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이었을 것이다. 별생각 없이 침대에 누웠는데 누군가에게 사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군가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었고, 사과의 내용도 텅 비어 있었다. 그저 그동안 살아오면서 잘못을 저질러놓고 사과하지 않은 일들이 내용은 없이 형식만 남아 사과 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사과를 받는다면 괜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 또 어느 가을날에는 역시 별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특정한 개인이었고, 그는 나를 오해해서 나에 대한 험담을 다른 이들에게 늘어놓았는데 명백하게 따지고 들면 그가 나에게 사과해야겠지만, 상황과 관계없이 내가 그에게 사과하고 싶어졌다. 내가 사과해서 만약에 그가 편해진다면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시시비비는 중요하지 않았다.

조해진의 <완벽한 생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과 받고 사과해야 할 사람들이 발화되지 않은 미안하다는 말을 찾아 헤맨다. 도망치거나 묻어두거나 아파하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할 어느 구석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다. 그중 누군가는 엉뚱한 이를 붙들고 사과한다. 잠깐 내 딸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죽은 딸에게 하지 못한 사과를 ‘미정’에게 대신 하는 ‘보경’이 그렇다. ‘윤주’는 자신의 삶을 비웃은 직장 동료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대신 함께 일하는 것을 거부하고, 어느 날 직장인 방송사를 떠난 작가 윤주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다시 그들을 찾는다. 사과를 받기 위해서다.
타인의 사사로운 실언으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윤주 말고도, 제주의 보경과 미정, 홍콩의 ‘시징’과 ‘에디’들은 누군가가 사과하지 않은, 책임지지 않은 짐을 떠맡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깊이 배려하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는데도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한 건 왜일까?
이 소설은 소설이 쓰여질 즈음, 2020년부터 2021년까지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 사고들을 끌어안고 있다. 그 기간 동안 나 또한, 내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서 더 이상 무책임하게 도피할 수 없음을 깨닫기도 했기에, 한 권의 소설에 그 일들을 모두 안아서 써버린 작가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책을 읽고 난 뒤에는 많이 어지러웠음을, 그러나 기꺼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어지러움이었음을 동시에 고백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잘못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호의를 갖고 다가가도 서로 상처를 주기 쉬운 시간과 공간에서 만났다.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우리가 그들에게. 더 늦기 전에, 상처가 더 커져서 우리를 잡아먹기 전에 사과의 말이 제자리에 전해지기를 바란다.
내게 제로 웨이스트는 지구에 보내는 사과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제로 웨이스트 실천을 개인적으로 이어가면서, 때로는 거의 하루 치의 에너지를 전부 다 써야 불필요한 쓰레기를 생산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불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과대 포장을 하지 않는 점포들을 골라 구매하고, 씻고 말려서 분리수거 규칙을 정확하게 지키고, 더 적절한 수거 장소를 찾는 일은 늘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가능했다. 몸이 아프거나 일정이 바쁜 날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일회용품 사용량이 다시 늘어나고 말았다. 물론 개인적인 실천을 계속해서 이어가겠지만, 더불어 함께 지속해야 할 것은 사회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린피스 영국 사무소에서 해양 캠페인을 총괄을 하는 윌 맥컬럼은 제로 웨이스트의 마지막 단계를 ‘항의’라고 꼽는다. 플라스틱 줄이기 캠페인은 혼자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플라스틱을 없애기 위해 ‘목소리를 내라’고 권유하며 친절하고 세세하게 그 방법들을 알려준다. 그는 ‘플라스틱을 포기하는 노력은 수백만 명이 함께 해야 성공할 수 있고, 당신의 목소리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 꼭 필요하다’고 일깨운다. 관계 부서에 편지를 쓰고, 담당자를 만나고, 원하지 않은 플라스틱 과대 포장을 그 기업에 도로 돌려보내라고 말한다. 시위와 캠페인에 참여하고, 때로는 스스로 캠페인을 열어보는 적극적인 시도를 하라고 용기를 불어넣는다.

나는 최근에 청탁받은 대부분의 원고를 제로 웨이스트와 관련한 주제로 이어갔다. 에세이만이 아니다. 쓰레기를 줄이자는 건 소설이 될 수 있었다. 나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처지가 되어 태평양 한가운데 섬으로 떠다니는 사람들 이야기를 썼다. 소수민족 소녀가 북극의 개발을 막기 위해서 시간을 멈추어버린다는 이야기를 썼다. 계속해서 로봇 쓰레기를 방출하면서 집에서 가상현실의 안락함을 누리는 미래 인류의 모습을 그렸다. 기후 현상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 날씨를 제어하는 직업군이 생기고, 그것으로도 통제가 되지 않아 사표를 쓰는 미래 직업군 날씨통제사에 대해서 썼다. 목소리를 낼 기회가 있으면 기후위기를 언급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코로나19 관련 강연에서도 제로 웨이스트를, 요가 관련 강연에서도 환경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다.

