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리 블랙 재킷, 화이트 슬리브리스 톱, 블랙 레더 팬츠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링 까르띠에(Cartier), 브레이슬릿 포트레이트 리포트(Portrait Report). 이우정 재킷과 셔츠 모두 더블유엠엠(WMM),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최선의 삶>은 제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을 때 만난 소설이에요.

인물의 내면으로 누구보다 깊이 들어가는 힘과
이야기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힘을 느꼈고,
그 힘을 빌려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이우정 감독|재킷과 셔츠 모두 더블유엠엠(WMM),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영화 <미나리>의 주인공 한예리 배우와 영화 <최선의 삶>을 연출한 이우정 감독은 오래 전 단편 영화 현장을 함께 하던 동료 사이다. 이 둘의 대화는 10여 년 전 대학로에 있던 한 판에 1천원 하던 만둣집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단편영화 현장에서 배우로 함께 작업했던 둘은 영화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뜨거운 마음으로 살던 시간을 함께 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멋지게 각자 자신의 세계를 일구고 내일을 응원하며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중이다.

오랜 시간 독립영화계에서 함께 활동해온 여성 영화인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한 건데, 두 분이 원래 아는 사이인 줄은 몰랐어요. 한예리(이하 한) 신기해요. 그래서 제가 아는 그 이우정 감독님이냐고 몇 번이나 다시 물어봤어요. 우린 아주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예요. 이우정(이하 이) 그러니까요. 참 신기한 일이에요.

어느 현장에서 두 분이 처음 만났나요? 둘 다 어디에서, 언제 처음 만났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윤성호 감독님 작품도 함께 했었고. <두근두근 레드카펫>이라는 단편영화에 배우로 출연했어요. 눈에 들어간 속눈썹을 혀로 빼주는 장면을 연기했었죠. 아쉽게도 (이)우정이가 연출한 영화에서 만난 적은 없어요. 하지만 그동안 우정이가 연출한 영화는 많이 봤어요. 2008년에 만든 <송한나>, 그 이듬해에 만든 <개를 키워봐서 알아요>도 봤죠. 그러다 시간이 한참 지나 <최선의 삶>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제가 기억하는 우정이의 작품은 사랑스럽고 밝은 편이었는데, 그동안 이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싶었거든요. 어쨌거나 둘 다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니야. 난 그대로야.(웃음) 아니야.(웃음) 우린 둘 다 야금야금 잘 크고 있어.

두 영화가 어떤 점에서 이우정 감독의 이전 작품과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 건가요? 아마도 나이 때문에 일어난 변화 아닐까요? 20대부터 30대 초반까지는 밝은 면이 도드라졌다면 이제는 인물을 좀 더 깊이 있고 성찰적으로 다루게 된 것 같아요. <최선의 삶>에서는 우정이가 피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런 점에서 멋있었고요. 첫 장편을 내놓기까지 힘들었겠지만 잘 견디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최선의 삶>은 제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을 때 만난 소설이에요. 누구나 자신이 지겨워서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을 텐데, 제가 그때 그랬죠. 이전에 제가 하던 방식으로는 영화를 더 이상 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 소설을 읽었어요. 인물의 내면으로 누구보다 깊이 들어가는 힘과 이야기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힘을 느꼈고, 그 힘을 빌려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후련하기도 해요. (한)예리가 느낀 것도 그 부분인 것 같아요.

서로의 작품 중 가장 응원하고 싶은 작품을 꼽는다면 뭔가요? 아무래도 첫 장편인 <최선의 삶>이죠. 단편에 비해 호흡이 훨씬 길고, 예산 문제도 있을 테니까요. 수많은 선택을 하며 완성해낸 점이 대단하게 느껴져요. 장편은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막막하기도 하고. 배우도 장편을 촬영할 때 그렇게 힘든 순간이 있어요. 호흡을 유지하는 게 버거울 때도 분명 있었을 텐데 잘해낸 거죠. 정말 축하해요. 마라톤을 뛰는 기분으로 마쳤어요. 장편 입봉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는 생각도 들어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마다 자신만의 시간들이 있는 거니까. 뭔가 다시 직면하고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지금 생긴 거지, 그때가 늦은 건 아니죠. 전 늘 예리를 응원해왔어요. 아직도 예리를 처음 봤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단편 <기린과 아프리카>(2007)에서 처음 본 예리는 아주 맑고 귀여웠어요.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어디에서 등장한 건지 궁금했죠. 그리고 단편 <봄에 피어나다>(2008)에서는 서늘한 얼굴이 보였어요. 두 영화 속 인물의 낙차가 아주 컸기 때문에 감탄하며 팬이 되었어요.

