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젊은작가상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소설가 서이제 0%를 향하여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

서이제
<0%를 향하여>

2018년 중편소설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으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미래가 없고 (……) 미래가 없고 (……) 미래가 없다. 나는 언제까지 이 생각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지속시킬 수 있을까. 고개를 돌려보니, 할머니가 보인다. 빛. 어둠. 빛. 어둠. 연말이었고, 그렇게 밤이 지나고 있었다. 계속. 밤은 지나고 있었다.”

–  소설 <0%를 향하여> 중에서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소설 <0%를 향하여>에서 한 구절을 오늘 낭독하기로 했죠. 어떤 구절을 선택했나요? “미래가 없고 (……) 미래가 없고 (……) 미래가 없다. 나는 언제까지 이 생각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지속시킬 수 있을까.” 이렇게 반복하면서 끝내는 문장을 꼽고 싶어요. 미래가 없다고 하면 없어야 하는 건데 이렇게 문장을 계속 나열하다 보면 종이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되잖아요. 제가 소설 안에서 다룬 독립영화나 언더그라운드의 예술들이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지탱해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요. 미래 같은 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묵묵히 남아 이 신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미래가 만들어졌고,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해피엔딩이라 생각했고요. 마지막까지 그 공간에 가서 영화를 보는 감상자이고 싶다. 그 자리를 완성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썼는데, 이를 굉장히 비극적인 결말로 인식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그 점도 재미있었어요. 각자가 처한 상황이나 세상을 보는 방식에 따라 소설 결말도 완전히 달라진다고 느꼈거든요.

소설을 쓸수록 소설에서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나요? 영화를 전공하고, 영화를 찍으며 느낀 점이 있다면 ‘인생에서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뭘 계획해도 다 어그러진다’였거든요. 근데 소설을 쓰고 난 뒤에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더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는 걸 경험하게 됐어요. 소설은 계획 없이 시작해도 되고, 쓰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서 어디에 도착할지 모르는 상태로도 계속해서 쓸 수 있다는 점을 배운 거죠. 그리고 쓰다 보면 이건 아니다 싶어도 연습 삼아 끝까지 써볼 때가 있어요. 어차피 남는 거 시간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쓰면서 결국엔 끝을 냈는데, 끝내고 주변을 둘러보니 방 안이 너무 고요한 거예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작품 하나를 망치고 실패했는데 누구한테도 상처를 주지 않고, 해를 끼치지도 않고, 돈을 잃지도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은 거예요. 다 연습이니까. 그게 너무 좋은 실패인 거예요.

무엇을 보고 느낄 때 유난히 더 쓰고 싶어지나요? 생각보다 과학과 수학에 호기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살아가다 보면 일상에서 어떤 체계나 메커니즘 같은 게 보일 때가 있잖아요. 특히 사물의 속성에는 그 물성을 유지하기 위한 엄청난 체계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하다못해 책을 봐도 표지부터 목차, 배치 순서 등 구조를 보는 거죠. 사물을 보듯 이런 방식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치밀하게 구조화된 소설을 말하는 것인가요? 네. 맞아요. 전에 소설 <사운드 클라우드>에서는 LP에서 CD로, 파일에서 스트리밍으로 음악이 계속 다른 기기로 옮겨가는 방식을 그대로 가져다 글을 썼어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이야기하지만 어떻게든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소설 <미신>을 쓸 때는 ‘모른다’로만 끝나는 문장을 만들어 어디까지 써나갈 수 있는지 실험해보기도 했고요. 소설 <0%를 향하여>에서는 문단으로 나눈 100에서 0으로 갈 때까지 물리적인 공간들을 선택해서 가는 방식이었고, <그곳에서>라는 소설은 스도쿠 형식을 가져와 소설을 썼어요. 스도쿠가 복잡해 보이지만 그 안에 체계가 있잖아요. 기존 구조 말고 새로운 구조를 빌려 쓰는 방식을 늘 고민하고 있어요. 저는 이야기를 단락으로 나눠 쓰는데 이때 문단도 나누지 않거든요. 한 단락을 마치 퍼즐 조각처럼 만들어서 여러 단락이 각자 다른 읽기 속도와 방식을 가지게끔 만들고 싶다는 고민을 했어요. 한편으로는 순서에 상관없이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가령 단편 작품을 묶은 소설집을 읽을 때는 독자가 실제 수록된 순서와 다르게 작품을 취사선택해 읽기도 하지만, 한 편의 소설에서 단락을 마음대로 뒤섞어 읽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렇게 읽으려면 하나의 챕터가 하나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야겠죠. 짧게라도 완성되어야 하는 거예요. 이런 방식으로 쓰면 제가 구성한 순서 외에 무한한 순서가 만들어지는 거죠.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 블럭>을 보면 출연자마다 에피소드가 나뉘어 있잖아요. 본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걸 짤로만 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봐도 결국 무슨 내용인지 다 알거든요. 요즘 사람들의 보는 방식, 읽기 방식이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잖아요. 많은 정보량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선택적으로 읽고 보게 되고, 그 모두를 조합했을 때 서사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걸 유도해서 쓰는 거죠.

