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ADCASTING

복길(칼럼니스트)
올해 방송인 박세리를 처음 만났고 김민경을 다시 보았고, 이효리에 열광했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

01 올해의 가족 – 가족 프로그램과 드라마

올해만큼 가족과 오랜 시간을 보낸 적이 또 있었나. 그 때문일까, 텔레비전은 계속 가족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 같았다. <부부의 세계>와 <1호가 될 순 없어>가 ‘부부’라는 관계에 대한 질문은 물었고,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는 혈연으로 이어져 있어도 가족 역시 타인임을 상기시켰다. 형식은 달랐지만 모두 ‘화목한 정상 가족’이라는 통념 바깥에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가족이란 어떤 형태로도 정의될 수 없는 관계임을 인정해야 더 많은 사람이 가족이란 존재로부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불륜과 치정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조차 그런 역설을 읽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무사트 가짜사나이

02 올해의 광기 – <가짜 사나이>

“인성 문제 있어?” 민간인들이 극한의 훈련이란 명목으로 인격 모독을 당했다. 그런데 다들 참아내야만 했고, 참아낸 사람에겐 박수를 쳐줬다. 사람들은 ‘가짜 사나이’를 ‘진짜 사나이’로 만들어주는 영상 속 교관들에게 열광했다. 나는 3월, 의심스러운 가치를 정당화하는 종교 단체가 역병의 근원지가 되었음을 상기했다. 역병은 가려져 있던 광기를 수면 위로 드러나게 했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광기에 사로잡혀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게도 했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03 올해의 히어로 – 안은영과 슬릭

상상만 하던 현실이 눈앞에 닥친 탓인지 올해는 유독 디스토피아를 전제한 SF 작품이 많았다. <반도> <사냥의 시간> 곧 개봉할 <승리호>까지. 상상력으로 그려낸 미래에서 유독 빛나는 히어로가 있었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안은영과 <굿 걸>의 슬릭이다. 그들은 히어로가 아닌 침입자 취급을 받으며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고 막아내는 대신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상정하고 편견이 뿌리 박힌 사람들을 불편함하게 했다. 퀴어와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을 말하며 규칙을 흔들고, 이 이상함을 받아들이라고 온몸으로 말하며 환멸로 가득한 시대를 구원하는 진짜 히어로들.

 

유튜브 오늘부터 운동뚱

04 올해의 스포츠 – 운동뚱 김민경

농구와 배구는 정규 시즌을 조기에 마쳤고, 시즌의 대부분을 관중 없이 진행한 프로야구는 겨울에 포스트시즌을 치렀다. 그 쓸쓸한 빈자리를 메운 것은 내가 즐겁고 내가 건강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한 <오늘부터 운동뚱>의 김민경이었다. 사람들은 편견에 맞서고, 스스로에게 솔직한 그의 모습을 보며 스포츠가 주는 당당한 감동을 느꼈다.

 

방송 신박한 정리

05 올해의 장소 – 집 예능

먼 타국으로 여행을 떠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외할머니 댁에 방문하는 콘셉트의 <여름방학>과 시골에 집을 짓고 살며 주거란 무엇인지 물어보는 MBC의 유튜브 채널의 <오느른>이 소소한 인기를 끌었다. 2015년에 선보인 2PM의 노래를 ‘우리집’은 갑자기 차트를 역주행 했고, 좋은 집을 고르는 부동산 예능 <구해줘 홈즈>와 집 정리 인테리어 예능 <신박한 정리> 역시 인기를 끌고 있다. 사람들은 부엌에서 달고나를 만들고, 거실에서 ‘틱톡 챌린지’를 찍었다. ‘집’은 그야말로 올해의 핫플레이스였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이 현상에 또 다른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집이 없는 사람과 집에 있을 수 없는 사람, 거리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어디에서 머물러야 하는지. <거리의 만찬>이 폐지되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곳도 더이상 없다. 비통하다.