오늘 두 분이 오랜만에 만난 거죠? 7~8년 만에 만난 것 같아요. 영화와 촬영 현장을 마냥 좋아하던 시절에 처음 만났죠. 그때는 촬영이 끝나면 함께 저녁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계속 영화 얘기만 했어요. 재미있고 들떠 있던 시간이었어요. 그렇게 지내다 한 꺼풀 벗고 만나니까 묘한 기분도 들어요.

지금은 마냥 들뜬 마음만으로 이 일을 할 수 없는 나이예요.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영화 만드는 일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얼까요? 모르겠어요. 다만 어떤 모습으로 살건 계속 영화를 생각하며 생활하고 있어요. 그렇게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이나 제게 일어나는 사건들, 보고 듣는 이야기들을 집에 와서 곱씹고 기록해두는 걸 좋아해요. 저는 이걸 ‘이삭 줍기’라고 해요. 주워 담은 이삭들이 나중에 누군가에게 갈 수 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고요. 그 말을 들으니 우정이에게 궁금한 점이 생겨요. 이야기를 수집한다는 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시선을 가졌다는 의미인 것 같아서. 그 시선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미리 계획하는 건지 아니면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생각나는 건지 궁금해. 계획하지는 않아. 이를테면, 시장에서 뭘 살 때 사장님이 건네는 말이 대사로 쓰기 좋다는 생각이 들면 기록해두는 식이야. 그렇게 삶에서 모아두면 재미있고 좋아.배우는 주어진 틀 안에서 뭔가를 만드는 반면 감독은 오롯이 창작하잖아. 창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지 궁금할 때가 있어. 이야기를 구성하고 만들어내는 일이 왜 재미있는지 알고 싶어.나는 반대로 내가 혼자서 정리한 이야기가 배우에게 갔을 때 배우들이 자신들만의 캐릭터를 만들면서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분석하고 해석하는 지점이 항상 흥미로워. 그래서 감독과 배우가 함께해야 작품이 완성된다는 걸 느끼고. 배우의 해석이 내겐 굉장히 신기한 영역이야. <최선의 삶>에서 배우들 캐스팅할 때는 어땠어? (방)민아 씨와는 가벼운 미팅 자리에서 만났어. 민아 씨가 강이에 대해 자신이 생각한 점을 이야기하고 자신 안에 있는 강이의 모습과 강이를 연기하게 됐을 때 두려운 지점들에 대해 말해줬어. 그 모든 걸 내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함께하고 싶다는 믿음이 생겼어.

현장에서 배우들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부분은 어떤 지점인가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배우들과 인물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영화에는 드러나지 않는 설정도 만들고 캐릭터에 대해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기도 했죠. 오히려 현장에서는 주요한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크게 이야기할 것이 없었어요. 대신 ‘강이’와 ‘소영’, ‘아람’이 되어 현장에 온 배우들이 새롭게 느끼는 지점이나 혹은 다르게 느끼는 감정에 대해 얘기해줬어요.

소설을 영화로 만들며 가장 경계한 부분은 어떤 점인가요? 인물들을 가두지 말 것. 인물들을 내가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정짓지 않으려 했어요.

원작 소설의 인물들이 감독님에게 전한 감정이 인상적이었던 만큼, 그 감정을 영화에 담아내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임솔아 작가님이 세세하고 치열하게 잘 담아놓은 인물의 감정을 영화에서도 지켜내고 싶었어요. 각색 과정에서는 아람과 소영의 입장과 감정을 더 채우고 싶었고요. 촬영에 들어가서는 배우에게 인물의 감정을 거의 맡기고 갔어요. 촬영 전에 배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그들이 잘 달릴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강이와 아람, 소영에 대한 감독님의 감정은 어떤 건가요? 사랑! 이들이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영화를 찍었고,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분 모두 오랫동안 독립영화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미나리>도 미국 자본으로 만들었지만 독립영화고요. 독립영화에 마음이 가는 이유가 궁금해요. 예산이 적다 보니 하고 싶은 것을 못 할 때가 많지만 그 덕분에 자율성이 더 보장되기도 해요. 그래서 감독님만의 고유한 색깔이 잘 담기기도 하고 작가주의 영화가 될 수도 있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이 적어서 연출자가 누구보다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배우도 자신을 더 던져볼 수 있고요. 저라는 배우를 탐험할 수 있는 곳이 독립영화 현장이죠. 자율성이 확보된다는 말에 크게 동감해요. 현장에서 배우들과 만들어가며 바꾸는 부분들이 있는데, 훨씬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죠. 저는 그때가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팬데믹 시대지만 올해 마리끌레르는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영화계가 다시 활기를 찾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영화를 볼 수 있는 채널이 아주 다양해요. 하지만 내가 선택한 영화를 보러 간 극장에서는 오로지 영화 보는 시간에만 집중하죠. 큰 스크린으로 보는 영화에서는 배우의 표정과 숨소리, 눈동자의 떨림까지 선명하게 잘 보이고요. 제가 연기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렇게 어떤 순간들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기 위해서는 극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영화 속 인물이 내 안에 있는 어떤 면에 딱 닿아 연결될 때예요. 그런 순간을 발견하면 저는 마음속으로 ‘만세’를 외쳐요. 저 인물을 응원해, 앞으로 쭉 가길 바라, 하면서요. 그 즐거움은 극장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어요.