지금 작가를 붙잡고 있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면요?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관해 고민하고 있어요. 데뷔작을 쓸 때부터 해온 생각이고, 제 소설에도 드러내려고 해요. 디지털 기술은 이미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잖아요. 아날로그도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의미가 아닌 것 같고요. 이런 변화 속에서 우리의 인식 체계와 감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그 감각들이 소설에도 드러났으면 좋겠고요. 하나 더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면 차별 없이 문화 예술을 향유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어요. 우리의 노동시간은 지나치게 길고, 산업재해로 고통받는 사람도 많은데 이런 상황에서 예술을 향유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책값도 1만원 정도밖에 안 한다고 하지만, 그 돈이 비싸다고 느끼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고요. 이런 생각을 하면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것 같고요. 막연한 고민이지만 그럼에도 미약하나마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이야기가 주는 힘에 대해, 그 막강함에 대해 체감할 때가 있나요? 무엇이 작가를 계속 쓰는 사람으로 머물게 하나요? 내가 앞으로 어디로 갈지 모르고 또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잖아요. 근데 소설에서는 그게 가능하니까 계속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초등학생 때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언젠가 나도 죽을 텐데 한 가지 직업만 선택해서 살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여러 번 살아보고 싶고, 직업도 여러 개 가져보고 싶고, 다양하게 경험해보고 싶은 거죠. 그렇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토리텔링을 하는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시작했어요. 연극이나 영화를 꿈꾼 이유도 이야기 안에서 여러 번 죽고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런 걸 꿈꾸면서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심신이 건강한 상태로 오래 쓰기 위해서는 무엇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잘 쓰고 싶다는 강박이요. 잘 써야겠다는 막연한 강박이 더 잘 쓸수 없게끔 만드니까요. 저는 어떤 작가를 좋아할 때 작품 하나만 가지고 그 작가를 좋아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초기작부터 지금까지 어떤 경로로 나아왔는지, 작품을 남기면서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살펴보는 걸 좋아해요. 개인의 굴곡진 서사를 그려가는 게 무척 재미있어요. 이처럼 소설을 쓸 때 아쉬운 작품이 있어도 다음 단계에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스스로에게 관대한 편인가요? 엄격한 편인가요? 관대한 편인 것 같아요.(웃음) 관대해야 하는 것 같고요.

관대해지고 싶을 때 무엇을 하나요? 몸을 많이 움직여요. 생각을 많이 안 하고 산책하거나 공기놀이를 계속 해요. 공기놀이를 하다 보면 명상하는 것처럼 마음이 깨끗해지고 아무 생각도 안 하게 돼요. 공깃돌의 움직임에만 집중하게 되니까. 그런 걸로 수련을 열심히 해요.(웃음) 결국에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어느 정도 인지를 인지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구나 하고.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야 다시 쓸 수 있으니까요. 초등학교 때 쓴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고요. “일기를 안 써서 칠판에 이름이 적혔다. 아이, 성질난다. 그렇지만 내가 잘못했는데 뭘. 다음부터 잘하지 뭐.”(웃음)

무척 쿨한 어린이였네요. 깜짝 놀랐어요. 이런 태도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쓰게 될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까치에 관한 소설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동네에 까치가 많아서 평소 유심히 보는데, 볼수록 머리가 굉장히 좋고 움직임이 절제되어 있는데 또 귀엽고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맹금류를 두려워하지 않고 우습게 보는 태도도 아주 멋있는 것 같고요. 서울에 사는 젊은 청년들과 까치의 이야기를 엮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2021 젊은작가상 소설가 한정현 우리의 소원은 과학소년

한정현
<우리의 소원은 과학소년>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를 썼다.

 

“사랑 때문에 망하는 게 뭐 어때요?”