 

드라마 인간수업

06 올해의 지옥 – 각종 범죄

세상의 부조리는 ‘인간은 다 그렇다’며 선과 악의 경계를 지울 때 발생한다. <인간수업>은 성매매를 알선하는 청소년 디지털 포주 ‘오지수’를 통해 범죄의 불가항력에 대해 말하며 끊임없이 ‘너는 결백한가?’하고 반문한다. 그러나 손정우가 죄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조주빈이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회에 사는 나는 단죄를 피하려는 가해자들의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라는 항변에 더는 속지 않는다. 삶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인간은 복잡 미묘한 존재지만, 그럼에도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악인의 최후를 목격하는 사람일 것이다. 지옥은 너나 가라.

 

베테랑 보아

07 올해의 베테랑 – 나훈아 그리고 보아

압도적인 관찰력과 쇼맨십으로 무장한 김신영의 부캐 ‘둘째이모 김다비’를 제외하면 대부분 옛날 트로트를 리바이벌 한 것에 불과한 수많은 트로트 관련 프로그램에 지쳐갈 때쯤 추석에 나훈아가 등장했다. 압도적이었다. 사랑하는 이와의 낭만을, 잊고 있던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장 빛나는 청춘에게 응원을, 함께 늙어가는 세월에 위로를. 마치 인류를 향한 콘서트 같았다. 올해 데뷔 20주년을 맞은 보아도 그 쇼를 보고 인스타그램에 벅찬 소감을 남겼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미래의 추석엔 ‘보아 쇼’를 보게 되리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만의 고유함을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흐름을 읽고 변화해야 하는 직업의 숙명. 나는 그 어려움을 차마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훈아에게 보아를 겹쳐 보며 그들이 오랫동안 나와 함께하기를 바랄 뿐이다.

 

방송 놀면 뭐하니 환불원정대

08 올해의 언니 – 환불원정대

“가르쳐줘서 고마워. 또 가르쳐줘.” <온앤오프>에서 동영상 편집을 가르쳐주는 이소라에게 엄정화가 말했다. 어떤 CF를 찍고 싶으냐는 질문에 “유기농 생리대”라 말하던 이효리는 ‘깡’ 신드롬을 등에 업은 비를 제압했고, 제시는 여성의 신체를 소재로 자유롭게 유머를 구사해 이제껏 여성들이 누리지 못한 웃음을 만들었으며, 화사는 본인이 갖고 있는 불안과 콤플렉스를 드러내는데 거리낌 없이 솔직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유연함, 끊임없이 갈고닦아 만든 자기 확신, 꾸밈이 없기에 모두에게 전해지는 긍정적인 에너지,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끌어안고 신중하게 대하는 태도. 정형화된 여성성이 아니라며 붙여진 ‘쎈언니’, ‘환불원정대’ 같은 무례한 수식어는 이 많은 매력들을 조금도 가리지 못했다.

 

 

FOOD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
술, 음식, 리빙 등을 다루는 프리랜스 에디터. 올해는 자기 폭로성 에세이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를 출간했다.

틱톡 요리 달고나 커피

01 올해의 미식 루키 – 틱톡 요리

글로벌 팬데믹 덕에 빠르고 가벼운 동영상 플랫폼 틱톡이 더 주목받기 시작했고, 기존의 쿡방 역시 이 플랫폼에 맞춰 올해 새롭게 변했다. 포인트만 빠르게 축약해 보여주는 ‘틱톡 요리’는 요리의 지름길을 알려준다기보다는 새롭고 신선한 길을 보여주는 쪽이다. 달고나 커피, 팬케이크 시리얼 등이 틱톡 요리 열풍에 힘입어 더 큰 인기를 얻었다.

 

스낵 삼겹살 젤리

02 올해의 ‘괴랄’한 스낵 디테일 – 삼겹살 젤리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이 음식에서도 엔터테인먼트를 찾기 시작한 것일까? 식품 외 브랜드까지 경계를 넓힌 편의점표 ‘콜라보레이션’ 상품이 작년에 이어 꾸준히 출시됐다. 그리고 특히 올해엔 오로지 ‘재미’에 초점을 맞춘 상품도 많아졌다. 연어 초밥 모양 젤리, 삼겹살 모양 젤리, 이태리 타월 쫀듸기 등, 재미를 위해 디테일을 한껏 살린 스낵이 사람들을 웃겼다.