TV를 1시간 동안 보면 290gr, 전자레인지를 1분 돌리면 20gr, 세탁기는 1회에 4,500gr, 에어컨은 1시간에 1,800gr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진공청소기 1시간에 756gr, 냉장고 하루에 5,760,gr, 전기오븐 1시간에 5,760gr, 식기세척기 1회에 1,170gr…. 이렇게 개개인이 셈을 해가며 열정적으로 탄소 배출을 줄이고 있는데도 지구의 온도가 내려가지 않는 이유는 점진적 해법이 통할 수 있는 시간이 이미 지나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후위기와 불평등에 맞선 그린뉴딜>의 저자인 김병권은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을 탄소 의존형 경제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현재의 시장구조와 산업구조를 그대로 둔 채’로는 위기 극복이 불가능하므로 ‘경제구조와 산업구조를 과감하게 개혁해야’, ‘경제 격변 수준의 충격이 가해져야 이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탄소 배출량 증가 속도를 늦추는 게 아니라, 절대적 감소, 10년 안에 절반을 줄이는 정도로 감소해야 가능하다고 진단한다. (10%를 줄여도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4배 이상 충격이 온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구를 오염시키는 대가로 이익을 얻는 산업 이익집단과 그들을 홍보하는 이들, 정치인과 언론들이다. 지구기후연대처럼 지구온난화를 부인하는 기업의 로비 그룹도 존재한다. 미국 하원 에너지상업위원장을 역임한 조 바턴은 “이산화탄소는 증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온이 반드시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라거나 ”우리는 기온이 떨어지는 시기에 접어들고 있는지 모른다”같은 무지한 발언을 일삼으며 기후위기를 부정한다. 이유는 단순한데, 그가 화석연료업계에서 후원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텍사스주의 환경과학 교과서에서는 지구온난화와 관련해 ‘과거의 지구는 오늘날보다 훨씬 따듯했고, 바다생물의 화석은 해양의 수위가 오늘날보다 훨씬 높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니 지구가 조금 더 따뜻해진다고 해서 그것이 큰 문제가 될까?’라고 적혀 있다. 다음 세대에 거짓 지식을 교육하면서 그들이 지키려고 하는 게 대체 뭘까? 돈이다. 석유 개발로 인한 이익이다.
기후위기의 주된 책임을 져야 할 (우리나라를 포함한) 선진국들이 탄소 배출량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다. 기업과 정부가 경제적 손실을 이유로 탄소 배출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 기업은 친환경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나 기업이 이윤 추구의 주체인 한 그들의 환경친화적인 제스처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을 쉽게 누그러뜨려서는 안 된다.

오존층 파괴의 주범으로 프레온가스 생산과 소비를 규제한 것은 1987년의 일로, 오존 구멍이 발견된 1985년에서 2년이 지난 후였다. 긴급하고 신속하게 규제가 이뤄진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화학 회사들의 로비였다고 한다. 일광욕을 즐기는 미국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감하는 분위기가 일자, 외국의 다른 화학 회사들에 경쟁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미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프레온가스를 생산하지 못하도록 미국의 화학 회사에서 규제 협상을 지원한 것이다.

기업 간의 경쟁을 둘러싼 교묘한 친환경적 제스처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적용된다. 독점적 지위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미국 정부가 석유 기업과 자동차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일 때 독일, 프랑스, 일본은 미국 기업들에 배출량을 줄이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이 국가들이 배출량을 지정할 때의 기준은 미국 기업에는 불리하지만 자국의 산업은 위축시키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을 살펴보자. 기후변화대응지수는 전체 61위 중 58위다. 1인당 석탄 소비량은 1.73TOE로 세계 2위, 이산화탄소 농도는 415.2ppm으로 지구 평균보다 7.4ppm이 높다. 유럽 각국에서 2030년경 석탄 화력을 조기 퇴진시키는 추세에 반해 대한민국 정부는 10년 안에 석탄 발전소 7기를 새로 짓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계획은 노후 석탄 발전소의 폐기와 전환 계획 사이에 숨겨져 있다.

인류학자인 마거릿 미드는 말한다. “문제의식을 지닌 시민들로 구성된 작은 집단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말라. 실제로 지금까지 세상을 변화시켜온 유일한 집단은 바로 이러한 집단이다.” 석유 재벌과 기업의 나라인 미국에서는 2007년에 스텝잇업(Step It Up, 딛고 일어서자는 뜻)이라는 단체가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각자의 도시에서 행진과 시위를 조직했다. 3개월 동안 1천4백여 마을과 도시에서 사람들이 이에 화답했고 3백여 도시에서 15만 명이 참가한 항의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새로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에 이산화탄소 배출에 관한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요구했다.

기업과 정부가 이해관계에 얽혀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면 개개인의 제로 웨이스트 실천가들, 바로 당신과 내가 목소리를 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이제 기후위기는 30년 후, 50년 후의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의 문제다. 지구시스템과학센터장인 마이클 만은 말한다. 지구온난화란 ‘문자 그대로 집에 불이 났다는 뜻’이다!