– 소설 <우리의 소원은 과학소년> 중에서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소설 <우리의 소원은 과학소년>에서 한 구절을 오늘 낭독하기로 했죠. 어떤 구절을 선택했나요? “사랑 때문에 망하는게 뭐 어때요.” 이 문장은 제가 어떤 소설을 쓰건 꼭 넣으려고 한 문장이에요. 그 뒤에 나오는 대사는 “돈과 권력 때문에 망하는 사내보다 낫지 않나요”이고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가 지금까지 본 소설에서 꼭 여자는 사랑 때문에 망해 인생을 그르치고 주변을 망쳤다고 비난받아요. 근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 때문에 망하는 여자가 돈과 권력 때문에 망하고 주변을 모두 파괴해버리는 남자보다는 낫지 않나 싶거든요. 그 생각이 이 소설의 한 축이 돼 시작했고, 또 제 소설의 세계관인 것 같아 이 문장을 꼽고 싶었어요. 그리고 하나 더 꼽자면 소설 중 “손과 발을 청결히 할 것, 활기차게 생활할 것, 환자에게 친절할 것, 간호원이라는 인식을 가질 것, 협동할 것, 환자의 험담을 하지 말 것, 이름을 기억할 것, 조선 여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것, 그리고 낙관할 것.” 이런 문장이 있어요. “그리고 낙관할 것”이라는 문장에 대해서는 작가 노트에 쓰기도 했어요. 무작정 낙관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 이야기 속 사람들처럼 살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고 응원하자는 마음으로 쓴 거예요. 소설에서도 그렇고 제게도 중요한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처음 꼽은 “사랑 때문에 망하는 게 뭐 어때요”에 동의하는 게, 적어도 사랑은 남을 해치지 않잖아요. 한데 사랑을 선택한 사람들을 두고 ‘고작 사랑 때문에’라고 하잖아요. 그렇죠. 굉장히 한심한 여자로 취급하죠. 모순적인 것 같아요. 흔히 이 세상에서 사랑과 바꿀 수 있는 가치가 없다고 하고, 사랑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막상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을 보면 한심하게 여기잖아요. 한편으로는 남자들이 사랑에 모든 것을 걸면 멋있다고 해요, 로맨티시스트라고 하고. 그런데 여자들이 사랑에 뭔가를 걸면 미친 여자라고 하죠. 사랑을 선택하는여자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이 문장을 골랐어요.

지금 작가를 붙잡고 있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면요? ‘어떤 사건 이후에 남은 사람들의 고통은 언제 사라지는 걸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어요. 살아남았다고 하는데 정말 살아 있는 걸까, 그냥 남은 게 아닐까? 하는. 보통 가족 안에서 어떤 것이 유전 된다고들 하잖아요. 저는 생물학적 요소가 유전된다는 건 잘 믿지 않고, 오히려 기억이나 고통이 유전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큰 사건을 함께 겪은 가족들을 보면서 남은 사람들의 고통이 언제 끝날지 많이 생각해보고 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할 수 있는 고통도 마찬가지고요.

소설을 쓸수록 소설에서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나요? 저는 이야기 속에서 악한 인물을 그리지 않아요. 적어도 소설을 쓰려면 인물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데, 악한 인물에 대해 깊게 이해해야 하는 나의 시간과 지면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주로 좋아하고 닮고 싶은 인물들 이야기를 쓰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이런 인물이 될 수는 없지만 쓰면서 나아지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것 같고요. 요즘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을 그리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긍정이나 낙관을 배워요.

이야기가 주는 힘에 대해, 그 막강함에 대해 체감할 때가 있나요? 무엇이 작가를 계속 쓰는 사람으로 머물게 하나요? 최초로 이야기에 힘을 느낀 건 아주 어릴 때 메르헨 동화 시리즈 중 《착한 마녀》를 읽었을 때예요. 어린 수습 마녀가 선배 마녀들이 하는 행동이 너무 한심해서 선배 마녀들의 빗자루에 불을 질러요. 그런 뒤 인간들에게 빼앗은 것들을 돌려주는 내용인데,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주인공을 보면 되바라진 아이잖아요. 근데 저는 아주 어릴 때인데도 그 인물이 참 좋더라고요. 그렇게 옳은 길을 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또 제가 비건을 지향하는데 그건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말을 인용한 배수아 작가의 《당나귀들》을 읽고 영향을 받았고요. 《독학자》라는 소설에서 혼자 공부하는 인물에게서도 영향을 받았어요. 로베르트 볼라뇨의 《부적》이라는 소설에 “내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유머 감각을 유지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와요. 시위 도중에 대학교 화장실에서 혼자 일주일을 버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여자의 이야기거든요. 일주일 간 아무것도 못 먹고 화장실에서 버티는 건 진짜 힘든 일이잖아요. 이야기 안에서 실제로 그 여자가 미쳤다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여러 행동으로 미루어봤을 때 트라우마 때문에 미쳐버린 걸로 짐작이 돼요.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계속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극단적인 상황에서 보이는 인간의 태도,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이 주는 힘을 믿는 편이에요.