 

푸브먼트
ⓒ푸브먼트 @foovement

03 올해의 미식 정신 – 생각하며 즐기는 먹거리

코로나19로 인해 남아도는 식재료에 대한 활발한 사회적 논의, 인류가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15%를 차지하는 축산업을 대체할 ‘가짜 고기’의 대중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맛있는 채식 레스토랑의 인기, 지속 가능한 미식을 고민하는 푸드 스타트업의 등장. 모두 생각하며 즐기는 먹거리를 향해가는 올해의 눈에 띄는 미식 트렌드들이다. 그 덕에 못생긴 과일을 파는 어글리어스, 한국형 대체육을 개발하는 지구인컴퍼니, 밀키트에 플라스틱과 비닐을 쓰지 않는 푸브먼트와 같은 업체들도 국내 시장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인스타그래머블 술 만남의 장소 구름아양조장

04 올해의 ‘인스타그래머블’ 술 – 만남의 장소

구름아양조장이 만든 쌀탁주로 독특한 눈빛을 던지는 얼굴 표정 드로잉의 레이블이 눈길을 끄는 술이다. 생강, 후추 등의 부재료로 맛의 각을 살려 양식과도 잘 어울리는 덕분에 올 한 해 인플루언서의 인스타그램은 물론이고 위스키 바나 내추럴 와인바에서도 자주 출몰했다. 세상에 ‘인스타그래머블’한 술은 많지만 전통주가 그렇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다.

 

크로플

05 올해의 메뉴 하이브리드 – 크로플

크루아상과 와플을 합친 크로플이 올 한 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크루아상 반죽을 와플 기계에 눌러 익히는 간단한 아이디어 하나가 디저트 시장을 뒤흔든 것. 샤인머스캣으로도 김치를 담그는 민족성에 비춰볼 때 다소 소박한 아이디어지만, 파급력만큼은 굉장했다.

 

금호동 옥수동 자양동 내추럴 와인

06 올해의 미식 동네 – 금호동, 옥수동, 자양동

올해도 성수동은 뜨거웠고, 그 핫한 기운은 인근 금호동, 옥수동, 자양동까지 뻗어나갔다. 오부이용, 폼페트, 로컬릿, 고래, 금남정, 미도림 등 지금도 이 근처 핫 플레이스 지도는 더 빼곡해지는 중이다. 이 지역 인기의 중심에는 흥미롭게도 ‘내추럴 와인’이 있다. 가벼운 내추럴 와인 한 잔과 손바닥만 한 스몰 디시로 구성된 식탁이야말로 올해의 미식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풍경이다.

 

스타벅스 서머 레디 백

07 올해의 기막힌 주객전도 – 스타벅스 서머 레디 백

‘가방을 사면 커피나 맥주가 따라온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올여름엔 캠핑용 가방 열풍이 뜨거웠다. 스타벅스 서머 레디 백은 증정용 사은품이었지만 뜨거운 인기 때문에 정작 구입한 커피는 버리고 가방만 챙겨 가는 체리피커를 양산하고 말았다. 스타벅스가 ‘레디 백 대란’으로 신혼탄을 쏘아 올리면서 던킨도너츠의 캠핑 폴딩 박스, 구스아일랜드 레디 백, 에비앙 핑크 백으로 여름 내내 이어졌다.

 

팔레 드 고몽

08 올해의 굿바이 – 팔레 드 고몽

올 상반기, 1999년부터 청담동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으로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던 팔레드 고몽이 문을 닫았다. 폐업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이 고상하고 화려한 레스토랑이 문을 닫으면서 이곳에서 보낸 손님들의 수많은 기념일과 특별한 시간도 추억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11월, 청담동 재즈 클럽 원스인어블루문도 영업을 종료했다. 단정한 굿바이 인사를 건네고 싶은, 미식의 한 챕터가 끝나는 마지막 모습.

