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내 눈앞에서 사라진 쓰레기는 누군가의 손으로, 지구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다.

 

아무리 빨아도 와이셔츠에 밴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은옥은 퇴근길에 문방구에 들러 댓살과 얼레를 샀다. 문방구 주인은 선반 깊숙한 곳에서 먼지가 잔뜩 묻은 플라스틱 얼레를 꺼내주었다.

이봐, 활벌이줄은 십오 도 정도 구부러지게. 츳츳, 달을 붙이는 데도 순서가 있다고. 머릿달, 귓달, 꽁숫달, 허릿달 순으로 해야 해. 은옥은 저녁도 먹지 않은 채 거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남편의 와이셔츠로 연을 만들었다. 이런 세상에, 한 번도 연을 날려본 적이 없는 거야? _하성란, <와이셔츠> 중에서

 

결혼 7년 차, 실직하고 하루 만에 동네 건달이 되고만 ‘상현’이 애정을 쏟는 대상은 연이다. 동네 아이들에게 연을 만들어주며 하루를 보내는 상현과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 ‘은옥’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만 한다. 하릴 없이 연이나 만들고 있는 상현이 은옥의 눈에 들 리 없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상현이 아니라 은옥이 연을 만든다. 옥상에서 연을 날리고 있는 사람도 은옥이다. 연의 재료는 상현의 와이셔츠 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어느 날 상현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소설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은옥이 처음에 남편의 부재를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였다는 것, 남편에게서 느껴지는 패배와 불운의 기운과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걱정과 염려보다 우선이었다. 남편의 부재를 깨달은 곳은 친구 아이의 돌잔치였고, 은옥이 사는 아파트에서 여고생이 투신하자 그제야 그가 사라졌다는 걸 실감한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상현은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살던 옛집 근처에서 은옥이 상현의 와이셔츠를 발견했을 뿐이다.

은옥이 연을 날리는 장면을 납득하기가 영 어려웠다. 상현의 와이셔츠를 가져와 연을 만들어 날리다니, 어쩌자고 이런 모호한, 조금 무책임하게 느껴질 정도로 은유적인 결말을 맺은 것일까? 고개가 갸우뚱해지려는 순간, 전신주에 걸린 실 끊어진 연처럼 붙어 있는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은옥은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돌리면서 혹시 바다에 빠진 조난자는 없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이 문장은 내게 은옥이 연을 날리는 행위는 은유가 아니라는 것, 상현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 은옥의 간절한 마음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다 보니 아무래도 스토리를 따라가며 충실히 감정이입을 하기보다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고 끌고 갔는지에 더 주의를 기울이며 읽게 된다. 뒷짐 지고 멀치감찌에서 이야기를 바라보다가 내가 왜 그 이야기를 읽고 있는지를 잊었던 모양이다. 그 순간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서 저래’ 하며 집게손가락을 세워들고 요모조모 분석하는 자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무엇을 대하든 기본적인 자세는 역시 마음인가 보다. 어떤 일에 능숙해지면 마음을 놓쳐버리는 일이 간혹 있다. 쓰레기를 줄이는 실천도 다르지 않다. 분리수거를 하는 데는 분명 지식이 필요하다. 이건 이렇게 해서 저렇게 버려야 하고, 재활용이 되는 재질이라고 해서 다 수거되는 것도 아니고 수거된다고 해서 다 재활용이 되는 것도 아닌, 미리 알아야 할 정보가 제법 많다. 그래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로’ 간다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분리수거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도 나와 같은 ‘사람’이 일하고 있다는 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딱히 어려운 것도 없다. 내가 버리는 이 물건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려 다른 물건이 될 수 있도록 내놓는다는 마음이다. ‘버리는’ 게 아니라 ‘보낸다’는 마음, 그걸 잊지 않으면 복잡하고 까다로운 분리수거도 문제 될 게 없다.

이달 제로 웨이스트 칼럼의 주제는 재활용(recycle)이다. 지난달에 소개한 재사용과 비슷비슷한 단어 같은데, 나와 너가 다르듯이 둘은 다른 개념.

며칠 전 현수막으로 만든 가방과 폐플라스틱으로 만든 열쇠고리를 선물 받았다. 폐플라스틱으로 만든 점퍼나 핸드백, 폐그물로 만든 크루저 보드처럼, 완전히 다른 물건으로 재탄생하는 것이 재활용이다. 폐플라스틱으로 만든 폰 그립 같은 재활용 액세서리도 꽤 많이 나온다.

