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이야기

 

두 번의 참혹한 실패를 경험했지만, 나는 여전히 결혼과 동거를 구분하지 않는다. 서명할 때를 제외하면 다신 볼 일 없는 혼인신고 서류가 우리의 관계를 휘두르게 두지 않겠다는 마음이자, 남이나 다를 바 없는 먼 친척을 포함해 나와 연인의 세계관을 채운 사람들이 예식장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축의금을 걷는 행사로 쓰기에는 그 하루가 내 정서에 끼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고, 우리의 삶과 미래가 더 중요하다는 핑계가 있다.

결혼보다 가볍고, 한 사람과 24시간을 함께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동반한 나의 동거는 각자의 결심과 합의에서 시작했다. 한집에 너와 나의 물건이 자연스럽게 섞이다 못해 눌러앉은 동거는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처럼 느꼈다. 하지만 우리는 로맨스영화 주인공처럼 떨어지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서로를 곁에 두고 싶어 했고, 만남과 만남 사이의 공백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의 경제 상황과 지리적으로 공평한 위치, 그리고 몇 가지 취향에 맞춰 집을 고른 후 그 안에 들일 각종 물건을 샀다. 이 과정에서 가난은 수많은 타협으로 이어졌지만, 그건 낭만이라 바꿔 적어도 무방했다. “우리한테 저 소파는 무리야. 인테리어는 무슨, 도배만 다시 하자.” 이런 그의 말은 빵집에서 알뜰하게 할인받고 적립 카드를 꺼내는 모습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이 사람과 살기로 한 건 참 잘한 일이구나, 얼굴 한가득 웃음이 피었다.

애인과 함께 산다는 건 기존의 내 세계를 뒤엎고 새로 쌓는 일이다. 자주 함께 몰려 다니던 친구들에게는 비보일 것이고, 부모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그래서 동거를 허락하는 기준은 모든 생각과 일과의 중심에 애인을 두는 게 가능한지 묻는 데서 출발한다. ‘이만하면 됐다’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어도 막상 함께 살면 예상 밖의 누추한 현실을 더러 마주하게 된다. “여자친구가 집에 안 가는 기분이야”라는 마음이 못생긴 지인의 동거 후기에 공감은 안 돼도 이해는 할 수 있는 사례가 더러 생긴다. 화장실 선반에 내 치약을 두기 미안할 만큼 그는 많은 화장품을 거기에 둬야 하는구나, 일주일만 지나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한 움큼 쌓이는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 다만 이 모든 과정을 서로 묵묵히 허락하면 충만한 일상이 펼쳐진다. 애인이 요가 매트 위에서 팔다리를 펼칠 때의 농염한 자태와 지적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을 지켜볼 축복 같은 권한이 생긴다. 또 집에 손님이 오면 어쩐지 으쓱해진다. 애인과 나는 각자 다르지만 둘 다 멋진 취향이 있고, 그걸 한집에 펼치면 근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건 우리 관계를 더욱 단단히 결속하는 요소였다. 빨래와 청소, 설거지, 분리수거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그건 귀찮고 성가신 일일 뿐이고, 그걸 연인이 하는 모습을 보기 싫다면 먼저 나서 시간을 투자하면 된다.

우리는 애인을 아는 만큼 애인을 모른다. 애인도 나를 모를 것이다. 그러니 자주 묻고 답해야 한다. 함께 산다는 건 그런 시간을 선뜻 내주는 일이다. 만약 말실수로 애인을 서운하게 했다면, 내일을 위해 즉시 원만하게 해결해야 한다는 걸 온몸으로 깨닫는다. 함께 울거나 웃고, 덩달아 따르는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며 애인은 이렇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새삼스레 깨달아도 좋은 시간이 동거다.

그러다 불쑥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지으면 한껏 취한 것처럼 달려들어야 한다. 이 집은 우리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니까, 몸이 뒤엉키는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탁자에 고개를 푹 숙여도, 작은 소파에 뒤엉켜도, 서로의 몸짓에 큰 소리로 반응해도 좋다. “제가 원래는 이렇게 피지컬 한 사람이 아니었어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우리의 관계가 처연하게 늙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리고 한참 동안 뒤엉킨 채 집 안 곳곳을 누비다 침대에 널브러질 때 애인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 왼편에 눕는다는 사실에 웃는 얼굴로 빤히 쳐다본다. 어쩌면 동거를 유지하는 묘약은 백 마디 말보다 강렬한 몸의 대화가 아닐까? 잠깐 웃다가 다시 애인의 몸 위에 오른다. “벌써?”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 내려다보면, 그는 눈을 피하며 작은 소리로 답한다. “이게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몰랐어요.”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은 도망치고 싶을 만큼 유치하지만, 동거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도 온몸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신뢰와 판타지가 뒤섞인 삶을 맞이하는 일이다. Y(프리랜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