 

09 올해의 미식 지각변동 – 현대백화점 투홈

마켓컬리의 새벽 배송, 이마트의 알비백 등이 식재료 배송 방법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면 올해 7월 문을 연 온라인 몰 현대백화점 투홈은 어떤 것을 배송할지를 고민하며 그 영역을 동서남북으로 확장했다. 백화점 식품관의 높은 식재료 선별 기준과 영업 전투력을 바탕으로 몽탄의 우대 갈비, 스와니예의 디저트 등을 배송하며 미식 트렌드의 새 지평을 열었다.

 

가정식 대체 식품 미로식당 떡볶이

10 올해의 톱 셰프 – 나

올해의 셰프는 두말할 것 없이 ‘나 자신’이다. 밀 키트와 가정식 대체 식품 (HMR)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집밥 혁명’이 시작됐고, 누구나 약간의 의지만 있으면 퀄리티 높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홈 쿠커로 거듭날 수 있게 됐다. HMR보다 더 쉽게 요리할 수 있는 레스토랑표 간편식(RMR) 시장에도 불이 붙으면서 ‘미로식당 떡볶이’ 같은 대박 상품이 등장했다.

 

 

MOVIE

이은선(영화 저널리스트)
좋은 여성 서사와 뭉클한 성장영화를 목격하면 가슴이 뛰는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 남산의 부장들

01 올해의 한 끗의 품격 – <남산의 부장들> 이병헌의 제스처

이 영화는 독재자의 최후라는 역사적 사건을 인물들의 감정적 맥락에서 재구성한다. 권력을 둘러싼 욕망의 접전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 것은 이인자 ‘김규평’(이병헌)의 각성 때문이다. 권력이 눈앞에서 등을 돌리는 순간, 그는 그제야 제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본다. 심리적으로 휘청일 때마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동작은 이병헌의 아이디어다. 실제 인물 김재규가 법정에 섰을 때의 모습을 유심히 살핀 결과다. 미세한 손동작 하나로도 캐릭터를 설명하는 디테일. 연기의 품격은 언제나 한 끗의 차이를 아는 배우의 노력에서 탄생한다.

 

영화 소리도 없이

02 올해의 음소거 연기 – <소리도 없이> 유아인

<소리도 없이>의 ‘태인’(유아인)은 말을 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 이유가 뭔지 관객에게 설명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다만 중요한 건, 연기에 필요한 무기 하나를 잃어버린 유아인이 오히려 몸짓과 표정만으로 캐릭터를 풍성하게 연기해낸다는 사실이다. 그는 말(言)로 화제와 논란의 중심에 유독 자주 서는 배우다.

 

영화 야구소녀

03 올해의 홈런 말고 너클볼 – <야구소녀>

인생에서 강속구만이 정답은 아니다. 프로 선수 데뷔를 꿈꾸는 주수인(이주영 분)이 알려주는 진리다. 빠르고 강하게 공을 던지는 남자 선수들 틈에서, 주수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화구의 일종인 너클볼을 수련한다. 그렇게 이 영화는 언젠가 자기 앞의 벽이 깨지길 바라며 자신만의 ‘너클볼’을 던지는 세상의 모든 주수인을 응원하는 찬가가 된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04 올해의 집 밖은 위험해 – <남매의 여름밤> 2층 양옥집

<남매의 여름밤>은 그 자체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집이 하나의 캐릭터로서 훌륭하게 기능한다는 점에서도 가히 올해의 영화라 할 만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모토로 모두가 ‘집’의 기능과 가치를 새삼 떠올린 해가 아닌가. 저마다 실패를 경험하고 상처 입은 가족들을 넉넉히 품어주는 건 할아버지(김상동)의 2층 양옥집. 영화 속 장면 대부분은 집 안에서 펼쳐진다. 제작진이 인천에서 발견한 구옥은 실제 주인인 노부부가 살던 생활감을 거의 그대로 살리는 방식으로 영화에 쓰였다. 잘 구한 로케이션 하나가 열 배우 안 부러운 케이스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05 올해의 선택 – <찬실이는 복도 많지> 크리스토퍼 놀란 vs. 오즈 야스지로

