 것만 같더라. 변명하려는 건 아니지만 격의 없이 친해지는 데 술만큼 좋은 걸 난 아직 못 찾았다.

그래, 나는 하나도 안 변했어. 여전히 예의 ‘8할’까지 끌어안고 살아. 너희는 이성적 잣대로 날 재단했고 우리가 헤어진 이유의 대부분이 내가 바라는 ‘끓어오르는 뭔가’가 없었기 때문이잖아. 아쉽게도 내 머릿속엔 가장 흥청망청 바보처럼 사랑했던 기억만 남았고. 나는 아직도 종종 내일이 없을 것처럼 행동하고, 미치도록 재밌는 것들에 스스로를 내던지며 살아. 혹시라도 이런 불나방 같은 내가 그립다면 언제든 연락해. 우리 서로 애인으로는 영 아니지만 친구로는 또 괜찮을지 모르잖아(그냥 술이나 마시자는 말이야). 끝으로 너희에게 내가 좋아하는 시 한 구절을 선물하고 싶어. ‘나는 왜 개미들의 행진을 쫓아가는가/ 아무 일 없어도 왜 숨이 막히는가/ 왜 키스 없는 계절을 내버려두는가’ 오래도록 몸 건강히 잘 지내길 바란다. 그런데 계산은 하고 가야지. writer 백가경(프리랜스 에디터)

 

지나고 나면 아름다웠던 추억은 없다

시간이 흐르면 좋은 기억만 남는다는 말. 내 지난 연애에 그런 말은 안 통해. 생각해보면 헤어진 데는 다 이유가 있었지. X는 바람을 피우다가, 또 다른 X는 매일같이 내 스케줄을 알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나를 들들 볶다가, 마지막 X는 사소한 다툼이 쌓여서 결국 헤어진 건 기억하고 있겠지? 연말이 되면 1, 2월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내 연애는 설레던 처음의 기억은 사라지고 질질 끌다 결국 헤어진 지질한 순간만 남아 있더라. 벌써 수년이 흘렀으니 ‘그때 내가 어려서 그랬지, 생각해보면 괜찮은 사람이었지’ 하고 회상할 법도 한데, 난 아니야. 내 인생에서 좋지 않게 끝나고, 회복되지 못한 관계는 연애뿐이었어.

그렇다고 이제 와서 너희를 탓할 생각은 없어. 이미 헤어지는 순간에 화는 낼 만큼 냈으니까. 그보다 왜 나의 연애 관계는 늘 짜증 나고 화나는 순간만을 남기며 사그라지는지, 잠 못 드는 밤에 괜히 건드려보고 싶은 X 하나가 없는지가 궁금할 뿐이야. 바람을 피운 첫 X는 일단 넘어가자. 네가 바람의 이유로 나를 언급했을 때부터 이별의 책임에서 날 빼기로 했거든. 그럼 집착남 X와의 연애는? 가물가물한 기억의 몇 가닥을 끌어올려보자면 초반에는 좋았던 것 같기도 해. 다정하고 친절했으며 집착이 관심이나 내 걱정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좋게만 보이던 행동이 집착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물론 귀찮다는 이유로 답장을 안 한 내 행동이 큰 몫을 했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애초에 만나서 좋을 게 없는 관계였던 것 같아. 마지막 X와는 왜 그렇게 싸우기만 했지?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만나기로 한 장소가 엇갈려서, 뉴스를 보다가, 어떨 때는 이유도 없이 싸웠던 것 같아. 게다가 너는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끝을 봐야 했고, 나는 중간에 지쳐 그만했으면 하는 성향이라 이 싸움은 더 끝을 내기 힘들었던 것 같아. 서로 감정이 사그라드는 지점이 달랐으니까.