지난달에 소개한 재사용(reuse)에는 재공정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거나 제법 간단하다면, 재활용에는 에너지가 많이 든다. 이 과정에서 환경을 오염시키는 물질을 배출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단 재사용이 재활용보다 우선이다. 잘 버리는 것보다 버리지 않는 편이 낫다. 나는 요즘 옷을 사는 대신 옷을 천으로 되돌리는 일을 취미 삼아 하고 있다. 직조(織造) 혹은 위빙(weaving)이라고 하는 천 만들기다. 이 일을 하는 데는 재료를 구입할 필요가 없다. 일단 직조 틀이 필요한데 종이 상자로 만들 수 있다. 끝을 잘라내거나 핀셋을 꽂으면 틀이 된다. 나는 얼마 전 한 선배가 보내준 생선이 담겨 온 스티로폼 상자를 거실 매트를 만들기 위한 위빙 틀로 사용하고 있다. 새 실을 사는 대신 안 입는 옷이나 모자의 올을 풀어 실로 쓰고 있다. 안 입는 옷이 줄어드니 좋고, 새로 만든 위빙 작품을 집 안 구석구석에 장식해두니 색색의 작은 천 조각이 포인트가 되어 다정다감한 분위기가 연출되어 좋다. 재활용이 되지 않는 빨대도 훌륭한 취미거리가 될 수 있다. 힘멜리(himmeli)라는 북유럽 미술공예가 있다. 플라스틱 빨대로 만드는 장식품인데 빨대 안에 실을 넣어 다양한 모양의 다면체를 만든다. 도전해보려고 빨대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고 있다. 최근에는 선캐처(suncatcher) 만들기도 시도해보았다. 선캐처는 햇빛을 이용해 실내에 아름다운 빛과 색, 그림자의 변화를 만들어준다. 아메리칸인디언이 쓰던 풍수에 좋은 물건이라는데, 집 안에 좋은 기운을 불러들인다고 하고 인테리어 효과도 뛰어나다. 더 이상 쓰지 않는 액세서리들이 제법 훌륭한 재료가 된다. 색실에 매달아 밋밋한 곳에 걸어두면 오케이. 안 쓰는 에코백에 오래된 점퍼나 조끼를 충전재로 넣어서 쿠션으로 사용하거나, 가구를 리폼해서 쓰는 것도 환경을 지키면서 만드는 과정을 즐길 수 있는 멋진 취미다.

재활용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이제 다른 사람이 재활용할 수 있도록 배턴터치 해보자.

이제 정말로 버려야 하는 물건들, 아니 누군가에게 보내야 하는 물건들은 일단 깨끗이 씻는다. 오염물이 묻어 있으면 재활용이 되지 않으므로 음식물이 밴 물건은 재활용품 수거함이 아니라 종량제 봉투에 넣는 게 옳다. 일회용 음료를 마시고 난 팩이나 유리병, 페트병을 깨끗이 씻는다. 재활용 공정이 자동화되어 있더라도 1차 과정에서는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재활용품 선별장 작업자들의 손톱에 곰팡이가 생기는 건 우리가 제대로 씻지 않고 버리기 때문이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로 보낸다’는 마음가짐으로 씻는다. 음식물도 깨끗이 씻어내고 라벨이나 재질이 다른 뚜껑이나 부품도 떼어낸다. 그냥 설거지통에 같이 넣어두었다가 다른 식기들과 함께 건조대에 넣어두고 함께 말리면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 종이 라벨이 떨어지지 않으면 물에 담가 불린다.

두 번째 팁은 같은 것끼리 모으기다. 그다음에 팩은 팩끼리, 유리는 유리끼리,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끼리. 같은 재질끼리 모아서 분리수거통에 넣는다. ‘쓰레기를 나눠 배출한다’기보다는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원재료를 내놓는다’는 마음가짐이라면 꽤 복잡한 분리수거 요령을 일일이 익히지 않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최상의 상태고 분리수거가 가능한 재질이더라도 두 가지 이상이 섞인 것은 일단 재활용 불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재질이 섞여 있다면 둘 중 하나를 택한다. 비닐에 종이가 붙어 떨어지지 않으면 종이를 오려서, 종이는 종량제 봉투에, 비닐은 재활용품 수거함으로 보낸다. 살 때 한 가지 재질로 된 물건을 구입하는 것도 환경을 생각 하는 또 하나의 팁이다.