등장인물을 응원한 영화에는 어떤 작품이 있나요? 지금은 <남매의 여름밤>이 떠올라요. 영화를 보면서 안경 렌즈가 뿌예질 만큼 엄청 울었어요.

최근 2년 동안 여성 감독이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만든 이야기가 많아졌어요. <최선의 삶>도 같은 선상에 있고요.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이 세계에서 함께한다는 게 체감되나요? 이전보다 훨씬 많아진 것 같기는 해요. 폭넓은 연령대의 여성 배우들이 작품에서 많이 보이고요. 여러 감독님과 작가님들이 캐릭터를 잘 알고 써줬기에 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부족하죠.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런 자리에 감사하고, 진심으로 힘을 얻어요. 언젠가 ‘여성’이란 단어를 덧붙이지 않고 이야기하게 될 날이 오길 기다려요.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열심히 부르면서 지내야 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바꿔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어요. 내 일을 꾸준히 잘해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 같기도 해요. 영화도 하나의 큰 산업이다 보니 내가 바라는 걸 마냥 주장할 수도 없어요. 문득 저 아래에서 내가 혼자 외쳐 보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목소리가 더 많이 들리기 위해서는 서로 작품을 오래 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지지하며 연대하는 수밖에 없어요. 배우끼리도 더 잘 뭉치고 힘을 더하고. 제게 가장 큰 힘을 주는 사람도 결국 제 주변에서 영화를 하고, 글을 쓰는 여성 창작자들이에요. 그 친구들과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와 작업하며 느끼는 고민을 나누고, 어떤 일에 함께 분노하다가 체념하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같이 힘을 내보자며 밀어주고 당겨주고. 저를 가장 저일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사람들이죠. 친구들은 제 실수나 어리석음을 절대 잊지 않아요. 제가 잊지 않도록 계속 저를 놀리는데, 그렇게 웃고 울며 제가 저임을 느끼게 해줘요.

꾸준히, 그리고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생계유지. 맞아요. 그게 가장 중요하죠. 윤여정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웃음) “돈 우습게 보지 마.” 감독은 배우보다 훨씬 한적정인 수의 작품 활동을 하니까 더 힘든 문제죠. 생계유지를 잘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그 일들을 해내는 것이 중요해요. 예전에 단편영화 찍을 때는 정말 돈이 없었어요.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와서 촬영했고, 출연료를 받는 건 나중 문제였거든요. 작업 자체가 너무 즐거우니까 신나게 일했어요. 하지만 그런 작업이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해요. 생계를 비롯한 현실적인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너무 슬프죠. 생계유지만큼 중요한 건 유머인 것 같아요. 힘든 시간을 버티기 위해, 다시 일어서서 뭔가를 해내기 위해서는 동료와 유머가 있어야 해요.

함께하는 동료가 있다는 건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지금, 가장 힘이 되는 동료는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에요. 극장에 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에 극장을 찾아 영화를 보는 모든 분들이 큰 힘이 되어주고 있어요. 제 주변에서 작업하는 친구들 모두 큰 힘이 되죠.

오늘 이 자리를 어떤 말로 마무리하고 싶나요? 이렇게 우정이를 마주하고 있으면 많은 일이 새록새록 생각나요.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지는구나 싶기도 하고. 우리가 영화를 계속 한 덕분에 다시 만날 수 있고, 그래서 정말 반가운 만남이었어요.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지도 궁금하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계속 영화를 만들어갔으면 해요.  조급한 마음도 들지만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며 작업하고 싶어요. 언젠가 답을 찾을 수도 있고, 그게 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도 올 수 있죠. 그렇게 왔다 갔다 하지 않을까 싶어요. 무엇이 되었든 우정이다운, 우정이의 결과물이기를 바라요. 우리 모두 할 수 있는 선에서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살아갑시다. 어릴 때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를 다시 만나 반갑고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