이렇게 돌이켜보니 어쩌면 나는 연애라는 관계가 맞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난 문제가 생긴다 싶으면 항상 회피하려고 했거든. 실컷 싸우려 들다가도 빨리 끝내고 이걸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고, 계속되는 집착으로 인한 문제를 대화로 풀려고 하기보단 소통 창구를 닫는 식으로 무마하려 했던 것 같아. 그래서 너를 떠올릴 때도, 그때의 나를 떠올릴 때도 좋은 기억이 없지 않을까 싶어. 그럼에도 계속해서 사랑하며 살아야 하고, 연애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까? 아마 너희는 이미 다른 연애를 시작했겠지? 아마 나는 당분간은 연애를 하지 않을 것 같아. 지금도, 지나고 나도 아름다운 기억은 혼자일 때가 훨씬 많거든. 혹시라도 내가 잘 지내나 궁금할까 봐 하는 말인데, 나는 너희 없는 지금이 제일 좋아. writer 이혜진(연애 칼럼니스트)

 

여보세요

‘지금, 통화 괜찮아요?’ 그의 문자는 마법을 거는 주문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짬을 내서 전화했다.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게, 나의 말을 전하는 게, 이렇게 달콤한 시간이었나? 수화기를 넘어오는 그의 목소리는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당시 내 모든 여가는 그에게서 시작되었고, 업무 외 모든 시간은 그와 함께했다.

당시 사회 초년생이던 내가 바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의 매일 자정 무렵이나 아침이 되어서야 퇴근했지만, 그런 생활에 적응해야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하루를 몽땅 투자해서라도 견뎠다. 그는 이런 나를 ‘구름이’라고 불렀다. “네가 너무 바빠서 자주 볼 수 없으니까. 자주 통화하고 상상하지만 나와 섞이지 못하고 구름처럼 흘러가버리는 것 같아.” 마침 내가 그를 부르는 애칭은 ‘하늘이’였다. 그는 푸른색이 잘 어울렸고, 햇살처럼 환하게 웃는 여자였다. “하늘은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을 감싸 안아주잖아. 넌 내게 꼭 그런 사람이야.” 하늘이는 나보다 사회생활을 몇 년 더 일찍 시작했지만,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나를 가르치거나 훈계하지 않았다. 내 삶의 무게를 멋대로 판단하지 않고 다만 들어주는 사람. 이게 내가 그를 하늘이라 부르는 이유였다.

‘이제 씻고 누웠는데, 지금 전화해도 돼요?’ 퇴근 이후엔 언제나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응!’ 밤이건 새벽이건 하늘이의 답장도 같았다. 새삼스럽게 안부를 묻고, 온갖 사소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시간. 하루를 마무리하는 가장 사적인 일정. 밀려오는 졸음을 참느라 기를 쓰다가도, 깨기 싫은 꿈을 꾸듯 즐거워했고, 우리는 각자의 침대에서 휴대폰을 귀에 대고 한참을 까르르 웃었다.

피곤해서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아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귓가에 또렷이 울렸다. “졸려서 미안해.” 그러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통화 중에 잠들기도 했고, 쏟아지는 졸음이 밉지 않고 달콤했다. “같은 꿈 꾸자.” 내가 이렇게 기름진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사무실에서는 그렇게 버석거렸는데. 통화는 달콤했지만, 멀리 있는 몸의 거리를 메울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새벽일지언정 우당탕 만나 함께 지새운 밤도 종종 있었지만, 서로의 체온을 자주 느낄 수 없다는 건 하늘과 구름 사이를 갈라놓는 벽과 같았다.

‘지금, 통화 괜찮아요? 나, 할 말 있는데.’ 하늘이는 평소처럼 문자메시지를 보낸 건데, 그날은 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반듯한 그 문장이 우리 관계의 종지부처럼 읽힌 건, 메울 수 없는 몸의 거리를 견디지 못해 시들던 걸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어진 통화는 서로 주고받는 말보다 정적이 길었고, 조심스럽게 고른 듯한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깊은숨이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몇 년이 지나서야 돌아보네. “이제 전화 안 할 거예요.” 별안간 네가 차분하게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우리의 관계가 허물어지는 걸 느꼈어. 나는 어떤 말도 못 하고 머뭇거렸지. 그러다 한숨처럼 이런 말을 했지. “그래요.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지. 아니, 고마웠어요.” 애써 의연하게 말했지. 그렇게 통화를 끝내고 나는 다시 업무에 복귀했어. 연이어 일했지. 6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몇 년째 쉬지 않고 일만 하며 지내는 건, 네가 곁에 없기 때문일까? 구름은 여전히 바람 따라 흐르네. writer 김유진(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