작가가 사랑하는 이야기에는 어떤 교집합이 있나요? 욕망이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좋아해요. 한국 사회에서 욕망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부정적으로 쓰이잖아요. 저는 반대로 욕망이 있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을 살게 하는 거니까요. 동시에 그 욕망이 타인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배수아, 황정은 작가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인물들의 욕망이 굉장히 선하고, 타인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거든요.

‘쓰는 당신’이 가진 것 중 훼손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요? 주변을 보면 힘든 상황에서도 삶을 긍정적으로 끌고 간 사람들이 많아요. 저는 옆에서 그런 태도를 많이 배우려고 노력했고요. 제 긍정적인 면, 낙관적인 면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심신이 건강한 상태로 오래 쓰기 위해서는 무엇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요즘엔 차라리 자의식 과잉이 낫다고 말해요. 남의 시선이라는 게 정말 교묘한 것 같아요. 특히나 요즘에는 대놓고 누군가를 가르치려거나 통제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그대신 점점 그 방식이 교묘해지는 것 같아요. 가령 ‘정말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남들이 보기에 뭐라고 생각하겠니’ ‘보편적으로 봐봐, 보편적인 것도 중요하지 않니?’ 등으로 둔갑하는 말들이요. 듣는 당시에는 모른 채 휩쓸렸다가 ‘왜 그렇게 괴로웠지’ 하고 되돌아보면 결국 남의 시선 때문이었더라고요. 그걸 벗어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남의 시선을 차단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이게 작업할 때 누군가 해주는 좋은 말을 차단하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그 교묘한 말들 사이에서 스스로 구분하는 방법을 알아차려야 해요. 남의 시선과 조언을 헷갈리지 않도록. 조언은 정말 저 자신 혹은 제 작품 같이 어떤 한 가지만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 같거든요. 기준은 타인이 아니라 나인 거예요. 건강하게 쓰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남의 시선과 조언을 구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스스로에게 관대한 편인가요? 엄격한 편인가요? 관대하다고 생각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저를 두고 스스로 에게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양면적인 것 같아요. 생활 면에서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정신적인 면에서는 관대해요. 저라도 저를 칭찬해주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어요.(웃음) 한국 사회에서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면 받게 되는 공격들이 정해져 있어요. 자의식 과잉이다, 나르시시스트다, 안일하다 등.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정신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최고의 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티팬은 세상에 아주 많거든요. 채찍질해서 뭐할 거냐는 말이죠. 반대로 작가라는 직업은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않는 프리랜서이니 생활적인 부분에서는 엄격하게 관리할 필요가 있고요. 어떤 시간이 되면 특정 일을 하도록 알람을 설정해둬요. 그러잖으면 이불 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쓰게 될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지금 장편을 완성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제 소설에 등장한 여성과는 조금 다른 스타일의 여성이 등장해요. 일본에서 살고 있으며 대학 강사이자 연구자인데 전임 교수가 되고 싶어서 온 영혼을 끌어모으는 사람이죠. 여성이자 재외국민이라는 위치 때문에 압박감을 느끼고, 한국에 있을 때 기억상실증을 얻었고, 지금은 일본인 퀴어 친구와 동거하고 있어요. 그 친구를 가족처럼 아끼고 의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처지에 불안감을 느끼고, 그런 자신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게 아닌가 하는 갈등 또한 늘 가지고 있어요. 자신의 위치와 지위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사람인데, 어느 날 한국에서 한때 깊이 사랑했던 친구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그 친구와 서로를 셜록과 왓슨이라고 부를 정도로 죽이 잘 맞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기도 했고, 또 그 실종과 관련된 기억의 일부를 떠올리면서 잠시 한국으로 가게 돼요. 그 친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실종이 역사적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면서 이야기가 진행돼요.

추리소설이자 성장담의 느낌도 있는데요. 그저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 끝에 남겨져 있던 단 하나의 기억이 바로 사랑이었던.

