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왜 아빠의 집착과 욕심은 엄마를 구속하는 걸까? 왜 엄마의 자유로운 성향은 아빠에게 상처를 주는 걸까?” 난 이렇게 대답했다. “왜 엄마는 아빠의 사랑을 집착이라 느끼는 거지?” 우린 진짜 맞지 않는 형제다. 개인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가족끼리도 의견이 나뉘는데, 다른 가족의 일원이던 누군가가 나와 짝을 이루어 살 수 있을까? 앞서 말한 일화에서 알 수 있듯, 나는 상대의 집착을 견디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나보다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담스럽다. 나는 이기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연애할 것이고, 상대 역시 본인을 위해 나를 만나는 사람이길 바랐다.

집착하지 않고, 상처를 주고받지 않고, 서로에게 나름의 이용 가치가 있을 것 같은 짝을 만났다. 그도 나와 같은 연애관을 가지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동거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사랑은 단칸 원룸에서 시작되었다. 24시간 중 24시간 동안 원시인들처럼 벌거벗은 채 본능에 충실하며 터질 듯한 심장박동의 합주를 즐겼다. 철없는 젊음을 만끽하며 우리는 평생이라는 약속 없이 먼 미래를 자연스럽게 그려갔다. 둘 중 누군가 배고프면 밥 해주고, 아프면 보
듬어주고, 일이 늦게 끝나면 역 앞에서 기다렸다가 손잡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뭔가를 해줄 수 있는 사이라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함께 만드는 경험이 켜켜이 쌓이며 우리의 원룸은 교집합이자 합집합이 되었다. 어느덧 둘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필요 없어졌다. 어차피 너는 내 옆에 있으니까.

 

차집합을 찾고자 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이대로 괜찮을까? 사랑 말고 내 미래 말이야.” 한때 미쳐있던 일에 다시 집중하고 싶었고, 친구들이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부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살아왔던 삶의 질서와 방식을 우리 사이에 끼워 넣자 그는 내게 변했다고 말했다. 지인과의 약속, 퇴근이 늦어진 날들, 나를 위한 시간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그와 자주 싸웠다. 동거 기간이 길어질수록 둘 사이의 사슬은 더욱 단단해졌지만, 그래도 늘
이 관계에서의 해방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지금 나는 태어난 지 50일 된 아이를 안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이의 엄마는 나와 9년간 동거했던 사람이다. 물론 어제는 왜 야근했는지, 그 녀석과 통화하며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물어보긴 했다. 우리는 결혼이라는 ‘퍼포먼스’를 했을 뿐, 여전히 동거의 합을 맞추고 있다. 다만 함께 살면서 누적된 모든 시간의 의미가 내가 느끼는 해방감의 욕구보다 강해졌으므로, 더 이상 저항은 없다. Y(일러스트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