셋째는 재료들을 재활용하는 적절한 장소를 찾아주는 것이다. 분리수거를 해서 내놓을 때 집 앞보다 더 적절한 장소들이 있다. 요즘은 분리수거를 마을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주민센터 앞에 특정 재료들을 따로 모으는 수거함이 있어서 형광등이나 캔, 페트병은 먼저 이곳에 가져다준다. 커피큐브(coffeecube.co.kr)는 원두 찌꺼기가 환영받는 곳이다. 카페에서 원두 찌꺼기를 모아 이곳에 보내면 원두 찌꺼기로 만든 커피박 화분이나 연필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넷째, 재활용한 물건을 구입할 때는 그 또한 소비라는 점을 기억한다. 재활용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곧 환경을 살리는 것은 아니다. <위장환경주의>의 저자 카트린 하르트만은 소비가 환경 파괴를 낳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착한 소비도, 녹색 소비도, 지속 가능한 소비도, 재활용 물건을 사는 것도 분명 소비다. 사지 않아도 된다면 사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폐플라스틱으로 만든 점퍼와 이불을 세탁할 때마다 섬유에서 플라스틱 입자가 떨어져 나가는데, 마이크로 플라스틱이라고 불리는 이 입자는 그대로 바다로 흘러든다. 매년 1백53만 톤. 바다로 흘러드는 마이크로 플라스틱의 35%가 합성섬유를 빨 때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하니 우리가 합성섬유 재질의 옷과 이불을 빨지만 않아도 당장 3분의 1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전보다 빨래하는 간격을 줄였다. 값이 싸고, 폐플라스틱으로 만들었으니 자연을 보호한 셈이지 않은가 하는 자기 합리화로 불필요한 옷이나 이불을 더 구입할 생각은 접어두자. 생산과 소비를 줄이는 것이 기후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막는 길이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지속 가능한 물품들에 열을 올리게 된 것은 지나친 개발과 생산, 소비의 굴레가 지구가 버틸 수 있는 속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나는 생필품이나 주로 쓰는 물건을 재활용품으로 사용한다. 작가라서 다른 사람들보다 종이를 많이 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정오까지 집중해서 일하는데, 작업량은 매일 A4 한 장 정도. 하루에 종이 한 장은 꼭 쓰는 셈인데, 이를 재생 용지로 프린트한다. 전에는 수정할 때마다 매번 새로 출력해서 다시 보고 완성도가 조금이라도 높아지길 바랐다면, 요즘은 최소한으로 출력해서 종이 낭비를 줄이려고 한다. 한날한시가 급한 기후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잠시 우선순위를 바꿨다. 재생 용지는 환경 잡지사 ‘작은것이 아름답다’(www.jaga.or.kr)에서 구매한다. 비싼 100% 펄프 용지가 빛나는 흰색이라면 재생 용지는 옅은 미색인데 눈이 훨씬 편안하며 두께도 얇고 촉감도 더 편안하다. 이번 기회에 비품 담당자에게 제안해서 사무실에서 쓰는 프린터 용지를 바꾸어보면 어떨까. 이곳에서는 재생 용지로 만든 노트와 수첩, 연필도 구매할 수 있다.

업그레이드(upgrade)와 리사이클링(recycling)의 합성어인 업사이클링(up-cycling) 바람이 곳곳에서 불고 있다. 버려진 물건을 다시 사용하면서도 원래 물질보다 가치를 높인 업사이클링은 재활용을 하면서도 감각적 만족도가 높아진 대신 만드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많이 든다. 기능성과 가치가 떨어지는 다운사이클링(down-cycling) 쪽은 업사이클링 제품보다 훨씬 예쁘지 않다. 하지만 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재활용을 하고 있는지를 떠올리면 지구의 온도가 정상활 될 때까지만 미적 즐거움을 잠시 내려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 프리사이클링(pre-cycling)도 있다. 재활용이란 쓰레기를 배출한 사후 대처에 불과하니 아예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거다. 포장재 없는 제품만 판매하는 제로 웨이스트 매장이나 포장하지 않은 채 살 수 있는 시장이 프리사이클링을 실천하는 곳이다. 나는 시장 마니아다. 시장을 이용한 다음부터 포장재 분리수거에서 해방되었다. (시장 만세!)

마지막은 재활용에 대한 관심을 청소 노동자들에게도 보내는 것. 분리수거 차량이 밤에만 다니는 이유를 아는가. 낮에 분리수거 차량이 다니는 게 보기 좋지 않다는 민원 때문이라고 한다. 당신이 만약 환경에 관심이 있다면 청소 노동자들의 처우에도 귀를 기울여보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이들을 진짜로 없는 사람이라는 듯 안 보일 때 일하게 하고, 해고할 때는 1순위로 홀대하는 무례한 세계에 항의할 수 있다. 쓰레기를 제대로 버리는 일에 골몰하다가 아차 싶을 때는 내가 보지 못한 것이 보일 때다. 내가 버린 쓰레기가 다른 사람의 손으로 간다는 것을 잊을 때다. 무심코 쳐다본 쓰레기통에 시선이 머문다. 전에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던 쓰레기 더미를 유심히 보게 된다. 뚜껑이 달린 것들이 슬슬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정말로 없어지는 게 아닌데 보고 싶지 않다고 보이지 않게 해놓은 걸 정말 보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