 

 

 

2021 젊은작가상 소설가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체공녀 강주룡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 2015년 실천문학 신인상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2015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을 썼다.

 

“여자 선생은 아첨하는 기색 하나 없이 당신을 칭찬한다. 당신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건 당신이 아주 오랜만에 듣는 당신에 대한 칭찬이기 때문이다. 원래 피부가 이렇게 좋으세요? 모공이 연예인보다 더 쫀쫀한 것 같아요. 손 모델 하셔도 되겠어요, 손가락도 이쁘시고 네일 바디가 잘 잡혀 있어서. 피부과나 네일 숍에서 듣는 칭찬과 방금 들은 그 칭찬의 다른 점은 가만히 있는 당신의 몸이 아니라 당신이 실제로 방금 해낸 일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 소설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중에서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소설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에서 한 구절을 오늘 낭독하기로 했죠. 어떤 구절을 선택했나요? “피부과나 네일 숍에서 듣는 칭찬과 방금 들은 그 칭찬의 다른 점은 가만히 있는 당신의 몸이 아니라 당신이 실제로 방금 해낸 일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타고난 것들, 그러니까 생김새나 꾸밈새와 관련한 것이 아니라 방금 한 일을 칭찬받는 경험을 오랜만에 하는 가정주부의 심정을 쓴 문장이에요. 소설 제목은 <당신 어머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니가 패배하는 소설이에요. 이 장면은 주인공이 승리감을 맛보는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인 것 같아서, 그리고 그첫 순간이기도 해서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저 역시 이 문단이 참 좋았어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면서 듣는 칭찬의 80%는 늘 그런 것들이었으니까요. 가정주부이건 아니건. 그렇죠. 가정주부면 가정주부여서, 대학생이면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벌써 이렇게 허리가 굵으면 어떡해’ ‘벌써 이렇게 머리숱이 적어서 어떡해’ 등 이상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하는 말들이잖아요. 그 기준에 맞으면 칭찬을 듣고, 아니면 욕을 먹고. 그런 것들을 의식하며 쓴 것 같아요.

무엇을 보고 느낄 때 유난히 쓰고 싶어지나요? 어떤 이야기를 쓰려고 했을 때 핵심적으로 생각한 장면에 도달할 때 빨리 쓰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그 장면에 도달하려고 더 빨리 쓰는 거죠. 가닥이 잡히면 더 신이 나서 쓰고요. 소설가 전상국 선생님께서 ‘신명에 붙들려서 쓴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원하는 장면에 도달했을 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질문의 의도에 맞는 답변인지는 모르겠어요.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는데 그건 너무 많아요. 이상한 말이지만 밥이 맛있어서도 쓰고 싶고, 화가 나서도 쓰고 싶고, 기분이 좋아서도 쓰고 싶어요.