‘찬실’(강말금 분)은 ‘영’(배유람)에게 호감이 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한다는 그의 말에 오즈 야스지로를 좋아하는 찬실은 기겁을 하며 실망한다. 오즈의 영화 <동경 이야기>(1953)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 지루하다는 영과 “뭐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라고 맞서는 찬실. 두 사람의 논쟁은 지켜보는 관객에게까지 옮아간다. 극과 극의 스타일, 당신의 감독 취향은 어느 쪽?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박소이

06 올해의 랜선 조카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 <담보> 박소이

커다란 눈망울에 수많은 감정과 이야기를 담은 이 어린이 배우의 활약이 눈부셨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는 지켜져야 할 처연한 존재였다가, <담보>에서는 깜찍함으로 무장해 어른들의 미소를 자아내는 어린이로 등장했다. 2012년생, 올해 아홉 살인 이 배우의 연기에서 확인하시라.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07 올해의 떼 등장 –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애초에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가 있었다. ‘풍문으로 들었소’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거리를 활보하는 ‘부산 나쁜 놈’들의 모습은 오래도록 떼 등장의 대표주자 역할을 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주역들의 단체 거리 활보 장면은 이제 고루한 이미지 대신 당당한 여성들의 모습이 기억되어야 옳다는 일종의 선언처럼 보인다. 조직의 불의에 눈 감지 않는 젊은 여성들의 발걸음은 오로지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려는 범죄자들의 그것과는 달리 산뜻하고 경쾌하다. 진정 아름다운 연대란 이런 것이다. 아이 캔 두 잇, 유 캔 두 잇, 위 캔 두 잇!

 

영화 기기괴괴 성형수

08 올해의 기괴한 결말 – <기기괴괴 성형수>

올해 개봉한 그 어떤 작품의 결말도 <기기괴괴 성형수>의 기괴한 마무리를 따라올 수 없다. 영화는 외모지상주의 사회 풍토에 일침을 가하는 것을 넘어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그릇된 욕망이 향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파격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그 충격이 어느 정도냐고? 그야말로 제목 값을 제대로 한다는 정도만 밝혀둔다.

 

영화 오케이 마담

09 올해의 PPL보다 나은 – <오케이 마담> 꽈배기

주인공 ‘미영’(엄정화)은 꽈배기 맛집 사장님으로, 반죽을 꼬고 돌려치던 실력을 한껏 발휘해 하이재킹 상황에서 악당들을 제압한다. 극 중 미영의 가게는 영천시장 꽈배기집. 실제로도 줄 서서 먹는 곳이다. 그러나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만만해서 더 먹고 싶어지는 마성의 간식은 잠깐의 등장만으로 내내 머릿속 한구석을 점령해버린다. 이건 먼저 본 자의 경고다. 집에서 VOD 서비스로 관람할 거라면 팝콘 대신 꽈배기 지참 필수다.

 

 

BOOK

김하나(작가, 진행자)
올해는 더욱 잡식성으로 읽었다. 그 편이 더 행복하다.

책 시선으로부터

01 올해의 카리스마 가모장 –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중 심시선 여사

이런 가모장이 실제로 있으면 좋겠다. 먹을 욕은 잘 먹고 뱉을 욕도 잘 뱉는 사람, 폭력의 시대를 씩씩하게 지나며 그것을 대물림하지 않는 사람, 속에 든 환한 빛을 끝내 지향하는 사람, 북돋우고 키워내며 마지막까지 멋있고 이상하게 살아버리는 사람. 아니, 우리는 이런 가모장을 가졌다. 정세랑이 써낸 ‘심시선’ 여사는 그 어떤 역사적 인물보다 살아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책 김지은입니다

02 올해의 흔한 이름 – 김지은, <김지은입니다>

반에 한둘씩, 전교에 열댓 명은 있던 이름이다. 전 충남도지사이자 유력한 대권 후보였던 안희정의 성폭력 사실을 고발하며 숱한 고초를 겪은 그의 이름은 그 흔한 김지은이었다. 이 나라의 어떤 여성이든 남성에 의해 자기가 원하지 않은 삶으로 내동댕이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이름이 상징하는 것 같다. 몇 해 전 이 부문 수상자는 82년생 김지영 씨였다.

