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젊은작가상 소설가 김멜라 나뭇잎이 마르고 적어도 두 번 2014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김멜라
<나뭇잎이 마르고>

2014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적어도 두 번》을 썼다.

 

“술 좀 작작 마셔요. 체는 걸음을 멈추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었다. 기뻐하는 건지 아파하는 건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앙헬은 체가 다 웃을 때까지 옆에 서서 기다렸다.”

– 소설 <나뭇잎이 마르고> 중에서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소설 <나뭇잎이 마르고>에서 한 구절을 오늘 낭독하기로 했죠. 어떤 구절을 선택했나요? “술 좀 작작 마셔요.” ‘앙헬’이 ‘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어요. “선배” 이렇게 부르고 술 좀 작작 마시라고 말해요. 체가 막 웃으니까 그 옆에서 웃는 걸 기다려주거든요. 그런 마음. 체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체가 술을 조금만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 좀 덜 주고, 자기 자신을 챙겼으면 하는 마음이죠. 소설 속 인물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우리도 일상에서 충분히 주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잖아요. 다정하다고 할 순 없지만, 어쩌면 조금 투박하지만 인간관계에서 나눌 수 있는 다정한 말이 아닐까요?

지금 작가를 붙잡고 있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면요? 신을 부르는 호칭이 왜 남성형일까 하는 질문이요. ‘하나님 아버지’도 그렇고 ‘성부’와 ‘성자’도 그렇고요. 꼭 신만이 아니라 신이 은혜를 내려주는 대상도 거의 대부분 남성형으로 표현되어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일 수 있는 단어들이 왜 그런 것인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이 질문들을 바탕으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관련된 책도 찾아 보며 생각을 넓혀가고 있어요.

소설 <나뭇잎이 마르고>도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인 색을 띠고 있잖아요. 동시에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이고요. 네. 맞아요. 종교적인 지점이 있는데 그건 제게 중요한 문제예요. 글을 쓰는 데 있어서도 그렇지만 인생을 놓고 봐도 그래요. 종교와 성적인 것이, 이 둘이 서로를 굉장히 미워하잖아요. 그 간극을 다시 생각해보는 거죠. 이 경우 양쪽에게 모두 비판받을 수 있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도 있을 수 있지만, 제 안에서는 이야기를 만들며 조화를 이뤄가는 과정이 있을 것 같거든요. 한 번에 이뤄지는 건 아니겠지만요.

무엇을 보고 느낄 때 유난히 쓰고 싶어지나요? 방금 이야기한 이런 의문이 들 때요. 당연하게 생각한 것에 의문을 제기할 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볼 때나 상황을 볼 때, 내 상상력을 깨뜨리고 넓혀주는 상황을 마주할 때 소설로 표현해보고 싶죠.

소설을 쓸수록 소설에서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나요? 생각 속에 막연히 있던 것을 글로 꺼내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거잖아요. 초고 쓰고, 퇴고하고, 편집자님과 같이 교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글이 많이 다듬어져요. 저 스스로도 계속 생각하게 되고요. 그 과정이 힘들지만 거기에서 많이 배우고요. 혼자만의 망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화된 형식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배우는 거죠. 실제로 소설이 점점 괜찮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해요. 전에는 워낙 못 썼기 때문에.(웃음) 지금도 뛰어난 건 아니지만 전에 비하면 발전했다는 평을 받고, 동시에 인간으로서도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전보다 좋은 쪽으로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어요. 이 둘이 함께 가는 것 아닐까요?

이야기가 주는 힘에 대해, 그 막강함에 대해 체감할 때가 있나요? 소설 <나뭇잎이 마르고>의 ‘앙헬’과 ‘체’는 소설 속 인물이지만 누군가는 그걸 읽고 실존 인물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단 말이죠. 실체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요. 이야기 속 허구의 인물이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야말로 실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럴 때 굉장히 두렵죠. 정신 차리고 써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가 소설을 쓰면서 이야기 속 인물이 되어보는 경험을 통해서도 성장하지만 이 글을 누군가 읽는다는 생각을 하면 그때부터 두려움이 드는 동시에 섬세하게 여러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게 되는 것 같아요. 눈치를 보면서 도덕적인 글을 쓰겠다는 것은 아니고요. 세상을 향해 어떤 목소리를 낼 기회를 얻은 것이니 최대한 많은 것을 다양하게 고려해보게 되거든요. 태도 면에서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 느껴요.