소설을 쓸수록 소설에서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나요? 확실히 장편 하나를 쓸 때마다 그런 게 생기는 것 같아요. 종종 독자들이 소설 속 인물과 제가 얼마나 닮았는지 물어보실 때가 있어요. 전혀 닮지 않았거든요. 가령 소설 《채공녀 강주룡》에서 ‘주룡’이 하루 종일 한 일을 나열한 다음에 ‘이만하면 오늘도 떳떳하다’고 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 주룡의 기운이나 기세를 저도 닮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하는 일은 ‘쓰기’니까 그렇게 부지런하게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거죠. 소설 《마르타의 일》의 주인공 ‘수아’도 일정과 목표가 딱딱 잡혀 있는 사람인데 저는 많이 흐트러진 사람이거든요. 수아를 보면서 보다 계획적인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그런 지점들이 생겨요. 쓰는 내내 저와 같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내가 창조한 허구의 인물에게서 뭔가를 배운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그 정도로 믿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마치 내 방에 살고 있는 룸메이트처럼 느껴져야 독자들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작가가 사랑하는 이야기에는 어떤 교집합이 있나요? 꼭 주인공이 아니어도 등장인물 한 명 정도는 내가 사랑하면서 끝낼 수 있는 이야기.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작가가 끝내 사랑하게 된 인물들이 누군지 궁금해요.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스밀라’,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제루샤 애벗)’, 미우치 스즈에 《유리가면》의 ‘히메가와 아유미’ 정도가 떠오르는데요. 스밀라는 초반부터 엄청나게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느꼈어요. 특히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뚱뚱한 남자애, 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단을 읽는 순간 이 사람을 너무너무 사랑하게 된 것 같고, 아마 앞으로도 이 사람을 잊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키다리 아저씨》는 지난해 연말쯤 다시 읽었는데 그 전에는 단순히 고아 소녀가 후원을 받아 대학에 가는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30대 작가가 되어서 다시 읽어보니 한 사람의 작가가 성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더라고요. 주디가 자신의 첫 이야기를 신문사에 팔고 받은 1천 달러를 그대로 아저씨에게 보내면서 드디어 작가가 되었다고, 그동안 후원해준 데 대한 보답이라고 말해요. 그 순간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제가 이 이야기를 10대, 20대, 30대에 걸쳐 읽는 셈인데 읽을 때마다 감흥이 달라요. 지금은 어떤 작가, 특히 여성 작가가 성장하는 이야기로 읽혀서 더 사랑하게 됐죠. 그리고 주디의 명랑함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유리가면》의 히메가와 아유미는 처음에는 진짜 싫어했어요.(웃음) 이야기의 주동인물이 ‘기타지마 마야’이니만큼, 기타지마 마야를 응원하면서 보기 마련이잖아요.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진짜 재수 없게 나오는데 이 캐릭터의 전사를 고려해보니 오히려 너무 유복하기 때문에 그가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마 ‘두 사람의 왕녀’ 편 직전에 한 번 나올 텐데 그에 대한 자신의 콤플렉스마저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기타지마 마야를 향한 순정에 가까운 열망.(웃음) 그게 워낙 곧은 인물이어서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결국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이야기가 주는 힘에 대해, 그 막강함에 대해 체감할 때가 있나요? 무엇이 작가를 계속 쓰는 사람으로 머물게 하나요? 이야기가 없는 걸 상상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대상의 매력을 모른 채 소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가령 ‘대부도 포도’라고 하면 짧은 상품명에서도 서사가 나오거든요. 어디서 온포도라는 것,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포도는 사지 않죠. 어떤 브랜드가 명품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 창시되었고, 어떤 디자이너가 만들었고, 어떤 철학을 갖고 디자인해 왔는지가 필요한 건데. 존재하는 이상 서사가 있어야 하고요. 그 서사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갈리는 것뿐이지 서사가 없는 건 상상할 수 없죠. 요새 집에 혼자 있다 보니까 계속 넷플릭스를 틀어두거든요. <빅뱅이론> 같은 고전 미드들을 많이 봐요. 왜 우리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을 때 “안사요” 하고 답하잖아요. 영어에도 그 표현을 쓰더라고요. “I don’t buy it”. ‘지금 당신이 하는 말 하나도 안 믿어’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더라고요. 팔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믿을 만한 스토리여야 한다는 기조에서 나온 관용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에나 서사가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더라고요.

듣다 보니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서사가 있다는 말, 그게 이야기가 지닌 근본적인 힘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고파는 데 비유를 한 김에 말하자면 예컨대 아이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스티브 잡스가 ‘이거 팔리겠어?’하고 만들었다면 누가 사겠어요. 당연히 이게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었겠죠. 자기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이 최고이고 정답이라고 생각해야지 사는 사람도 설득 될 거란 말이에요. 저도 쓸 때만큼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게 최고의 이야기라고 믿으면서 쓰는 것 같아요. 다 쓰고 나서 독자분들 앞에서 겸손의 태도를 갖는 것과는 별개로.

‘쓰는 당신’이 가진 것 중 훼손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요? 물리적으로는 허리고요. 정서적으로는 방금 전 이야기한 스밀라가 그러했듯 아무리 잘돼도 내가 소수자고 패배자였다는 감각은 잊지 않으려고 해요. 그렇다고 이 사실에서 피해 의식을 건져 올리겠다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도 춤 신청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적어도 무엇은 쓰고 싶지 않나요? 그런 건 딱히 제한을 두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인간의 복잡성을 믿기 때문에 누구나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이해하는 서사를 쓰고 싶다는 충동이 늘 있는데, 그럼에도 절대로 이해해줘서는 안 되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아요. 서사적으로는 범죄자들로차도 어떻게든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같은 일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왜 그런 짓을 저지르는지에 대해서는 서사로 풀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그 서사가 그들의 변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고 싶지 않아요. 제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변명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는 주의하고 싶어요.

앞으로 쓰게 될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몇 년째 약을 팔고 있는데.(웃음) 경성 어번 판타지물을 쓰고 있어요. 경성을 배경으로 한 청소년 소설인데 어번 판타지물이에요. 좀 부담이 되더라고요. 마무리가 잘 안 되는 이야기인데··· 어째야 할지···.