 

책 배움의 발견

03 올해의 밤고구마 – 타라 웨스트오버, <배움의 발견>

이런 책은 전에도, 후에도 본 적이 없다. 아이다호 깡시골에서 16년간 세상과 절연한 채 살아가던 타라가 편집증적 몰몬교도 부모 곁을 떠나 세상으로, 역사로, 학문으로, 배움으로 나아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눈 뗄 수 없이 전개되던 이야기는 4/5 지점을 지나며 고구마처럼 답답해지지만 그것은 1986년생 작가의 현재형 이야기라서다. 그가 일흔쯤 되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책 나의 비거니즘 만화

04 올해의 수줍은 선생님 – 보선, <나의 비거니즘 만화>

비거니즘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일단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을 읽어보라고 추천하곤 했다. 올해는 여기에 <나의 비거니즘 만화>를 추가했다. 이 두 권을 읽으면 비거니즘이 갖는 함의와 그에 얽힌 논점이 좌르르 정리되며 뼈대가 잡힌다. 이후로도 읽어볼 책은 많지만, 보선 작가의 이 친근하고도 친절하며 지적으로 꼼꼼한 만화책은 훌륭한 성취이며 비건이 아닌 독자에게도 좋은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책 십분의 일을 냅니다

05 올해의 퇴사 시트콤 – 이현우, <십분의 일을 냅니다>

‘퇴사’는 여전히 출판계의 핫 키워드다. 이것은 퇴사 이후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지며 차분하게 나를 채우는 유의 책이 아니다. 드라마 막내 PD였던 저자가 벌에 ‘거기’ 언저리를 쏘여 조기 퇴근하다가 교통사고가 나는 첫 에피소드부터 너무 웃기고 박진감 넘치는 시트콤 같다. 퇴사 후 을지로에 와인 바 ‘십분의 일’을 내고 겪는 우당탕탕 모험기.

 

책 임계장 이야기

06 올해의 뒤통수 – 조정진, <임계장 이야기>

공기업에서 오래 일하다 퇴직한 뒤 자본주의사회의 말단이 되어 자기가 겪은 일을 담담히, 점잖고도 굳건한 문체로 써나간 경비원의 일기. 내 팟캐스트에서 이 책을 전 국민이 읽어봤으면 좋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는데, 하아… 저자는 술자리 강제추행죄로 고소당했다. 나는 이 책을 버렸다.

 

책 파스타 마스터 클래스

07 올해의 산 입에 풀칠하기 – 백지혜, <파스타 마스터 클래스>

이 책은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가 실시되었을 때 더 빛을 발했다. 우리는 햇반에 반찬만으로는 살 수 없다. 재택 시대에 파스타 하나쯤 마스터 해둔다면 소소한 전화위복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쉽고 독특한 파스타가 가득해서 파스타 초심자부터 파스타 마스터까지도 쏠쏠히 활용할 수 있다.

 

책 화이트 호스

08 올해의 제사 – 강화길, <화이트 호스> 중 ‘음복’

한국에는 전통문화와 오컬트, 여성 혐오가 뒤얽힌 식탁이 있으니 이름하여 제사상이다. 이것을 소재로 스위스 시계처럼 촘촘하고 정밀하게 써나간 소설이 강화길의 ‘음복’이다. 이 식탁에서 무엇을 함께 먹고 무엇을 넘겨주지 않을 것인가. 마지막 두 페이지는 더 이상 빼낼 블록이 없는 젠가처럼 완벽하다.

 

책 왕자와 드레스메이커

09 올해의 최신 업데이트 어린이 책 – 젠왕, <왕자와 드레스메이커>

그래, 요즘 어린이들은 이런 책을 읽으며 자랄 수 있겠구나. 그 생각만으로도 내 어린 시절도 아닌데 가슴이 뛴다. 모두에게 더 큰 가능성을 열어주는 성숙하고도 신나는 그래픽 노블이다. 온갖 드레스의 디테일을 보는 것만으로도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 최고 에피소드를 보는 것처럼 신난다. 드레스를 입고 싶은 왕자 세바스찬과 진정한 프로페셔널인 재봉사 ‘프랜시스’. 이 둘의 이야기는 독자의 세계를 큰 폭으로 넓혀놓는다.