작가가 사랑하는 이야기에는 어떤 교집합이 있나요? 크게 두 가지인데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소설을 좋아해요. 이야기 속 인물의 어떤 행동이 작위적이고 인과관계가 충분치 않다고 하더라도 인물 자체가 지닌 빛나는 어떤 지점이 있잖아요. 읽는 저를 깨워주고, 조금 심각한 말로는 자유를 주는.(웃음) 이런 사람도 있고, 이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깨뜨려주는, 제게 자유를 주는 소설이 좋아요. 또 하나는 삶 속에 여러 어려움이 있잖아요. 좌절, 절망, 슬픔… 수많은 어려움을 건너고 건너 어렵게 사랑쪽으로 몸을 틀고 있는 이야기들, 사랑하기로 다시 한번 마음을 먹어보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그런 이야기는 작가를 떠나서 인생을 두고 봤을 때도 도움이 되고요.

사랑하는 이야기의 작가나 작품을 꼽아주시겠어요? 알베르 카뮈의 모든 작품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방인》은 그런 이야기로 다가왔어요. 큰 기쁨을 줬고요. 윤성희 작가님의 <낮술> 속 풍경, 그 속의 사람들을 좋아해요. 인물을 묘사하는 흐름이 과하지 않게 느껴져요. 초고에는 등장인물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소설을 시작했는데, 결국 마지막에 그냥 넘어지는 것으로 끝내셨다는 글을 읽은 적 있거든요. 이제는 윤성희 작가님이 왜 그러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무엇이 작가를 계속 쓰는 사람으로 머물게 하나요? 앞에서 이야기 나눈 자유를 느끼고 싶어서 쓰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다른 일도 많이 시도해봤거든요. 몸 쓰는 일을 좋아하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해봤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기술도 배워봤어요. 컴퓨터 기술을 배워서 창업 같은 것도 해보고. 글을 안 쓰고 살려고 한 게 아니라 글로 돈을 벌기는 힘드니까 다른 일로 돈을 벌면서 글을 쓰려고 한 거예요. 실용적이고 눈에 보이는 일을 갖고 싶었어요. 근데 다 안 됐죠. 돌아보면 글을 쓰는 일이 가장 저한테 맞고 그나마 제일 효용성이 있다고 할까요? 그나마 들인 것에 비해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가장 많은 일이에요. 다른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더라고요.(웃음) 열심히 하려고 해도.

‘쓰는 당신’이 가진 것 중 훼손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요?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쓰고 싶은 마음이 있고, 쓸 수 있는 기회와 조건, 시간이 주어진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해요. 그리고 저는 쓰는 것만큼 읽는 것도 좋아하는데 어떤 노년의 학자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책을 읽으면 그 책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을 것만 같아서 늘 설렌다고요. 지금까지 무수한 책을 읽었을 텐데도 여전히 너무 설렌다는 거죠. 저도 그런 기분을 느끼거든요. ‘이 책에 뭔가 있을 것 같아, 나를 뒤흔들 것 같아’ 하고. 그런 설렘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 자신에 감사해요. 제 안에 계속해서 남아 있으면 좋겠어요.

스스로에게 관대한 편인가요? 엄격한 편인가요? 주로 엄격하려고 하는데 마지막 순간에는 놓죠. ‘아이, 됐어. 이 정도면 뭐. 그만해’ 하고.(웃음) 어떤 면에서는 관대함이 지속 가능성과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내일 또 쓰자, 다음에 더 잘 쓰자’ 하는 마음. 그게 다른 의미에서의 엄격함이기도 하거든요. 이전 작품보다는 조금만 더 나아가자 하고 쓰는 데 의의를 두려고 하는 태도를 갖기가 때로 더 어렵잖아요. 내일이 있다는 생각을 반복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쓰게 될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최근에 쓴 이야기를 이야기하면, 거의 직전에 완성한 건데 <물오리>라는 짧은 소설이에요. 소설 속 대사 중에 “사람이 살게 해줘야 살지”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제가 평소 생각한 문장도 아니고 썩 좋아하는 타입의 문장도 아니거든요. 이런 따뜻한 말을 잘 안 하는 편인데 점점 달라지고 있는 걸 느껴요. 이 말은 자살 시도를 한 딸을 둔 아버지가 하는 혼잣말인데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을 두고 쉽게 비판하기도 하잖아요. 그렇다면 과연 사람이 살게 해준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이런 문장이 나온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