 

 

 

2021 젊은작가상 소설가 김멜라 나뭇잎이 마르고 적어도 두 번 2014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김멜라
<나뭇잎이 마르고>

2014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적어도 두 번》을 썼다.

 

“술 좀 작작 마셔요. 체는 걸음을 멈추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었다. 기뻐하는 건지 아파하는 건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앙헬은 체가 다 웃을 때까지 옆에 서서 기다렸다.”

– 소설 <나뭇잎이 마르고> 중에서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소설 <나뭇잎이 마르고>에서 한 구절을 오늘 낭독하기로 했죠. 어떤 구절을 선택했나요? “술 좀 작작 마셔요.” ‘앙헬’이 ‘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어요. “선배” 이렇게 부르고 술 좀 작작 마시라고 말해요. 체가 막 웃으니까 그 옆에서 웃는 걸 기다려주거든요. 그런 마음. 체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체가 술을 조금만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 좀 덜 주고, 자기 자신을 챙겼으면 하는 마음이죠. 소설 속 인물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우리도 일상에서 충분히 주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잖아요. 다정하다고 할 순 없지만, 어쩌면 조금 투박하지만 인간관계에서 나눌 수 있는 다정한 말이 아닐까요?

지금 작가를 붙잡고 있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면요? 신을 부르는 호칭이 왜 남성형일까 하는 질문이요. ‘하나님 아버지’도 그렇고 ‘성부’와 ‘성자’도 그렇고요. 꼭 신만이 아니라 신이 은혜를 내려주는 대상도 거의 대부분 남성형으로 표현되어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일 수 있는 단어들이 왜 그런 것인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이 질문들을 바탕으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관련된 책도 찾아 보며 생각을 넓혀가고 있어요.

소설 <나뭇잎이 마르고>도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인 색을 띠고 있잖아요. 동시에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이고요. 네. 맞아요. 종교적인 지점이 있는데 그건 제게 중요한 문제예요. 글을 쓰는 데 있어서도 그렇지만 인생을 놓고 봐도 그래요. 종교와 성적인 것이, 이 둘이 서로를 굉장히 미워하잖아요. 그 간극을 다시 생각해보는 거죠. 이 경우 양쪽에게 모두 비판받을 수 있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도 있을 수 있지만, 제 안에서는 이야기를 만들며 조화를 이뤄가는 과정이 있을 것 같거든요. 한 번에 이뤄지는 건 아니겠지만요.

무엇을 보고 느낄 때 유난히 쓰고 싶어지나요? 방금 이야기한 이런 의문이 들 때요. 당연하게 생각한 것에 의문을 제기할 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볼 때나 상황을 볼 때, 내 상상력을 깨뜨리고 넓혀주는 상황을 마주할 때 소설로 표현해보고 싶죠.

소설을 쓸수록 소설에서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나요? 생각 속에 막연히 있던 것을 글로 꺼내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거잖아요. 초고 쓰고, 퇴고하고, 편집자님과 같이 교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글이 많이 다듬어져요. 저 스스로도 계속 생각하게 되고요. 그 과정이 힘들지만 거기에서 많이 배우고요. 혼자만의 망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화된 형식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배우는 거죠. 실제로 소설이 점점 괜찮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해요. 전에는 워낙 못 썼기 때문에.(웃음) 지금도 뛰어난 건 아니지만 전에 비하면 발전했다는 평을 받고, 동시에 인간으로서도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전보다 좋은 쪽으로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어요. 이 둘이 함께 가는 것 아닐까요?

이야기가 주는 힘에 대해, 그 막강함에 대해 체감할 때가 있나요? 소설 <나뭇잎이 마르고>의 ‘앙헬’과 ‘체’는 소설 속 인물이지만 누군가는 그걸 읽고 실존 인물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단 말이죠. 실체를 가진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요. 이야기 속 허구의 인물이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야말로 실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럴 때 굉장히 두렵죠. 정신 차리고 써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제가 소설을 쓰면서 이야기 속 인물이 되어보는 경험을 통해서도 성장하지만 이 글을 누군가 읽는다는 생각을 하면 그때부터 두려움이 드는 동시에 섬세하게 여러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게 되는 것 같아요. 눈치를 보면서 도덕적인 글을 쓰겠다는 것은 아니고요. 세상을 향해 어떤 목소리를 낼 기회를 얻은 것이니 최대한 많은 것을 다양하게 고려해보게 되거든요. 태도 면에서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 느껴요.