 

책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10 올해의 뼈 때리는 제목 – 심너울,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트위터에 어느 분이 이렇게 썼다. ‘최근 젊은 작가들 다 이름이 너무 예쁜 것 같다. 이름부터 문학적이야. 김초엽, 문목하, 정세랑, 심너울, 장류진…, 무척 동의한다. 그중 심너울(본명이다) 작가는 저자 이름뿐 아니라 책 제목도 잊을 수가 없겠다. 나는 아직 이 책을 안 읽었지만, 읽기도 전에 고개부터 끄덕이고 들어간다. 휘리릭 지나간 2020년에 이어 한 살이 또 찾아온다. 새해에는 이 책부터 읽어볼까 싶다.

 

 

MUSIC

김소영(프리랜스 에디터)
모든 음악을 탐미하는 잡식성 프리랜스 에디터.

깡 리믹스 식케이 피에이치원 박재범 김하온

01 올해의 갱생 – ‘깡 Official Remix’ 식케이, pH-1, 박재범, 김하온

누가 예상했을까. 몇 년간 놀이로 소비되던 비의 ‘깡’이 하이어뮤직의 작은 터치로 트렌디한 힙합으로 거듭나 음원 차트 1위를 석권할 줄. pH-1과 식케이의 매력적이고 힘 있는 리드와 김하온의 단단한 래핑 모두 조화롭지만 이 곡의 하이라이트는 ‘화려한 조명이 날 감싸지 않아도 난 빛이 나’라며 등장하는 박재범의 보컬이다. 원곡 가사를 세련되게 비틀어 감성적인 멜로디 위에 얹은 이 후렴은 박재범의 유려한 보컬로 한층 더 잘빠진 대중가요가 됐다.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하고 빠르게 비와의 협업을 택한 하이어뮤직의 영민함과 자신감 또한 박수를 쳐줄 만하다.

 

김창완 노인의 벤치

02 올해의 뮤직비디오 – ‘노인의 벤치’ 김창완

주름진 손이 투박한 가죽 노트를 펼친다. ‘노인의 벤치’라는 글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김창완의 목소리가 돋보기에 비친 가사와 함께 흐른다. 곧 화면 가득 민낯의 김창완이 등장해 한때 꿈꿨던 여자를 노래한다. 그가 37년 만에 낸 솔로 앨범의 타이틀곡 ‘노인의 벤치’ 뮤직비디오는 거창한 것에서 벗어나 빛나는 아이디어만으로 곡이 품고 있는 서사와 시간의 쓸쓸함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퀸 와사비 안녕 쟈기

03 올해의 킬링 벌스 – ‘안녕, 쟈기?’ Queen WA$ABII

Mnet에서 방영된 <굿 걸>은 연두색 머리의 래퍼가 트월킹을 하며 ‘안녕, 쟈기?’를 외치기 전과 후로 나뉜다. 트랩의 가사가 대부분 그렇듯 단순하고 귀에 꽂히는 이 벌스는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고 싶어하는 시대정신, 긍정적인 바이브로 ‘나다움’을 드러내는 퀸 와사비의 용감한 캐릭터와 맞닿아 안 들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들은 사람은 없을 진정한 올해의 킬링 벌스가 됐다.

 

실버헤어 익스프레스 장기하 리믹스 혁오

04 올해의 리믹스 – ‘Silverhair Express (장기하 Remix)’ 혁오

장기하가 리믹스를 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비트에 변화를 주거나 다른 소리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김초엽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한 구절을 오혁이 ‘시간이 급하게 흐르는 열차 위에 올라탄 상상을 하며 만들었다’는 ‘Silver hair Express’ (<사랑으로> EP 중) 위에서 읊는다.  속절없는 시간 위에서 잊혀지고 남겨지는 마음을 노래하는 음악과 문장이 장기하의 담담한 목소리를 입고 가볍지 않은 사유에 빠지게 만든다. 어느 쪽도 해치지 않은 채로 각 예술의 지평을 넓힌 좋은 리믹스.