작가가 사랑하는 이야기에는 어떤 교집합이 있나요? 크게 두 가지인데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소설을 좋아해요. 이야기 속 인물의 어떤 행동이 작위적이고 인과관계가 충분치 않다고 하더라도 인물 자체가 지닌 빛나는 어떤 지점이 있잖아요. 읽는 저를 깨워주고, 조금 심각한 말로는 자유를 주는.(웃음) 이런 사람도 있고, 이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깨뜨려주는, 제게 자유를 주는 소설이 좋아요. 또 하나는 삶 속에 여러 어려움이 있잖아요. 좌절, 절망, 슬픔… 수많은 어려움을 건너고 건너 어렵게 사랑쪽으로 몸을 틀고 있는 이야기들, 사랑하기로 다시 한번 마음을 먹어보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그런 이야기는 작가를 떠나서 인생을 두고 봤을 때도 도움이 되고요.

사랑하는 이야기의 작가나 작품을 꼽아주시겠어요? 알베르 카뮈의 모든 작품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방인》은 그런 이야기로 다가왔어요. 큰 기쁨을 줬고요. 윤성희 작가님의 <낮술> 속 풍경, 그 속의 사람들을 좋아해요. 인물을 묘사하는 흐름이 과하지 않게 느껴져요. 초고에는 등장인물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소설을 시작했는데, 결국 마지막에 그냥 넘어지는 것으로 끝내셨다는 글을 읽은 적 있거든요. 이제는 윤성희 작가님이 왜 그러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무엇이 작가를 계속 쓰는 사람으로 머물게 하나요? 앞에서 이야기 나눈 자유를 느끼고 싶어서 쓰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다른 일도 많이 시도해봤거든요. 몸 쓰는 일을 좋아하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해봤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기술도 배워봤어요. 컴퓨터 기술을 배워서 창업 같은 것도 해보고. 글을 안 쓰고 살려고 한 게 아니라 글로 돈을 벌기는 힘드니까 다른 일로 돈을 벌면서 글을 쓰려고 한 거예요. 실용적이고 눈에 보이는 일을 갖고 싶었어요. 근데 다 안 됐죠. 돌아보면 글을 쓰는 일이 가장 저한테 맞고 그나마 제일 효용성이 있다고 할까요? 그나마 들인 것에 비해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가장 많은 일이에요. 다른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더라고요.(웃음) 열심히 하려고 해도.

‘쓰는 당신’이 가진 것 중 훼손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요?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쓰고 싶은 마음이 있고, 쓸 수 있는 기회와 조건, 시간이 주어진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해요. 그리고 저는 쓰는 것만큼 읽는 것도 좋아하는데 어떤 노년의 학자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책을 읽으면 그 책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을 것만 같아서 늘 설렌다고요. 지금까지 무수한 책을 읽었을 텐데도 여전히 너무 설렌다는 거죠. 저도 그런 기분을 느끼거든요. ‘이 책에 뭔가 있을 것 같아, 나를 뒤흔들 것 같아’ 하고. 그런 설렘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 자신에 감사해요. 제 안에 계속해서 남아 있으면 좋겠어요.

스스로에게 관대한 편인가요? 엄격한 편인가요? 주로 엄격하려고 하는데 마지막 순간에는 놓죠. ‘아이, 됐어. 이 정도면 뭐. 그만해’ 하고.(웃음) 어떤 면에서는 관대함이 지속 가능성과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내일 또 쓰자, 다음에 더 잘 쓰자’ 하는 마음. 그게 다른 의미에서의 엄격함이기도 하거든요. 이전 작품보다는 조금만 더 나아가자 하고 쓰는 데 의의를 두려고 하는 태도를 갖기가 때로 더 어렵잖아요. 내일이 있다는 생각을 반복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쓰게 될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최근에 쓴 이야기를 이야기하면, 거의 직전에 완성한 건데 <물오리>라는 짧은 소설이에요. 소설 속 대사 중에 “사람이 살게 해줘야 살지”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제가 평소 생각한 문장도 아니고 썩 좋아하는 타입의 문장도 아니거든요. 이런 따뜻한 말을 잘 안 하는 편인데 점점 달라지고 있는 걸 느껴요. 이 말은 자살 시도를 한 딸을 둔 아버지가 하는 혼잣말인데 사람이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을 두고 쉽게 비판하기도 하잖아요. 그렇다면 과연 사람이 살게 해준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이런 문장이 나온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