 

비비 알앤비

05 올해의 캐릭터 – BIBI

만들거나 참여한 음원이 올 한 해만 10곡이 넘는 것을 봐도 비비는 떠오르는 R&B 신성이 틀림없다. 오른쪽 눈 아래 붉은 점 두 개를 찍고 매력적인 음색으로 노래할 때의 제스처와 표정은 그를 더 알고 싶게 만든다. 충분한 스타성에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엉뚱하고 솔직한 모습은 팬들이 로열티를 형성하는 이유다. 거침없는 섹스어필도 특징. 아직 비비에 대해 잘 모른다면 ‘딩고 킬링보이스’ 비비 편을 추천한다. ‘없던 캐릭터’라는 수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오마이걸 돌핀 논스톱

06 올해의 히든 트랙 – 앨범 ‘Dolphin’ 오마이걸

타이틀곡 ‘살짝 설렜어’와 같은 앨범의 수록곡 ‘Dolphin’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미니멀한 기타 리프로 펑키하게 시작해 오마이걸의 상큼한 목소리로 좋아하는 남자애를 돌고래로 묘사하는 이 곡은 매력적인 후렴구로 중독성까지 갖춰 특별한 홍보 없이 서서히 음원 차트 Top 10 에 들었다. 아이돌 음악에서 쉬이 예상되는 과한 요소 하나 없이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잘 만든 곡이다.

 

나훈아 콘서트

07 올해의 목소리-나훈아

KBS 추석 특집 <대한민국 어게인>은 BTS 티케팅보다 어렵다는 나훈아의 콘서트를 무료로 감상할 수 있는 다신 없을 기회였다. 브라운관 너머로 전해지는 전설의 목소리와 스태미너는 시청률 29%를 기록하며 팬데믹에 지친 국민들에게 큰 에너지를 전달했다. 화제의 신곡 ‘테스형!’의 후렴구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는 많은 패러디를 남기며 또 한 번 전설로 남을 기록을 만들었다.

 

방탄소년단 블랙스완 제임스 코든 쇼

08 올해의 퍼포먼스 – ‘Black Swan’ BTS in The Late Late Show with James Corden

무대와 음향 상태, 카메라워크, 작품의 풍성함, 퍼포머의 컨디션 등 여러 조건이 교차될 때에야 좋은 퍼포먼스를 만날 수 있다. BTS가 ‘블랙스완’을 처음 공개한 제임스 코든 쇼에서 그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흑조의 호수를 연상시키는 푸른 배경과 멤버 전원의 맨발 퍼포먼스가 주는 분위기는 마치 한 편의 현대무용 작품 같았다. 가운데에서 무게감을 뽐내던 정국이 슈가와 합을 맞추는 부분부터 지민의 독무 카메라 워킹까, 올해 최고의 퍼포먼스다.

 

박재범

09 올해의 허슬러 – 박재범

팬데믹으로 한껏 움츠러든 올해, 박재범은 또 열심히 일했다. 싱글 ‘All the Way Up’을 시작으로 하이어뮤직 단체 앨범과 <블루 테이프>, DJ 웨건과 함께한 EP까지. <유희열의 스케치북>과 함께 ‘하루하루’, ‘모든 것을 너에게’를 재해석해서 냈고, 챈슬러의 ‘오토매틱 리믹스’에도 참여했다. 좋은 태도로 양질의 음악을 중단 없이 내는 것만큼 아티스트에게 필요한 미덕은 없다. 박재범의 은퇴 암시가 아쉬운 이유다.

 

박문치 뉴트로

10 올해의 뉴트로 – ‘COOL한 42’ 박문치

뉴트로 장인 기린이 ‘듀스’풍의 힙합 사운드를 레트로하게 만들어왔다면 박문치는 좀 더 청량하고 대중적인 ‘UP’이나 ‘노이즈’ 사이의 어디쯤이다. 향수를 자극하는 서글픈 멜로디는 그 시대를 살아봤던 사람도, 살아보지 않은 사람도 감성적인 추억에 빠져들게 만든다. 올해 예능을 통해 공개되며 이효리가 “눈물 날 것 같다”라는 감상평을 남긴 ‘cool한 42’는 그 정점에 있는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